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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소자(道門小子)로 다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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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복 작성일2017.02.16 조회3,6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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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 9방면 선무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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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2년 12월 23일 녹명지를 올리고 도문소자가 되어 지금까지 수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도문(道門)에 들어설 때에는 수많은 공력을 들인 조상 선령신들이 자손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어 도에 인연이 닿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였나 봅니다. 앞으로는 좀 나아질 거란 소리를 듣고 싶어 무당집을 찾아가면 “조상 바람이 분다.”, “칠성줄이 뻗쳤다.”, “중이 될 사주다.”, “하늘의 공부를 하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좋은 소리는 하나도 없고 맥 빠지는 소리만 하던 이유를 입도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도와 인연이 닿게 된 해에 저는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남편과 살아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마음속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이라고는 전세금 천삼백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천만 원은 친정어머니께서 어렵게 평생을 벌어 모은 돈의 반을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에게 미리 상속해 주신 것입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려면 방 하나 얻을 돈은 있어야 되겠다 싶어, 남편 명의로 아파트에 입주하기 전에 이혼재판을 하려고 법률사무소와 읍사무소 등에 이혼서류를 작성하러 다녔습니다.

 

 

남편은 현대의학 용어로 알콜 중독자이고 무속인의 말을 빌리자면 객사한 주신(酒神)이 붙어서 끌고 다니며 술을 먹인다고 합니다. 굿을 하면 괜찮아진다기에 친정어머니 돈으로 이백만 원을 들여 굿을 하였고 신주단지를 모시라고 해서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안 되어서 절에 찾아가 백일기도와 천도제도 지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시댁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을 써보자며 영천에 있는 마약 알콜 치료센터에 남편을 몇 달 동안 강제입원도 시켜보았으나 그의 성질만 돋궈 놓을 뿐이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보고 자랄 지 참으로 염려스러웠습니다. 걱정만 하다가 후회하지 말고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현명한 처신을 해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일은 서류를 접수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생각이 나의 결심을 흩트려 놓았습니다. 혼자 남겨진 남편이 술만 먹다가 죽는다면 내가 남편을 사지로 내몬 꼴이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오로지 남편과 살겠다는 한마음이었을 때는 어머니께서 그처럼 반대하셨지만 쉽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마음일 때에는 장애물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이 정해지기 전에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던 것을 볼 때, 도에 대한 일심(一心)이 운수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때 결정의 실마리를 얻고자 또 무속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무속인은 올해가 부부 사이에 이별수가 들었고 한 고비라고 했습니다. 물 조심하라고 해서 밖에는 절대로 안 내보내고 방에만 있도록 시켰는데 ‘죽을 사람은 결국 접시물에 코 빠져 죽는다’라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사람마다 제 운이라는 게 있고 억지로는 되지 않는 법이니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정대로 아파트에 입주를 했고 입주 후 한 달 뒤 입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화(禍)가 먼저 이르고 복(福)이 온다는 말씀이 딱 맞았습니다. 이제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이를 복으로 생각하고 잘 받아 넘기려고 노력합니다.

 

 

도문에 들어와서 ‘나 자신을 이기는 극기(克己)는 강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씀을 종종 듣곤 합니다. 돌이켜보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제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때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첫째인 동욱이를 낳아 기르던 3년 동안이었습니다. 방 하나에 수도시설이 되어있지 않은 재래식 부뚜막이 놓인 부엌 하나 그때 돈으로 월세 40만 원 하던 방값에 장롱과 텔레비전 그리고 세탁기, 이것이 신혼살림의 전부였습니다. 남편은 일은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러 다니니 주머니 속 동전 한 닢이 너무나 귀한 형편이었습니다. 라면 하나 끓이면 둘이서 한 끼니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먹을 때는 둘이서 머리 맞대고 먹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가 으르렁거렸습니다. 내 인생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고 고생만 시키는 주제에 무얼 잘했다고 큰소리 치냐며 지기 싫어 한마디 하면 감정 조절이 안 되는 남편이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퍼붓는 바람에 치고 박는 육탄전까지 벌어졌습니다.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이 세어서 끝까지 해보자고 달려들면 실컷 얻어터지고 난 뒤 항복을 받아내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만, 한 3년을 실컷 싸우고 나니 나도 모르게 안 싸우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고집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극기훈련의 단계였습니다. 3년이 지나고 23살부터 31살까지 술꾼의 아내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한 달 벌어 한 달 생활해 나기기에 급급했지만 동욱이를 입히고 먹이는 재미에 그럭저럭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서른하나에 앞서 언급했던 한 번의 고비를 더 넘기고 난 뒤 도문소자가 되고 난 뒤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입도치성을 올리고 남편이 하얀 소 다섯 마리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기도 하고, 선사께서 치성 때 신랑 이름으로 돼지 한 마리를 상제님 전에 올려보라고 말씀하시고 가신 뒤, 남편 꿈에 장모가 돼지 한 마리를 새끼줄에 묶어 끌고 와서는 “자네가 이 돼지를 잡아먹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니 주머니에서 돼지 한 마리 값이 나왔고 남편 이름으로 그것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40평생을 앉은뱅이로 사시던 아버지께서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허리뼈가 신경을 누른다며 걷지를 못하셨습니다. 경대병원에서 수술을 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입도치성을 모시자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03년 6월 24일, 우리도가 신도(神道)임을 깨닫고 상제님이 우주의 주인이심을 의심치 않았을 때, “칠산(七山)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도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그물에 잡히며 농사도 또한 그와 같이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맺느니라. 굶어죽는 일은 없느니라.”이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일꾼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죽을 먹을 때 같이 먹고 함께 고생하며 운수마당까지 두 손을 꼭 잡고 가자며 용기를 주셨고, 지금까지 거두어 입히고 보살펴 주신 선각이 계셨기에 지금의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12월 6일 선무 임명을 모시고 큰 어려움 없이 방면 사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고생이 복(福)이라는 말을 이해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제 자신을 채찍질하며 수도해 나가겠습니다. 일꾼 된 자로 설 수 있는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대순회보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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