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방면 유영예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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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19 조회2,796회 댓글0건본문
음력 4월 본부성 오전, 여주본부도장으로 오신 유영예 보정과 종무원 2층 응접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대화를 나누면서 뒤늦게 이 분이 내수로써 처음으로 도주님의 시봉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태극도의 여러 시봉 중에 유일하게 도전님을 따라 올라오셨다고 한다. 도주님의 시봉으로서 겪은 일화와 도전님의 덕화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 볼까 한다. 유영예 보정은 음력 1938년 생으로 음력 1951년 5월 15일에 입도하여 음력 1988년 5월 22일에 보정임명을 모셨다.
어린 나이에 입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9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입도를 했습니다. 너무 어린나이에 입도해서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밤 1시 기도를 모시기 위해 법수준비를 한 것은 분명히 기억이 납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기도를 모시기 위해 저 혼자를 한겨울 엄동설한에 물을 떠오게 하셨습니다.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떠올려 두 손으로 들고 집에 돌아오면 팔은 피부가 갈라져서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참고 견디면서 기도를 모셨습니다. 몇 년 뒤 부모님께서는 도를 좀 더 적극적으로 닦아야 한다면서 제가 13살 되던 해에 부산 보수동 판자집(당시 태극도 도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부모님의 소개로 어떤 아저씨(남자시봉)를 만났는데, 집에도 가지 않고 보수동 도장으로 바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어떤 할아버지한테 데려다 주시는 거예요. 나중에 이분이 바로 옥황상제님이란 것을 알았지요. 그 당시에는 조정산님이라고 호칭을 하였답니다.
그렇다면 시봉 당시에 도주님은 어떠한 분이셨나요?
제가 곁에서 본 도주님께서는 실제로『전경』에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을 남달리 하셨도다.’(교운 2장 3절)하신 것과 같이 성품도 바르시고 강직하셨습니다. 지금 여주본부도장 영대의 진영에서 보는 것과 똑같으셨어요.
제가 충청도에서 살았기 때문에 도주님께서 경상도 방언으로 말씀을 하실 때 처음엔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도주님의 말씀은 ‘우웅 우웅’하는 소리로 울려 퍼졌습니더. 비유하자면 항아리에 머리를 넣고 말을 하면 울리듯이 우렁차셨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도주님 말씀을 모시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철없이 행동하는 저에게 항상 인자하시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챙겨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도주님을 모시면서 어려움이 없으셨습니까?
어린 나이에 겪었던 도장생활은 너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해와 달을 보면서 충청도로 보내달라고 철없이 하소연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그 모습을 도주님께서 보시고는 애처로우신 듯이 저를 걱정해주시고 편안하게 대해 주셨어요.
한번은 도주님께서 감천으로 도장을 옮기시려고 할 때, 제가 고향으로 가고 싶은 생각에 무작정 보수도장을 나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도주님께서 아신 뒤 제가 꾸중을 많이 모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다정하실 때는 한없이 저를 관대하게 대하시다가도 엄하실 때는 추상(秋霜)과도 같으셨습니다.
그 후에 감천도장으로 가서 생활을 하다가 17살이 되어 분향을 계속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새로운 시봉들이 들어와서 교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부정을 엄청 가렸거든요. 저는 20살 될 때까지 도장을 다녔습니다.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기 1년 전, 도주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시집을 가라고 분부하셨어요. 그래서 충청도에 가서 아시는 분의 소개로 간소하게 혼인식을 올렸답니다. 그 당시에 30여 명의 시봉들 중에서는 저만 시집을 갔었거든요. 그래도 도주님께서 저를 불러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 때문인지 도주님 화천하신 이후에 다른 시봉들의 시기질투로 인하여 제가 음해를 받아서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답니다. 이러한 일로 제가 몸이 아프게 되어 도심이 조금 흔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도주님 화천(化天)하실 때의 상황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때 도주님께서는 도주님 가족과 시봉들은 밖에서 대기해 있게 하시고 임원들 전부를 부르셨습니다. 도주님 방에 몇몇 임원만 들어오시게 하고 문을 닫아 놓았었는데, 제가 곁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도주님께서 누워계시면서 도전님의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얹으셔서 귀속 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방에서 나와 조금 있다가 보니까 도주님께서 화천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정말로 그토록 허무할 때가 없었답니다.
화천하시기 전에 제가 밖에서 우렁찬 소리를 들었는데, 알아보니까 임원들이 나오시면서 저에게 귓속말로 이야기 해주셨는데, 『전경』교운 2장 66절의 말씀처럼 문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을 부르시던 내용이었어요.
도주님 말씀 중에 가장 기억이 나는 말씀이 있으십니까?
어느 날 도주님께서 저에게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따라와야 돼. 다른 불평하지 말고 날 따라와야 돼.”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몰랐습니다. 제가 중간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 때 계속 수도하게 된 것이 그때 그 말씀이 아닌가 싶어요. 정말 제 마음을 아시고 그러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고 도전님을 어떻게 뵙게 되었는지요?
태극도 당시에 난리가 나서 한동안 힘들어 할 때 어느 날 시댁 친척인 선무가 와서 도전님께서 중곡동에 도장을 지어서 대순진리회를 창건하셨으니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시동생 이사를 해주러 왔다가 혼자서 택시를 타고 중곡도장까지 갔었습니다.
도장입구에서 보니까 옛날 부산 감천에 계셨던 분들이 서 계셨습니다. 그 때 저에게 와서 유시봉이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왔냐면서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도전님께 제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하게 내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조금 뒤 도전님과 가족들이 나오셔서 매우 반갑게 맞이 해주셨습니다.
내정에 들어가서 인사를 올리자 도전님께서는 저와 같이 갈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영대로 가시더라구요. 상제님 진영 앞에서 직접 손수 분향하시고 촛불을 키셨습니다. 배례를 드리라고 하시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누가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어요. 태극도 당시 도전님께서 임원으로 계셨을 때 저하고 스스럼없이 지낸 것만 생각하고 영대에서 엎드려 염치없이 펑펑 울었어요. 실컷 울고 나니까 눈물이 장판에 그득했어요.
울음을 그치고 배례를 드린 뒤 보니 창문 옆에 도전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영대 밖에 있는 중곡동 주변 지형을 자상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때 도주님 생각이 더 나는 거예요.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다시 내정으로 간 뒤 도전님께서는 옛날 감천에서의 지난 이야기를 쭉 하시면서 제게 “고생 많이 하였다. 많이 보고 싶었고, 여기에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제가 감천에서 음해와 수모를 당한 것을 잘 아셨거든요.
내정에서 대접을 잘 받고 후문으로 나갔는데 그곳까지 배웅을 나오셨습니다. 도전님께서 부산방면 서대원 선감을 부르시더니 제가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서선감이 저를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도전님 앞에서 서선감은 저에게 도를 꼭 닦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손가락을 걸고 또 손도장까지 찍으면서 약속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도전님께서 보시고 웃음을 보이셨습니다. 도전님께서 그 자리에서 시봉들이 그렇게 많아도 옥황상제님 시봉은 저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런 일을 계기로 서선감 앞에서 수도를 계속하여 오늘날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도해오시면서 보람이 있으시다면 어떠한 것이 있으십니까?
제가 한때 너무 아팠는데, 누워 있을 때 어느 날 포덕사업을 하면 이 병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러한 마음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서 마음을 강하게 먹고 포덕사업을 하니까 병이 차츰 차츰 낫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몸이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이 보이면 남편은 빨리 회관이나 도장에 가라고 부추깁니다.
도장에 간다고 말하면 아무리 오래 있다가 와도 고생했다는 말 이외에는 별 다른 내색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 몸이 좀 아프면 남편이 기도를 모시자고 하는데 더 정성스럽게 모십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다 보니 포덕사업을 통해 열심히 수도를 해야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조금 깨달았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눈이 좋지 않을 때 도전님께서 시료를 받아 보라고 하셔서 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료를 본 뒤 비록 말할 수없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안경을 착용하지 않고는 못살았던 제가 안경도 벗고 몸도 가뿐해졌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쓰고 있지만 가까이 있는 것은 안경을 벗어도 깨알같이 작은 것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저의 남편도 시료를 보았는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어요. 그땐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수도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매사에 항상 일심을 가져야 되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한 발짝 양보하며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욕심을 버리고 수도를 해야 합니다. 저 역시도 욕심 많고 샘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수도를 하면서 스스로 양보하고 욕심도 버릴 수 있는 자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그렇게 행동을 해야만 도인들한테도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바라면 기대하는 마음이나 욕심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없으면 섭섭한 것도 자연히 없게 됩니다. 바라는 것 없이 상대에게 주려는 것이 남 잘되게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교법 1장 2절)는 말씀처럼 진심으로 남을 잘 되게 하는 마음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도인다운 처세가 된다고 봅니다. 도를 닦으면서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평가가 좋게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포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상제님의 진리를 알리는 포덕사업은 자신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행동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순회보》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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