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오는 간닢을 잘 삭혀 넘겨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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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영자 작성일2018.02.18 조회5,227회 댓글0건본문
온천 방면 선감 신영자
입도 전
저는 경남에 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서 20세에 진양 강씨 장남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만 두었습니다. 시댁에는 예전부터 한 대에 걸쳐서 20세가 채 되지 않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시집올 당시 시댁에 7살 된 시누이가 있었는데 18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저에게 집안에 내려오는 좋지 않은 겁액을 말씀해 주셨고, 시할머니께서는 제가 아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면 옆에 앉으셔서 “어미 젖 많이 먹고 병치레하지 마라.”며 매일매일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산에 직장을 얻는 바람에 시댁에서 분가했습니다. 시댁에 살 때는 식구들도 많고 할머니께서 아기를 키워주시니 마음이 편안했는데 혼자 아기를 키우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편치 않고 안심(安心) 안신(安身)이 안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이웃 할머니께서 “절에 같이 가볼래?” 하시기에 30세부터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이 약하다
아들이 중학생이던 해 저는 식사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세수하러 나온 아들이 쓰러진 저를 보면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들은 울면서 “어머니가 죽었어요.”라며 소리쳤고 놀란 남편은 곧바로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병원 가는 차 안에서 정신이 돌아와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남편은 생각이 나지 않느냐면서 놀란 얼굴로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성품이 온화한 사람인데 그날은 저에게 자기 건강을 그렇게 모르고 있었냐며 화를 냈습니다.
주말부부가 되다보니 제가 아파도 남편은 잘 몰랐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검사하니 인공심장박동기를 달아야 하며 금액은 천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지금 박동기를 달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말하자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여보, 나는 안 죽어요. 집으로 갑시다.” 하고 남편을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 후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받고 약을 지어 먹어도 날마다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해서 약으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또 한 달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병원에 먼저 입원하고 퇴원할 때 돈을 계산하면 되지만 당시는 큰 수술을 앞두고 천만 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입원도 못 하던 때였습니다. 88년도에 천만 원은 큰돈이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운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적금 들은 돈이 오백만 원이어서 나머지 오백만 원을 빌리기 위해 시댁으로 갔습니다. 집에 있는 논을 팔아 오백만 원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니 시어머니께서 한마디로 거절하시기에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논을 팔아주셨을 건데….” 하며 울고 내려왔습니다. 시아버지는 남편이 34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수술을 못 하고 집에서 날마다 기절했다 일어났다 하니까 이번에는 저보다 한 살 아래인 저희 고모한테 “집사람을 살려야 하니까 오백만 원만 빌려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고모는 두말하지 않고 “강 서방, 사람을 살리고 보자.” 하면서 돈을 주었고 저는 그 길로 병원으로 가서 수술했습니다.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작은아들에게 닥친 일
작은아들은 고등학교 음악동아리에 들어가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문대에 다니던 저의 동생이 그 사실을 알고 “누나 종문이는 전교 1, 2등을 하는 아이인데 음악동아리 하면 안 됩니다.” 하면서 학교에 찾아가 아들을 동아리에서 그만두게 했습니다. 그러자 동아리 선배가 “너는 무슨 백으로 음악 활동을 안 하냐.”라며 얼마나 때렸던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 뒤로는 그렇게 잘 웃던 아이가 웃음도 잃고 전혀 다른 아이로 변해버렸습니다. 친구들하고 한번도 싸우지 않고 책만 보던 아이가 표정도 없고 말도 잃은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종문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이 학교에 가서 종문이를 때린 학생을 찾아서 보복하려고 했는데 머릿속에서 어머니가 참을 인(忍) 자를 책상 위에 붙여주신 것이 생각나서 참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큰아들에게 “화가 나면 꼭 참을 ‘인’ 자를 세 번 생각하면서 참아라.”라고 했던 것이 위험한 행동을 막은 것 같습니다. 성질이 급한 큰아들이 일을 저질렀으면 제가 살 수 있었겠습니까?
작은아들은 그 뒤로도 계속 학교에 가지 않고 날마다 집을 나가 밤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연락 없는 아들을 기다리며 괴로운 날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절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절 앞에 있는 은행나무에 학생이 책가방을 걸어놓고 없어졌다고 스님께서 연락하신 겁니다. 그곳은 거창의 ‘고견사’라는 절이었고 제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었습니다. 스님께서 학생증을 놓고 산신 기도를 올려보니 이 학생이 죽지는 않았다면서 보살님을 만나고 싶다며 연락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절에 갈 채비를 하고 나가려는 찰나, 친정에서 전화가 와 “종문이가 우리 집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친정에 가서 작은아들에게 “니 책가방 가지러 절에 가자.”고 따라나서라고 했습니다. 저와 함께 절에 가면서도 아들은 “공부 안 하고 죽는다”고 계속 중얼거리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절에 도착해 저는 법당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놈!” 하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보니 아들과 스님이 마당에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가 스님 곁으로 가니 스님께서는 “보살님 잘 오셨습니다.” 하시면서 저와 아들을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스님께서 “아들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하시기에 저는 “스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벌떡 일어나면서 어디론가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을 뒤따라가 보니 큰 냇물이 있는 바위에 올라가서 뛰어내릴 거라면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땐 정말 하늘이 노랗고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바위에 있던 아들이 내려와 겨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도 아들은 하룻밤 자고 또 나가버리기를 반복했지만, 남편한테 학교에서 맞았다는 말도 못하고 큰아들한테는 아버지께 비밀로 하라는 당부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뒤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아들을 때린 학생을 어떻게 처벌하시겠습니까? 어머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하시길래 “우리 아이가 운이 없어서 그러니 학생은 졸업을 잘하게 하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저에게 너무나 고맙다면서 몇 번을 인사하고 갔습니다.
일전에 시할머니로부터 ‘집안에 좋지 않은 겁액’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과연 제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시할머니께서는 참 지혜로운 분 같습니다. 40세 전에 혼자되시고 재산을 지키시면서 제가 시집을 갔을 때 당시 머슴에게 가을 세경을 한두 말을 더 주시고는 다른 머슴한테는 말하지 말라며 열심히 살라고 격려까지 하던 분이셨습니다. 일 년에 손수 옷도 두 벌씩 만들어 주고 하니까 한 번 우리 집에 머슴 살러 오는 사람들은 끝까지 안 나가고 일을 잘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마음으로 한번도 그 학생 집에 전화해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릅니다. 그 학생은 지금 사회인이 되어서 잘살고 있겠지요.
그리고 5대에 걸쳐 큰 아픔을 겪은 우리 집이 얼마나 겁액이 많은 집이겠습니까. 그 뒤로도 4년 동안 계속 좋다는 것은 다해 보았는데도 아들은 낫지 않고 헤매며 다녔습니다. 한 가지 너무나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밖으로 밤낮 모르고 다니는데 아무도 아들을 건드리지 않았고 아들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빵 한 개 훔쳐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파출소에 들어가서 “밥 사 먹게 돈 좀 주십시오.” 했고, 그러면 파출소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아들이 맞냐고 확인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저 대신 아들에게 돈 좀 주십시오.” 하고 은행에 가서 돈을 보내주곤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선각자에게 말을 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가기 위해서 버스에 승차하여 한 여성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어디선가 본 듯 낯설지 않아 제가 먼저 그 분에게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근처에 일이 있어 가는 길”이라며 눈웃음으로 화답해주었습니다. 따뜻한 눈인사가 더 정감있게 느껴져 “초면에 외람되지만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나요?”라고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제가 그런 말을 자주 들어요. 흔한 얼굴이라서 그런가봐요.”라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타실 때부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시던데 괜찮으세요?”라며 지금껏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고 숨겨왔던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혼잣말로 ‘내 마음이 얼굴에도 드러나나? 어떻게 내 마음을 알지?’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내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사실 집안에 애들 문제로 일이 있어 마음이 편치 않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첫인상도 낯설지 않았지만, 꼭 오랫동안 만나왔던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의 말에 그 분은 “이것도 인연인데, 정성을 들여보시지요. 생각이 있으시면 전화를 주세요”라며 쪽지를 건네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꿈에서 너무나 웅장한 기와집이 몇 채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파란 잔디 위에서 선녀들이 원을 돌면서 노랫가락을 부르는데 가까이 가보니 선녀 한 분이 방긋 웃으면서 저를 원 안으로 넣어주셨습니다. 평소에 한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꿈이라서 버스에서 만난 분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다시 만날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탁자 위에 선각의 연락처가 보였습니다. 속으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바로 전화를 하니 두 시까지 갈 테니 집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날 저는 입도치성을 모셨고 기도를 하라고 상을 가져다주시기에 기도도 모셨습니다. 방면의 내수 선감 두 분이 매일 저와 함께 기도를 모셔 주었습니다.
첫 참배를 가서 도장에 들어섰는데 순간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여기서 기도를 하면 우리 아들이 다시 전과 같이 좋아질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날마다 기도를 모시고 선각이 포덕하라고 하면 포덕하고 치성, 공부, 연수 모두 참여하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같이 작은아들은 많이 좋아졌는데, 제가 얼마나 겁액이 많은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도의 일을 못하게 됐습니다. 그때 내수 선감께서 백만 원을 주셨고, 저는 그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6개월 동안 성 모시는 데 썼습니다.
넘어오는 간닢을 잘 삭혀 넘기며
도심으로 포덕하고 아침마다 교화를 듣고 이제 겨우 도의 맛을 알 때, 선후각 사이에 마음이 안 맞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던 선무 다섯 사람이 도를 안 닦고 성도 안 모시다가 결국 만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도 방면에 안 나가고 있으니까 책임자 선감께서 집에 오셔서 “신 선무, 도를 꼭 닦아야 한다.” 하시며 교화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도심이 생겨 방면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때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저도 도를 안 했을지도 모르지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선후각의 겁액이 해소되어 서로가 고맙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존경하면서 도를 닦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무 임명을 모신 후 다시 집안에 어려움이 닥쳤고 남편이 도를 닦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1년 6개월간 방면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시 책임자인 외수선감께서는 항상 가정화목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으라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방면에 다시 나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도의 일을 하지 못한 기간에도 성을 안 모신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을 양위 상제님께서 보시고 덕화를 많이 베풀어 주신 것 같습니다. 다시 도에 나갔을 때는 680호이던 호수가 반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심이 있는 수반과 함께 열심히 수도하니까 뒷받침해주는 수반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성에 제사를 모시고 오는데, 눈에 미끄러져서 팔이 부러졌습니다. 성 모실 날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서 병원도 가지 않고 도심으로 다니니까 아픈 줄도 모르고 성을 모셨습니다. 성 모신 다음 날 병원에 가니 손이 너무 부어서 부기가 빠지면 수술하자고, 이런 아줌마는 처음 보겠다고 하며 의사 선생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런 의사 선생님의 말투가 귀에 거슬리면서도 도전님께 “살려주십시오”라는 심고를 드리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도 깁스 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붕대 하나만 감고 포덕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짓도 많이 했고 부족해서 잘못한 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상제님의 덕화가 정말 크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녔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수반이 잘 따라와 주어서 저는 1,300호에 선감 임명을 모셨습니다. 도에 입문한 후에는 한 달에 한 번 가는 병원을 가지 않아 식구들이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이 아무리 말을 해도 병원에 가지 않으니 작은아들이 분당제생병원에 예약을 해놓았다며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검사를 해보니 박동기 수명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12년 만에 박동기를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운이 좋으시네요” 하셨습니다.
저는 시료를 단 한번도 모신 적이 없지만, 도전님께서 기운을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19년 만에 간 병원에서 그런 진단을 받았으니 양위 상제님께서 얼마나 많은 덕화를 내려주신 덕분입니까. 저는 도전님 훈시를 모시지는 않았지만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날마다 심고 드립니다. 저에게는 90세가 다 되어 가는 시어머니가 계시는데, 남편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저는 정무 때부터 회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지요. 지금은 제가 도를 닦는 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협조해 주니,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 덕화를 많이 입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저의 사연을 “대순회보에 올려도 될까?”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수도 과정에서 잘한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많이 망설이고 있는데, 저의 사연을 아시는 양산방면 모 교감께서 용기를 주시기에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남편도 항상 “포덕 많이 하세요.” 하면서 제가 임원임명을 모시고부터는 말을 놓지 않습니다. 남편의 직위는 정무입니다. 그리고 우리 작은아들은 제가 입도하고 일 년 만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원까지 마쳤습니다. 아들은 도자기 작가가 되어 결혼도 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잘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덕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다만 마음 한편이 아픈 것은 저를 입도시킨 선각이 제가 선무였던 시절부터 도를 닦지 않는 것입니다. 운수마당에서 같이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각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저보다 더 훌륭한 교감 세 사람이 제 앞에 있습니다. 위의 선각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작은아들은 제가 농담 반 진담 반 웃으면서 “작가님, 이쁜 도자기 만들어 주세요.” 하면 제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아들은 《대순회보》를 매달 읽습니다. 아들이 그때 일을 생각하면 싫어할까 싶어 회보에 글을 내겠다는 의견을 물으니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아들 덕분에 도문(道門)에 들어오게 되어서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부족한 것도 많고 도에 잘한 것도 없는 제가 글을 쓴 것이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일에 뜻을 둔 자는 넘어오는 간닢을 잘 삭혀 넘겨야 하리라.”(교운 1장 3절)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살아가면서 내게 오는 어떠한 일들도 바른 마음으로 잘 넘긴다면 분명 하늘의 뜻을 알게 될 때가 올 거라고 믿습니다. 그와 동시에 더욱더 체계 질서를 잘 지키고 선후각들과 융화단결하면서 마음 변치 않고 도통을 받을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는 저의 마음을 이 글을 빌어 만수 도인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모든 분이 끝까지 잘 따라가셔서 도통 마당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대순회보 1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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