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겁액과 상제님의 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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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수미 작성일2018.05.21 조회5,144회 댓글0건본문
잠실37 방면 평도인 박수미
우리 가족은 보통 가정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가사와 교육을 담당하고, 어머니는 직장을 다녔습니다. 아버지도 처음부터 집안의 일만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평생 운동을 해 온 분이었는데 유별나게 저와 오빠, 저희 남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 고향은 경상도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선조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부모님은 경상도에서 태어나서 일하다 서로 만나서 저희 남매를 낳았습니다. 사실 제 고향은 경상도에서도 오지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했다고 합니다. 그런 좁고 외진 땅에서 아버지는 저희에게 학습지도 시키고, 과외 선생도 붙여주며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러다 한계를 느끼고 교육을 위해서 도시로 나가야 한다며 저와 오빠를 데리고 대구로 이사했습니다. 어머니는 지방 공무원이라 직장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교육에 열의가 있는 아버지가 자연스레 저희 남매를 데리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불같은 성격과 열정을 지닌 분입니다. 당신의 아버지, 즉 저의 할아버지에게 아들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복잡하고 가난한 가정사를 겪어 누구보다도 서럽게 인생을 살아온 분이기도 합니다. 그 서러움을 가슴에 품고선 내 자식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게끔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저희 남매의 교육에 아낌없이 돈과 정성과 열정을 쏟았습니다. 매질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마음이 이해되지만, 당시 어린 저희는 매일 매일 압박감과 언제 혼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그 압박감과 두려움은 오빠가 더했을 것입니다. 첫째라는 이유로, 아들이라는 이유로 맞기도 많이 맞았고 아버지와의 충돌도 더 잦았습니다.
오빠는 공부를 잘 했습니다. 중국의 명문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귀국해서 의사가 되겠다며 수능을 준비했습니다. 20살에 처음 한국의 수능을 보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 다음해 본 두 번째 수능에서는 서울 소재의 한의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은 양방 의학을 공부하겠다며 세 번째 수능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때 생겼습니다. 수능 후 학교별 면접을 앞두고 오빠가 정신적으로 발작을 일으킨 것입니다. 병원에 갔더니 ‘사회 불안증’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얘기를 들어보면, 그 증세가 매우 심했다고 합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충동적이며 공황 발작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때로는 길가로 뛰쳐나가 아무나 칼로 찔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답니다. 원인은 바로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부모님으로부터의 압박감과 체벌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이었습니다.
오빠는 아버지를 대할 때 특히 감정을 통제할 수 없어 증세가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증세가 매우 심해서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한동안 오빠와 아버지가 번갈아 가며 외부 숙박 시설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항상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오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라며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항상 오빠는 격분했습니다. 왜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데 이런 길을 걷게 했느냐며 말이죠.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라는 세 고래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고 우울감이 극도에 달했던 때 도를 만났습니다. 오빠의 병이 발발한 지 2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제가 입도하고도 이런 대립 상태가 3년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부모님과 오빠 모두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오빠를 병들게 했다는 자책감과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러움과 원망에 극도의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셋을 뒷바라지하고 아버지와 오빠에게 맞춰주느라 우울증의 증세가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우울감과 감정적으로 올라오는 마음이 많이 있었지만, 도를 닦고 있었기에 스스로 지탱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제가 그동안 가족들의 감정을 받아주는 분출구가 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수도를 해나가면서, 사실 저는 너무도 나약하고 감정적이어서 다른 도우들에 비해 많이 더디게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항상 도를 놓지는 않았습니다. 도를 닦아 나가는 것이 아무리 받아들이기가 힘들어도, 떨어질 것만 같아도 매번 지푸라기 같은 끈 하나를 쥐고 내려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제가 너무 나약하기에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도 안에서 남들처럼 많은 일을 해나가지는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써보려 하고 마음을 내서 해보려고 할 때마다 조금씩 집안의 겁액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를 서로 이해시키려고 해도 되지 않았던 것이, 각자의 철옹성에 갇혀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던 감정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같이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는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정말 겁액이 풀어졌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우울증에 걸렸다는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해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 당신이 마음에 병이 걸렸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담받기로 해서 치료를 받은 지 몇 주가 되었다고 운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상담을 받으면서 오빠와의 관계와 집안 상황, 당신의 감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담당의가 “그런 부분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나는 노력을 한 것이지만 아이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띵하더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너무나 가족들의 이해만 바라고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는 저와 오빠가 하고자 하는 바를 정말 순수하게 응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너무나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아무리 제가 아버지에게 설명하려고 애를 써도 받아들이지 않던 말이었는데, 그래서 이것이 겁액이구나 하고 저 스스로는 이해시키기를 포기했던 부분인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아버지의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이 모두가 제가 도문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부족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정성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도의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상제님의 덕화를 입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나서 아버지와 오빠가 같이 종합병원에 정신과 정기 검진을 갔는데, 오빠의 병이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5년 반 만에 얻은 결과입니다. 사실 정신과 질환이라는 것이 완치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이 또한 제가 상제님의 울타리 안에서 덕화를 입은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너무나도 나약하고 무능해서,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정말로 많은 일을 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도 덕화를 입게끔 해주시고 저희 집안의 겁액도 풀어주신 것이, 저 자신이 상제님과 인연이 있고 도문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느꼈습니다. 앞으로 제가 수도를 해나가는 길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제님의 덕화에 보은하기 위해서라도, 역경을 극복하고 상제님의 일을 받드는 수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대순회보 2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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