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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김형렬 종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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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상미 작성일2018.10.08 조회3,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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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연구위원 신상미

 

 

목차

 1. 머리말 

 2. 김형렬의 약력과 가계도
   (1) 약력
   (2) 가계도 

 3. 종도 김형렬
   (1) 상제님 최초의 종도
   (2) 김형렬의 성(誠)ㆍ경(敬)ㆍ신(信) 

 4. 상제님 화천하신 후의 김형렬
   (1) 미륵불교 창시
   (2) 독립운동 

 5. 맺음말  

 

 

 

1. 머리말

  

…상제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서로 동 서로 멀리 나뉘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은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 (교운 1장 7절)   

 

  김형렬(金亨烈)은 상제님을 모신 최초의 종도로서 1902(壬寅)년 4월 15일부터 1909(己酉)년 6월 24일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까지 상제님을 추종하였다. 상제님을 모신 종도들은 많지만 위의 『典經』구절‘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김형렬은 진실된 마음으로 상제님을 모셨던 종도였다.

   

  고부화액 때 체포되었던 二十여 명의 종도 중에 김 형렬·김 자현 두 사람밖에 남지 않고 다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3장 66절) 

  

  상제께서 형렬(亨烈)의 집에 머무르고 계실 때 형렬이 집안이 가난하여 보리밥으로 상제를 공양하여 오던 차에 八월 추석절을 맞게 되어 쇠솥을 팔아서 공양코자 하는지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彌勒佛)이 출세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예시 86절) 

    

  그뿐만 아니라 고부화액 때 고문을 당하며 고생했던 종도들 대부분이 떠났어도 김형렬 종도는 상제님 곁에 남았다. 게다가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기간에서 8년 동안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껏 상제님을 시종하였으니 수도함에 있어서 김형렬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김형렬의 약력과 가계도

   

(1) 약력 

 ㈀ 본명(족보) : 원회(元會), 호 태운(太雲)

 ㈁ 본관 : 안동(安東), 파는 구안동파(舊安東派)의 문헌공파(文獻公派) 

 ㈂ 부(父) 김석필(金石必)과 모(母)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1남 1녀 중 장남(長男), 부인 장수 황씨(長水黃氏)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둠.

 ㈃ 이력 : 한학을 공부함. 동학군(영화 “화평의 길”에서 1894년 김형렬과 안필성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을 때 상제님께서 구해주신 내용이 나옴)

 ㈄ 출생일 : 족보에는 1862(壬戌)년 5월 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적등본을 보면 단기 4188년으로 서기 1855(乙卯)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01 가족들도 임술(壬戌)생으로 알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본적은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597번지이다.

 ㈅ 작고일 : 1932(壬申)년 11월 28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597번지에서 71(재적등본상의 나이 : 78)세에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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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적지 위치: 

  ① 김형렬 본적지 : 전라북도 김제군(시) 금산면 청도리 597번지
  ㆍ앞대문 경위도 : E127˚01`17.77" , N35˚43`39.65"
  ㆍ뒷문 경위도 : E127˚01`17.69" , N35˚43`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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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묘소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용화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ㆍ고도 : 203m

  ㆍ경위도 : E127˚02`56.08" , N35˚43`4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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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김형렬 종도 손자 김현식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金堤市 金山面 淸道里) 612-1번지

   ㆍ 경위도 : E127˚01`21.74" , N35˚43`37.55"

 

  

(2) 가계도02 

  ① 김형렬 가족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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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렬 종도 부친의 자는 족보상에 김석필(錫弼)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제적 등본에는 김석필(石必)로 기록되어 있다. 김형렬 종도를 포함하여 12남매였으나 모두 병으로 잃고 본인과 막내 여동생만이 살아남았다.

  김형렬 부인은 1858(戊午)년 생으로 김형렬 종도보다 4살이 더 많다. 김형렬 종도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으며 1902(壬寅)년 산후 복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 상제님께서 보살펴 주셨는데 그때 낳은 아이가 3남 김상용이며 집에서는 ‘천리마’라고 불렀다. 

  김형렬의 막내 딸 김말순은 상제님의 수부(首婦)로서 김수부라고 불렸다.03 1890(庚寅)년에 출생한 김수부는 1911(辛亥)년 22세에 작고하였고, 묘는 김현식씨 집의 뒷산에 도보로 10분 거리인 곳에 있다. 

김형렬 손자인 김현식04씨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워낙 엄하셔서 대화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② 김형렬과 친족관계인 종도

 ㆍ 김형렬 종도의 매제 - 이환구 종도

 ㆍ 김형렬의 1녀 사위 - 정성백 종도

 ㆍ 김형렬의 4촌지간 - 김준상 종도, 김갑칠 종도 : 숙부인 김기범씨의 아들 김준상(장남)종도, 김갑칠(차남)종도. 김준상의 차남인 태성씨의 아들은 현 동곡마을 이장이다. 김현식씨의 증언에 의하면 종도 김준상이 김형렬 종도가 작고하였을 때 사망 신고하였다고 한다.

 ㆍ 김형렬과 10촌지간 - 김자현 종도
  (손자 김택식씨는 사망하였고, 증손자 김용희씨는 살아 있다.)

 

  

3. 종도 김형렬

  

(1) 상제님 최초의 종도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 十三일에 김 형렬의 집에 이르셨도다. 때마침 형렬의 아내가 막내아들을 분만할 때니라. 그 부인은 산후 四十九일간 산후 복통으로 고생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형렬이 매우 근심하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후부터 나를 믿고 근심을 놓으라” 하시니 그는 상제의 도움을 믿고 근심을 놓았도다. 이로부터 부인은 복통과 천식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도다. (제생 5절) 

    

  상제께서 이해 四월 보름에 김 형렬에게 심법을 전수하시고 九월 十九일까지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셨도다. (교운 1장 4절) 

    

  위의 구절과 같이 김형렬(金亨烈) 종도는 1902(壬寅)년 4월 15일부터 1909(己酉)년 6월24일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까지 모셨던 최초의 종도이다. 그전에 김형렬 종도는 1894(甲午)년에 상제님의 성예(聲譽)05를 듣고 찾아뵈어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할 정도로 배움에 있어 적극적이었던 인물이다.06 

  그는 금구 환평(金溝 環坪)에서 하운동 제비창골, 제비창골에서 청도리로 이사하면서 상제님의 9년간의 천지공사 기간 동안 가족 모두와 함께 지극정성으로 상제님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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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典經』에는 기록된 바 없지만 김현식씨의 증언에 의하면 상제님께서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금산사 돌무지개문 위에서 김형렬을 부르곤 하셨다고 한다. 이 당시 김형렬은 전북 전주군 우림면 하운동 제비창골(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에서 살았다. 이 두 곳의 거리는 다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산 하나를 사이에 둔 먼 거리이다. 그런데 “형렬아! 형렬아!”하고 상제님께서 부르는 소리가 나면 김형렬은 알아듣고 돌무지개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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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典經』에는 김형렬에 관한 구절이 무려 107개가 있다. 그중에서 김형렬이 상제님의 9년 공사를 받들며 참여했던 공사를 정리해 보았다. 우선 구절에 종도들이나 여러 종도, 모든 종도라고 한 부분에는 정확히 김형렬이 참여를 하였는지 불분명하여 기록하지 않았고 이름이 확실히 거론된 부분만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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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형렬의 성(誠)ㆍ경(敬)ㆍ신(信)

  

  상제님을 따르던 종도들 중에서 성(誠)ㆍ경(敬)ㆍ신(信)이 지극하였던 김형렬의 정성이 드러난 구절은 다음과 같다. 

    

  七월에 상제께서 본댁에 돌아와 계시므로 김 형렬은 상제를 배알하고자 그곳으로 가다가 문득 소퇴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꺼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 가다가 본댁에서 하운동으로 향하시는 상제를 만나 뵈옵고 기뻐하였도다. 

형렬은 반기면서 좁은 길에 들어선 것을 아뢰고 “이 길에 들어서 오지 않았더라면 뵈옵지 못하였겠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서로 동 서로 멀리 나누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은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 (교운 1장 7절) 

    

  출옥한 종도들은 제각기 집에 돌아갔으나 경석은 고부에 와서 상제의 출옥을 二월 四일 경칩일(驚蟄日)까지 기다려 상제를 맞이하여 객망리 본댁으로 모시고 형렬은 상제께서 출옥하심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고 동곡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3장 64절) 

    

  고부화액 때 체포되었던 二十여 명의 종도 중에 김 형렬·김 자현 두 사람밖에 남지 않고 다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3장 66절) 

   

  위의 구절들은 수도인으로서 평소에 반드시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삼요체(三要諦)인 성(誠)ㆍ경(敬)ㆍ신(信)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성(誠)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어떠한 사심(邪心) 없이 순일무위(純一無僞)한 진실함을 뜻한다. 교운 1장 7절에 따르면 상제님을 사심 없이 진심으로 따르는 김형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敬)은 마음에서 비롯하여 예의에 알맞게 몸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 궁극적 존재에 대한 공경을 뜻한다. 또한 “경은 모든 예의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듯이 예의적 실천은 경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록 3장 64절에 따르면 출옥한 후 김형렬 외에 한 사람만 남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나 상제님께서 출옥하실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제님을 걱정하며 기다린 김형렬을 통해 경(敬)을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信)의 의미는 마음의 성(誠)과 몸의 경(敬)이 갖추어져 일을 행할 때 드러나는 결과를 말한다. 즉 신이란 기심(欺心) 없이 예절에 맞게 행하여 의심 없는 굳은 신념으로 상제님을 따라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상제님을 믿고 따름에 있어서 신(信)이 없다면 성(誠)과 경(敬)은 무용지물이 된다. 행록 3장 66절에 따르면 고부화액 때 체포되었던 종도들이 너도나도 속았다며 상제님을 따르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으나 김형렬은 끝까지 남아 상제님을 따르는 것으로 신(信)을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상제님께서 그러한 김형렬에게 도움을 주셨던 구절 중에 한 구절이다. 

  

  상제께서 임인년 여름철을 맞이하여 형렬의 집에 가셔서 지내시니라.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상제께 드리는 공궤가 소략하고 더욱이 가뭄 때문에 밭에 심은 채소도 가뭄을 탄 탓으로 더욱 걱정 근심하니 그 사정을 관찰하시고 상제께서 “산중에 별미가 있는 것이 무엇이리요. 채소의 별미라도 있어야 할 터이니라”고 하시고 “걱정 근심을 말라”하셨도다. 이 말씀이 계신 후 채소가 잘 자라 형렬이 한결 근심을 덜었도다. (교운 1장 1절)  

  

  1902년 가뭄이 들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힘들었을 김형렬은 오히려 상제께 드리는 공궤가 소략함을 걱정하였다. 상제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마음을 아시고 근심을 덜어 주시고자 채소가 잘 자라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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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지극정성으로 상제님을 믿고 행하며 따르던 형렬은 7년 동안 모시는 가운데 1909(己酉)년 상제님께서 그의 집을 찾으셨을 때 식량이 떨어져서 손님이 오는 것을 괴롭게 여겼다. 이때 상제님께서 “개문납객(開門納客)에 기수기연(其數其然)이라 하나니 사람의 집에 손님이 많이 와야 하나니라”07 하시며 잘못됨을 깨우쳐 주셨다.

  이렇듯 상제님께서는 진심으로 따르고 행하는 종도에게는 칭찬과 함께 도움을 주셨고, 상제님을 따름에 있어서 잘못됨이 있을 경우에는 깨닫게 하여 바르게 행하도록 인도하셨다. 특히 김형렬이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기에 더욱더 상제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실 기회도 많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4. 상제님 화천하신 후의 김형렬

  

(1) 미륵불교 창시 

  

  상제께서 수박에 소주를 넣어서 우물에 담갔다가 가져오게 하셨도다. 그 수박을 앞에 놓고 가라사대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곧 죽으리라.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약방 대청에 앉아 형렬에게 꿀물 한 그릇을 청하여 마시고 형렬에게 기대어 가는 소리로 태을주를 읽고 누우시니라. 이날 몹시 무더워 형렬과 종도들이 모두 뒤 대밭가에 나가 있었도다. 응종이 상제께서 계신 방이 너무 조용하기에 이상한 마음이 들어 방을 들여다보니 상제께서 조용히 누워 계시는데 가까이 가서 자기의 뺨을 상제의 용안에 대어보니 이미 싸늘히 화천(化天)하신지라. 응종이 놀라서 급히 화천하심을 소리치니 나갔던 종도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 하리오”하며 탄식하니라. 갑자기 뭉게구름이 사방을 덮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하신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는도다. 때는 단기 四千二百四十二년 이조 순종 융회 三년 기유 六월 二十四일 신축 사시이고 서기로는 一九○九년 八월 九일이었도다. (행록 5장 35절) 

    

  위의 구절처럼 상제님께서는 1909년 6월 24일 39세로 화천하셨다. 김현식씨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에 소주(그 당시 소주는 알코올 30°였음) 한 동이를 사흘 만에 드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드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꿀을 타서 하루 5대접(한 동이는 15대접 정도 나오는 양이다)씩 드시고 돌아가셨다고 그 당시 수발을 들었던 어머니께 전해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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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상제님의 화천에 크게 낙심한 종도들은 각기 흩어져 나름대로 상제님을 모시고자 교단을 창립하기 시작하였다. 김형렬 또한 그러한 종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11(辛亥)년 9월 고수부(高首婦)가 정읍 대흥리에서 최초로 교단을 창립했다. 김형렬은 이곳에 있다가 1914(甲寅)년 정월에 차경석과의 갈등으로 교단을 이탈하여 정씨 부인을 모셔서 교단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다 1915(乙卯)년 봄에 모악산(母岳山) 금강대에 올라가 100일 수련을 한 후 신안(神眼)이 열려 교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특정한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으나 금산사의 미륵불을 영체(靈體)로 받들었기 때문에 금산사 미륵불을 받드는 종교단체로 알려졌다.

  1919(己未)년 9월에 독립운동을 한다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교단이 잠시 해산되었다가 석방된 후 1921(辛酉)년 봄에 서울에 올라가 불교진흥회를 조직하였다. 1922(壬戌)년 9월에는 불교진흥회를 미륵불교로 고치고 본부를 금산사로 옮겼다. 미륵불교는 상제님을 미륵불(彌勒佛)로 보고 곧 미륵불의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도래될 것을 믿는 증산계열의 종교였으나, 김형렬의 미륵불교를 이어받은 최선애(崔善愛)의 종교단체는 상제님을 미륵으로 보면서도 불교에 연맥을 대려고 하고 있다.08 미륵불교는 김형렬이 작고한 후에 해산되었다가 유제봉에 이어 최선애에 의해 이어졌다. 1970(庚戌)년 2월 20일에 문화공보부에 대한불교법상종이라는 종교단체 제24호로 등록하였으며, 현재는 ‘미륵불교법상종’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최선애가 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몇 명의 종도가 있는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의 현황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2) 독립운동

  

  대다수의 한국민족종교는 조선말과 일제시기에 외세침략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민족주체사상과 자주의식을 고양하고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당시의 민족종교단체는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으로 종교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천도교는 소년운동ㆍ여성운동ㆍ문화운동 등과 같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보천교는 물산장려 운동을 이끌었고, 대종교는 만주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하였다. 원불교는 외형적인 항일투쟁보다는 저축조합 운동과 개간운동, 농촌개발운동, 교육운동 등 민중의식의 계발과 실존상황의 개선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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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증산계열의 종교에서는 신명계(神明界)의 도움으로 조국을 해방시키려고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종교의식들을 행하였다. 특히 김형렬은 1916년 그의 신도 360명을 선발하여 전국 360개 군(郡)에 보내 한날한시에 물형부(物形符)를 전신주 밑에 묻고 일본에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원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패방을 기원하는 신앙적인 노력 이외에도 직접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도우려고 노력한 김형렬은 1917년에는 그의 신도들과 함께 독립운동성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10 

  3ㆍ1운동 이후 1919년 9월 신도 수십 명을 데리고 금산사 미륵전에서 치성을 드리다 “김형렬과 곽법경(郭法鏡)이 공모하여 금산사에 수백 명의 동지를 모아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획책한다.”는 밀고 때문에 일본경찰에 6개월 동안 취조 받다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11 미륵불교 『 』12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김형렬 중심으로 6천여 신도가 일대 모금 운동을 일으켜 백성욱을 통하여 극비리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한편 호국불교 운동을 하다가 1919년 9월 19일에 금산사 향로 전에서 불공 중에 일본관헌인 전주경찰대가 급습하였는데, 80명 연행 중에 28명이 전주형무소 제8호실 감방에 수감되어 6개월의 체형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직접ㆍ간접적인 독립운동을 해온 김형렬은 1919년 3ㆍ1운동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재판결과 기록이 없어서 현재 건국공로훈장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현재 모악산 금산사 가는 길에 보면 ‘太雲金亨烈先生等八十八人愛國志士忠魂碑’라는 석비를 볼 수 있다. 1982년 세워졌다는 이 비에는 상제님의 명에 따라 생명을 받쳐 조국광복의 국권을 회복할 것을 다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히 어떠한 명이었는지 기록되진 않았다. 단 미륵불교 『 법상종략사』에는 상제께서 유언으로 김형렬에게 대원사에 가서 박금곡과 상의하여 독립운동군자금을 보급키로 하였다고 나와 있다.13 상제님의 유언이나 명에 따라 독립운동을 다짐하였다는 부분에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5. 맺음말

  

  종도 김형렬은 한학을 공부하여 종도들 중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에 속하였다. 당시에는 신분차별과 어려운 생활 때문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 

  상제님의 9년 간의 천지공사에 큰 공을 세운 김형렬은 고부화액 때 체포되었던 종도들이 상제님을 따르지 않고 모두 흩어졌으나 끝까지 남아 상제님을 따름으로서 굳은 신념과 의리를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크게 낙심하였던 김형렬은 고생 끝에 “미륵불교”라는 교단을 세웠다. 이 교단은 상제님을 미륵불(彌勒佛)로 보고 곧 미륵불의 용화회상이 도래될 것을 믿는 증산계열의 종교였다. 

  한편 1919년인 일제강점기에 종교조직으로 신도들을 모아 은밀하게 군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그는 다소 주술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민중들의 염원과 독립의지를 종교적인 방법으로 집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제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구술로 후세에 전하게 함으로써 큰 공적을 이뤘다고 본다. 

  비록 상제님 화천 후 방법은 잘못되었을지 모르나 상제님을 끝까지 믿고 따르겠다는 일념으로 행해 온 김형렬 종도를 통하여 수도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성(誠)ㆍ경(敬)ㆍ신(信)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겠다. 

    <대순회보> 108호

 

<참고문헌>
1) 기본자료
ㆍ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13판, 대순진리회 출판사, 2010.

2) 단행본
ㆍ홍범초, 『汎甑山敎史』, 한누리, 1988.
ㆍ윤이흠,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 모시는 사람들, 2007.
ㆍ이정립, 『증산교사』, 증산교 본부, 1977.
ㆍ한국민족운동사,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종교』, 국학자료원, 2002.
ㆍ대한민국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9』, 시사문화사, pp.545∼547.
ㆍ최선애, 『 』, 湖西出版社, 1975.
ㆍ류병덕, 『일제시의 미륵하생신앙』, 한국미륵사상연구(서울: 동국대출판부), 1987.
ㆍ한국민족종교협의회, 『한국민족종교운동사』, 한국민족종교협의회, 2003.

3) 논문
ㆍ고남식, 「해원 주제 강증산 전승 연구」 , 건국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ㆍ장정태, 「일제하 신흥종교 연구」 ,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4) 인터뷰
ㆍ김형렬 종도의 손자 김현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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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6ㆍ25때 소멸되고 1952년에 재제(再製)한 제적등본, 1962년에 재작된 족보 자료 참조.
02 1962년에 제작된 김형렬 종도의 족보와 제적등본과 2009년, 2010년 김형렬 손자 김현식씨 와의 인터뷰 참조.
03 행록 5장 31절 참고.
04 김형렬 종도의 장남 김찬문씨의 3남으로 1918(戊午)년 10월 29일 생이다.
05 세상에 떨치는 이름과 칭송받는 명예.
06 행록 1장 21절 참고.
07 공사 3장 36절.
08 류병덕, 『일제시의 미륵하생신앙』, 한국미륵사상연구(서울: 동국대출판부), 1987.
09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한국민족종교운동사』, 한국민족종교협의회, 2003, p.31.
10 “太雲金亨烈先生等八十八人愛國志士忠魂碑”에서 ‘…金山寺에 모여 全國 彌勒 崇奉者 數百萬名을 代理한 7,000명의 全國 總代 88명을 이끌고 募金한 돈을 前 內務部 長官이었던 백성도 스님(당시 19세)를 上海臨時政府 資金 傳達者로 選定 1917년 3만여 원을 1차로 송금하고 수차에 걸쳐 밀파했다.…’는 내용 참고.
11 대한민국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한민족독립운동사9』, 시사문화사, 1991.
12 최선애, 『법상종략사 』, 湖西出版社, 1975.
13 ‘삭발 위승하여, 불지양생(佛之養生)이니 불(佛)로써 제치라 하심을 깨닫고 즉시 대원사에 가서 박금곡과 곽법경 등 삼인(三人)이 결의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보급키로 결정하되…’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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