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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화고고통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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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7 조회3,4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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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종교문화연구소 선감 차선근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아마도 『전경』이 제시하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이런 듯하다: “대순진리회의 세계관에서 본다면, 고통의 원인은 우주의 상극 도수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혹은 국가⋅사회로부터 해를 입게 된다. 물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형벌로 고통을 겪을 수도 있으며, 심신(心身)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허욕(虛慾)에 빠진 탓에 스스로를 고통 상황에 몰아넣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상극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법질서(法秩序)나 의(義)를 구현하려다보니, 혹은 훈련이나 단련, 하늘로부터의 시험, 정성을 들이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상극 도수에 지배되는 자연 혹은 악독한 귀신이 주는 고통 역시 부지기수이다.”01

  하지만 구구절절한 이 답변은 현학적으로만 들릴 뿐,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그 이상의 실천적 의미를 제공해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우리에게 갑작스런 고통이 찾아온다면, 그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진다면, 『전경』에서 말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고통 원인들을 하나씩 되새겨보고 해결책을 머릿속에 그려본다는 게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에 대한 간단한 답을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우리 자신 또는 타인의 현실적인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즉각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 앞에서 해야 하는 한 가지의 일 : 참회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에서 주는 시험이라면, 바람이 불다가 그치기를[風亦吹而息]02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대개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수도인이라면 누구나 많은 경험들 속에서 절감할 터이지만, 이럴 때 원망만 한다거나 남을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려드는 행위는 고통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보다 더 길고 더 큰 고통을 불러들이고야 마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헤쳐 나가야 하는가? 다음의 『전경』구절은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김형렬이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 김중구(金重九)가 술이 만취되어 김형렬을 붙들고 혹독하게 능욕하는지라. 형렬이 심한 곤욕을 겪고 돌아와서 상제께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형렬에게 “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하시니 형렬이 명하신 대로 시행하였도다. 그 후 김중구는 한때 병으로 인해서 사경을 헤매었다고 하느니라. 이 소식을 형렬로부터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에게 충고하시기를 “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만일 허물이 네게 있을 때에는 그 허물이 다 풀릴 것이요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가 본처로 돌아가리라.”하셨도다.03

  

  고통에 직면하였을 때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 그것이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게 상제님의 가르치심이다. 자신의 잘못이 고통의 원인이었다면 그 고통은 참회로 인하여 제거될 것이요, 만약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타인의 잘못 때문이라면 참회로 인하여 즉시 그 독기가 고통 원인 제공자에게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따라 정해진 도수대로 후천개벽이 차차 열려나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국가 사회의 잘못된 구조적 질서나 억압 또는 법질서나 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는 경우조차도 그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단련이나 시험 및 정성을 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도 스스로의 부족을 송구히 여기는 마음을 견지한다면, 그 대범함과 정성심(精誠心)은 곧 신명의 감동으로 이어져 그 음호(陰護)를 받아낼 수 있게 할 것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참회! 사실상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또 해야만 하는 한 가지의 방법이다.

  고통에 대면하게 되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참회하라는 것은 수행을 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닦는 수행을 통해서 고통을 제거하라는 뜻이다. 혹자는 이러한 방법을 두고, 도에 대한 믿음이 돈독한 몇몇 엘리트들만을 위한 종교적 엘리티즘(elitism)일 뿐이며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금욕적인 수심(修心)보다는 직접적인 위안을 받거나 혹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묘책 혹은 특효약을 제공 받는 게 고통 제거와 극복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해야 하는 최우선적인 일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 이전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것은 잠깐의 비를 피하는 임시변통의 수에 지나지 않게 되며, 결국에는 또 다른 더 큰 고통이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덤벼들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돌려 막아질 수 있는 것도, 피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겪어야 할 고통은 결국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고통은 그냥 묵묵히 바보처럼 정면으로 돌파해 나갈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방법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참회하는 수도이다. 식상하게 들린다고 하더라도, 이것 외의 다른 해답이란, … 정말로 없다!

 

  

우리가 남의 고통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한 가지의 일 : 공감

 

  고통이라고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조심조심 살살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남을 대할 때이다. 타인의 고통을 잘못 대면한다면, 그건 바로 척을 짓고야 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잊지 말고 항상 염두에 넣어두어야 할 사실은, 고통은 주관적이므로 그 크기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란 게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크거나 작거나 한 것이 없고 그저 견디기 힘들고 괴로울 뿐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시도하는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역효과만 내기 십상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위로 받을 수 있는 고통이란 고통이 아니다. 이에 대한 무지는 언제 척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의 고통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흔히 하는 방법, 즉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툭 던지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다. 그건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혹함을 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럴 때는 그저 그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감싸 안으며 그들의 고통을 공감해주는 길이 최선이다. 

  심리학자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말이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이 없는 이성은 ‘이성’이 아니라 ‘냉정’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공감해주지는 않고서 그저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말을 ‘또박또박’ 일러주는 행위는, 고통을 겪는 사람을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가 듣고 실행하느냐를 염두에 두지 말고 바르게 일러주는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정(情)이 없다면 가까이 하지 말라(非人情不可近)’04는 가르침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로 진정어린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고통에 대한 공감이 토대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 자체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공감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자. 앞서 언급했지만, 고통의 원인은 다양하다. 이를테면 자신의 잘못 탓일 수도 있고, 상극에 지배 받는 선천의 현실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연 혹은 귀신 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우리 주변에는 고통의 원인이 당사자의 허물일 뿐이라고 미리 단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상제님께서 김형렬에게 주신 가르치심, 즉 자신의 허물을 먼저 반성하라는 고통 극복 방안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 본인이 본인에게 직접 적용하는 ‘자기 처방법’(Self-Treatment)인 것이지, 고통을 받는 타인을 대하는 방법이 결코 아니다! 이것을 오해한 나머지, 고통을 겪는 이유가 본인의 허물 탓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모든’ 고통은 ‘반드시’ 죄나 척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라고 예단해버리는 모습은, 고통이 신의 형벌이라고 확신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천시하기 바빴던 중세 기독교의 모습과 닮았다. 중세 시절, 기독교는 인간이 겪는 고통이 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고통을 겪는 사람은 곧 죄인이기 때문에 위로나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한 중세 기독교의 오만함이 서양에 암흑기를 가져다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케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선적 오해는 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낳을 뿐더러 겸허함을 잃고 스스로를 거만하게 만든다.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은 그가 지닌 허물 탓임이 ‘틀림없다’고 보는 행위는 고통을 겪는 사람을 천시하게 만들며 결국 척을 짓게 할 뿐이다. 만약 고통의 원인이 그 사람의 허물 때문이라면, 그들의 고통을 제거 또는 위로해주기 위해 노심초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허물을 벗을 때까지 충분히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두어야 옳다. 그러나 『전경』을 읽어보면, 상제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긍휼하게 살피셨으며, 죄과로 고통 받는 사람마저도 측은하게 여기시고 그 고통을 해결해주시고자 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상제님께 큰 죄를 짓고 벌 받아 죽은 장효순05과 정순검06에 대해서도 딱한 심정을 표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셨다! 도인들 역시 하느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도전님께서는 구호자선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을 포함하는 3대 중요사업을 지속적으로 규모 있게 펼침으로써 소외되고 고통을 겪는 불우이웃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하명하셨다.07 그 명에 따라 우리 종단은 오랫동안 물심양면으로 사회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최근에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더 체계적으로 구호하기 위해서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기까지 하여08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우리 주변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편견 같은 게 존재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고통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상대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넘겨짚고 뒷담화를 늘어놓음으로써 척을 만들기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같이 공감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통 속에 있는 상대가 있다면 공감의 입장에서 넉넉한 정(情)과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해원상생을 이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순회보》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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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차선근, 「대순진리회 고통론의 유형화와 특징」, 『대순사상논총』 25 (2015) 참조.

02 교법 2장 48절 참조.

03 교법 2장 28절.

04 교법 1장 59절; 교법 3장 47절.

05 행록 3장 13절 참조.

06 행록 4장 16절 참조.

07 『대순지침』, pp.97-104.

08 대순진리회 복지재단 홈페이지(http://www.dsswf.co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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