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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의 전환점이 되어준 기회, 요양보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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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주현 작성일2018.11.16 조회4,3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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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방면 평도인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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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있어도 등 뒤에서 땀이 줄줄 흐르던 2004년 무더운 여름날, 청계산에 물 뜨러 가셨던 시아버님이 병원에 계시다는 전화를 받고 무작정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어지럼증을 느껴 쓰러지셨는데 다행히 옆에서 등산하시던 분들의 도움으로 119 구급차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이 되어서 병실에 들어가 보니 아버님께서 눈을 뜨고 계시더군요. “아버님,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했더니 “규식이 어미지.” 하고 알아보셨습니다. “그럼, 올해가 몇 년도인지 아세요?” 했더니 우물쭈물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진단 결과 소뇌의 균형감각을 담당하는 부분에 뇌경색이 왔는데 숨골이라고 하는 위험한 부분에서 조금 비꼈다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하셔서 조금은 안심을 했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실 동안은 간호사들이 식사며, 배변 등을 도와주셔서 보호자가 할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뇌혈관 병동에 계실 때는 보호자의 손길이 전적으로 필요한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간병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감했습니다. 며느리니까 해야 되는데 생각은 해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 망설여졌습니다. 다행히 큰시누이가 해주신다고 해서 미안하면서도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아버님께 소변기를 대 드릴 때는 쑥스럽고 민망한 생각뿐이었습니다. 몸 상태가 점점 회복되고 걸을 수 있게 되는 데 3주가 채 안 걸렸습니다. 회복이 빨라서 금방 좋아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양쪽 부모님 모두 너무나 건강하시기에 쓰러지실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무방비 상태였다는 것을. 어떤 대비도 할 새 없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고 나서 한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그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은 몇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2008년 6월부터 여주본부도장에서 요양보호사 교육을 한다는 공지를 회관에서 전달받았을 때였으니까요. 지원 서류를 회관에 보내고 공문을 받아 1차 교육생으로 뽑히고 요양보호가 뭔지도 모르는 백지인 상태로 여주본부도장에 갔습니다. 

  결혼 후 남편과 떨어져서 생활해 본 적이 없는 제가 무슨 배짱으로 지원을 했는지 모르게 그냥 이끌리듯 교육을 받았습니다. 요양보호사 교육도 받고 도장 생활에 적응하느라 한 주 한 주가 정말 빠르게 지났고, 그동안 교육생들과의 친분도 두터워지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쉽다 느낄 정도로 친해졌습니다. 교육생들과 기도 모시러 본전 2층에 올라가서 상제님 용안을 뵐 때마다 눈물이 자꾸 쏟아지는 것을 참느라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왜 그럴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요양보호사 교육 중 지원 동기와 앞으로의 포부를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제 순서가 되자 “우리 부모님은 도인이고 항상 바쁘셔서 어릴 적에 같이 놀러간다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까이 계신 이곳에 복지관이 생기면 일도 하고 좀 더 가까이서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지원을 했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갑자기 위경련이 나서 침대에 누워야 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잠시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친정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부산 감천동의 태극도장에서 수도하셨는데 도전님께서 서울 중곡동으로 가셨을 때 아예 충남 서산에 있던 식구들을 전부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때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집 한쪽 벽에는 훈회와 수칙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정도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거의 날마다 훈회와 수칙을 반복하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담임선생님께서 “각자 가훈을 적어오세요.” 하고 숙제를 내 주신 적이 있었는데 저는 고민 끝에 훈회를 다 적어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 한 명씩 읽어보라 시키셨고 저도 적어 간대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선생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고, 저도 ‘우리 집은 가훈을 훈회라고 쓰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커서는 엄마 심부름으로 중곡도장에 갈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도장에 계실 때가 많았고 아버지도 뵈려면 도장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도장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냥 심부름 가는 곳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친구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하곤 다르게 출퇴근이 일정하고 월급이란 걸 어머니께 갖다 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렇게 생활하는 가족들이 부럽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고, 저나 동생이 돈이 필요해서 “아버지 뭐 사게 돈 좀 주세요.” 하면 아버지께서는 “난 돈 버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말 한마디밖에 안 하셨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아버지의 직업을 적는 란에 뭐라고 쓸지 고민을 안 한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3 때 담임선생님께서 아버지 직업을 물으실 때 “대순진리회에 계십니다.” 했더니 “거기서 뭐 하시냐?”고 그래서 제가 제대로 대답을 못 했더니 선생님께서 “먹고 살려고 종교활동 하는 거지 그냥 하겠어.” 그러시면서 가보라 했을 때 속으로 ‘우리 아버지 돈 버는 사람 아닌데’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꾹 밀어 넣었습니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분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저는 결혼은 도인이 아닌 사람과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제 포덕 1호입니다. 결혼 당시 시댁에 우리 집은 대순진리회 도인이라고 얘기했고 시댁에서 괜찮다고 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뿌리는 대순진리회이고 그것을 부정하면 제 인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결혼한 지 20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던 때에 시아버님의 병환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끌려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8월 1일에 교육이 끝나고 한참을 쉬었다가 12월 중순쯤에 분당에 있는 요양원을 소개 받아 다니게 되었는데 원장님이 도인이었습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지금 복지관에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하며 일주일만 버텨 보자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직업으로 하는 요양보호사 일은 실습 때하고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실습 때는 그렇게 힘들었던 기저귀 가는 일도 어렵지 않았고 변을 치우고 바로 식사 식간이어도 밥이 입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어르신들은 두 개 방에 여덟 분이 계셨는데, 초기 치매거나 어느 정도 인지가 있으신 분들이었습니다. K어르신은 귀가 어두워서 잘 듣지는 못하지만 욕을 혼잣말로 중얼중얼하시는데 맞은편에 계신 어르신이 듣는 걸 뻔히 아시면서 큰 소리로 “00년 잘도 처 먹네” 그러면 앞에 계신 어르신이 “뭐라고, 나한테 한 얘기야?” 하고 싸움이 시작되고 제가 가서 말리면 절대로 욕 안 했다고 우기시곤 하셨습니다. J어르신은 잠도 안 주무시고 밤새 소지품 정리하시면서 부스럭대고, 그 소리에 한숨도 못 잤다고 요양보호사들한테 불만을 토로하시는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두 방이 한 화장실을 쓰는데 안에 다른 분이 계시면 기다려야 하니까 아침이 오기 전에 먼저 씻는다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샤워하시는 B어르신, 기저귀 갈아 드린지 5분도 안돼서 오줌 쌌다고 축축하다고 갈아 달라고 해서 하루에도 기저귀를 30개씩 소비하시는 C어르신, 보호자가 면회 와서 물 많이 드시는 게 건강에 좋다고 얘기하고 간 이후로 하루에 500ml컵으로 8잔을 넘게 드시는 D어르신 등등…. 새로 오시는 어르신마다 얼마나 다양한 양상을 보이시는지 그때마다 새로운 케어 방법을 연구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일주일만 버텨 보자 했던 것이 7개월 이상이 되고 복지관 채용 공고가 나서 서류를 제출해 면접을 보고 합격 문자를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드디어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하고, 복지관에 짐을 싸들고 도착했을 때 다른 요양원하고 비교가 안 될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에 일단 압도당했습니다. 한달여 동안 대대적인 청소 작업과 손님 맞이 준비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개관식이 무사히 끝나고 재가노인복지센터에 주간보호시설 첫 이용 어르신이 들어오셨습니다. 요양시설은 지역에 상관없이 오실 수 있지만 주간보호센터는 강천면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에 있어서 주간보호센터의 역할이 큰 작용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은 한방진료와 협력으로 무료 침 봉사활동을 같이 하고, 그 결과 주민들의 호응이 좋아지고 대순진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무언의 눈빛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주간보호센터 이용자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간보호센터의 하루는 오전 8시 30분에 송영서비스가 시작입니다. 차로 어르신 댁에 가서 안전하게 모시고 와 따뜻한 차 대접으로 찬 기운을 없애고, 10시에 건강 체조를 시작합니다. 어르신들이 하실 수 있는 만큼만 무리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체조가 끝나면 물리치료나 한방진료의 스케줄이 잡힌 대로 이동하여 서비스를 받습니다. 12시 전후로 제공되는 점심식사는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당뇨가 있으신 분은 거기에 맞는 식단으로, 죽을 드시는 분은 죽을, 일반식 등을 구분하여 맞춤형 개별 케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오전, 오후로 나눠 진행되고 있으며 시청각·미술·노래교실, 레크리에이션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후 4시 30분부터 어르신들을 댁으로 모셔다 드리는 송영서비스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합니다. 

  그 외에 목욕서비스, 건강검진, 치매관리 등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 즐거운 하루를 보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 이상 모여 아이디어 회의와 케이스 스터디로 어르신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이곳 주간보호센터 직원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대순진리회 복지재단이 개관한 지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도 있고 채워나가야 할 것도 많지만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그 어떤 요양원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 많은 이용자들이 이곳을 거쳐 가고 여러 사람들이 이곳을 동양 최대의 요양시설 그 이상의 훌륭한 요양센터로 알게 되게끔 일조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대순회보> 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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