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화고양심(良心)의 관점으로 보는 역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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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7 조회3,424회 댓글0건본문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 (『대순진리회요람』, pp.18~19)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 세종대왕은 백성을 아끼는 양심적인 군주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정사에 임하여 독단을 멀리하고 조정 대신들과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당시 사대부 중에서 형벌로 죽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세종대왕의 덕치를 잘 드러내 주는 대목입니다. 원금을 넘는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만삭의 몸을 이끌고 일하는 노비를 보고 마음 아파했던 세종대왕은 산후 100일의 출산휴가를 제정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출산 전 한 달의 휴가를 추가로 부여해 만삭의 몸으로 일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어 산모의 남편 또한 출생 후 30일간의 휴가를 부여받아 아내를 돌볼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습니다.01 출산휴가제는 현대적인 법 제정보다 5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인본주의 정책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위대한 양심적인 군주였습니다.
세종대왕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혹자는 세종대왕이 덕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왕권을 강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세종대왕 못지않게 태종도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치세의 업적이 크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역사관은 바른 것일까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세종대왕이나 태종, 세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양심의 관점에서 보는가, 권력의 관점에서 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응당하게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전경』에 상제님께서 “걸 왕은 당시에 악하였고 탕 왕은 당시에 선하였는데 하늘의 도가 걸에게는 악을 가르쳤고 탕에게는 선을 가르쳤다.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도다(桀惡其時也 湯善其時也 天道敎桀於惡 天道敎湯於善 桀之亡湯之興在伊尹).”(공사 3장 39절)이라 하셨습니다. 걸의 악정(惡政)이나 탕의 선정(善政)은 다 하늘이 하는 일이지만 하늘이 일을 그렇게 꾸미는 것은 권선징악의 교훈을 인류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악을 행한 걸은 망하고 선을 행한 탕은 흥했다는 것이니, 하늘이 이윤이라는 성인을 통하여 상제님의 의지를 관철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이 이렇게 단순합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전부 ‘걸지망(桀之亡) 탕지흥(湯之興)’ 두 문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의 사관은 무용합니다. 역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위정자의 자기변명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흥망(興亡)의 근원은 선악(善惡)이고 선악의 근원은 양심(良心)과 비양심(非良心)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역사관은 간단하게 양심사관(良心史觀)으로 대체됩니다.
일찍이 사람들은 역사관에 양심을 붙여 양심사관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양심은 사심(私心)에 가려져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심사관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어도 역사적 기록은 전승자의 기록으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사관이 어떠하였든지 역사를 보는 관점은 양심의 관점으로 보느냐 권력의 관점으로 보느냐의 차이로 대별됩니다. 이제는 우리 인류가 자신의 과거사를 양심에 비추어서 분별해볼 시간이 왔습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과거를 양심에 비추어 반성해볼 지각이 없습니다. 그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비로소 자신의 삶을 양심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영적 성장의 길에서 어느 정도 의식이 성숙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역사를 양심의 관점에서 분별해보지 못할 것입니다.
시속에 ‘하늘에는 별, 인간에게는 양심’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낮에 태양이 빛나기 때문이고 밤에는 달이 뜨고 별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왜 밤하늘의 별을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달은 이지러지고 기우는 것이 있어도 별은 항상 그 자리에서 언제나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별이 있어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에게서 태양처럼 별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양심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사(人事)의 모든 것을 분별하는 잣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는 천리(天理)를 인사에 구현하는 것이고, ‘안에서와같이 밖에서도’는 양심을 인사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도전님께서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의 합일성을 밝혀 만상만유가 도(道) 안에서 생성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확신케 하여야 한다.”02 하셨는데, 참으로 그러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양심의 자기 구현과정이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집단지성인 인류 집단양심의 자기 구현과정으로 보는 것, 이것이 양심사관입니다.
이것은 객관성과 주관성을 다 같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역사 자체를 양심의 발현과정으로 보는 객관적 시각과 역사의 판단을 인간 내면의 양심을 잣대로 하여 분별하는 주관적 시각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유물사관, 관념사관, 보편적 역사관, 상대주의 역사관, 진보사관, 순환사관 등 사관이라 하면 어떤 경우도 이렇게 두 가지 관점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사관은 아마도 우리 인류가 발견한 최후의 사관이 될 것입니다. 양심사관의 연장선에서 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관이 나옵니다. 양심사관이 보편화된다면 그다음 사관으로의 발전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 됩니다. 이러한 사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제님의 사관입니다. 상제님께서 우리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시는 관점입니다. 인류가 이 단계까지 와야 진정으로 영적인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여정을 아버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철이 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를 상제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의식의 성숙도를 표상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아버지의 관점에서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길 때 효성(孝誠)도 나오고 보은(報恩)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도의 보은상생(報恩相生)의 벽화는 이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양심은 정직하고 진실한 인성의 본질입니다.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고, 사람은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양심과 사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매우 명백하게 올바른 사관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본 세종대왕의 성덕은 태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문제 제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후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을 살해하는 패륜을 자행합니다. 장자승계의 유학 법칙을 따르고 패륜의 책임을 일시 모면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 방과를 내세워 즉위하게 하니 그가 정종입니다. 이후 정종을 압박하는 이방원의 행위에 여러 왕자가 분개하다가 방원과 함께 비어 있는 왕세자 자리를 탐하던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이를 제압한 방원은 왕세자로 등극하고 그해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니 그가 태종입니다. 왕세자를 죽인 이방원의 행위는 당연히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 대한 반발이었고, 이성계는 이방원을 미워하여 ‘함흥차사’의 고사를 남겼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도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8~1392)를 개경 선죽교에서 철퇴로 때려죽이는 폭거를 자행하였습니다. 그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는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를 회유하였고, 정몽주는 이에 대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단심가(丹心歌)」로 답하여 충의를 꺾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03
이런 태종의 셋째 아들이 세종대왕입니다.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백성을 사랑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조선조 가장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순환하는 걸까요. 세종대왕은 문종과 후에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잡아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을 낳았습니다.
세조는 조선 제일의 충의를 지킨 충신, 성상문(成三問, 1418~1456)을 능지처참하는 폭거를 행하였습니다. 흔히 영웅과 성인에게는 기이한 탄생설화가 있는데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는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하였다고 합니다.04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거사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심한 문초를 받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문초를 당하면서도 성삼문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시종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며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당차게 말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습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05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습니다.
성삼문의 이런 절의는 위에서 언급한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됩니다. 정몽주의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입니다. 정몽주에게 「단심가(丹心歌)」가 있다면 성삼문에게는 유명한 「절의가(絶義歌)」가 있습니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06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성삼문의 오랜 벗이었습니다. 신숙주는 계유정난에 세조를 도와 세조 즉위 후에는 영의정까지 오르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신숙주의 절개가 녹두나물처럼 잘 변한다고 하여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상제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요?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숙주나물을 씹으며 신숙주의 변절을 질타하는 것이 상제님의 뜻과 다름없습니다. 도주님께서도 종도들과 함께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초혼한 곳인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들르시어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東雞祠)와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진 삼은각(三隱閣), 단종의 숙모전(肅慕殿),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를 돌아보시고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습니다.07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후한을 남기지 않으려고 단종을 죽이려하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너는 참으로 악독하고 표독하구나. 내 아들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도 그래도 부족하여 벽지인 영월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 하는구나. 네가 나와 무슨 원한이 그리 심하기에 이처럼 악착스러우냐. 이제 내가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08라고 한 후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급사하고, 둘째아들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신병(神病)을 앓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세조 자신도 꿈에 현덕왕후가 침을 뱉은 곳에서 종기가 생기기 시작하여 온몸에 퍼지고 죽는 날까지 이 악성 피부병에 시달렸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입니다.
세조의 양심을 저버리고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패행(悖行)의 후과로 살아서 받은 신벌(神罰)보다 패덕한 임금으로 만대에 오명이 전해지는 죗값이 더 큰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법인데, 정몽주와 성삼문의 충의와 절개는 청사에 길이 빛나며 만대의 귀감이 되고 있지만, 이방원과 수양대군의 오명은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에 공분을 일으키며 인구(人口)에 안 좋게 오르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창생이 큰 죄를 지으면 천벌을 받고 작은 죄를 지은 자는 신벌 혹은 인벌을 받느니라.”(교법 1장 32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장사도 지내지 않고 시어머니를 버리고 도망하는 인륜을 패한 소부를 직접 벽력으로써 응징하시기도 하셨습니다.09 사람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양심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여야 합니다. 권력은 무상한 것이요 양심은 영원한 것입니다. 권력의 사심에 사로잡혀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는 다이아몬드를 새총 알로 사용하여 참새를 잡으려다 보석을 잃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의하고 주의할 일입니다.
우리 도인도 신뢰와 의리를 중심에 두지 않고 자리에 연연하여 작은 것을 얻으려다가 운수(運數)를 그르치는 우를 범하여서는 안 됩니다. 운수 도통은 자리나 직책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양심을 지키고 마음을 올바르게 닦는 데 있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도통은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리라.”(교운 1장 33절) 하셨고, 도전님께서 “도통은 선후의 차등이 없고 오로지 바르게 닦느냐의 여부에 있을 뿐이다.”10라고 하신 말씀은 모두 이를 두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포덕사업도 수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목적이 옳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모래(수단)로는 누각(목적)을 쌓을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모두 양심에 비추어 올발라야 합니다. 상제님께서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하고 덕을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교법 1장 29절) 하신 당부의 말씀을 우리 도인은 항상 명심불망하여 실천 수행하여야 합니다.
양심을 저버리고 사심에 사로잡혀 행하는 예법과 의리가 아닌 허영에 함부로 망동치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마음에는 정성, 몸에는 공경, 일에는 믿음을 생각하고, 성·경·신이 몸과 마음에 배게 하여 우리의 수도생활과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양심을 전 방위에서 구현하여야 하겠습니다.
《대순회보》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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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2008), p.207.
02 『대순지침』, p.45.
03 이규원, 『조선왕릉실록』(서울: 글로세움, 2012), p.71.
04 김경윤, 『한국철학의 이 한 마디』(서울: 청어람미디어, 2003), p.103.
05 지두환, 『단종대왕과 친인척』(서울: 역사문화, 2008), p.111.
06 유권재, 『옛시조 인물 요람』(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p.70.
07 교운 2장 57절 참조.
08 이호일, 『조선의 왕릉』(서울: 가람기획, 2003), p.120.
09 행록 3장 36절 참조.
10 『대순지침』, pp.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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