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방면 성기석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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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6 조회2,751회 댓글0건본문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여주본부도장 교운부 차장으로 있는 성기석 보정과의 인터뷰를 갖게 되었다. 성보정은 태극도 때 입문하여 서울로 올라와서 중곡도장에서부터 10여 년간 도전님 운전기사를 했다. 이후에 도전님의 분부로 중곡동 교운부에 근무하다가 현재는 여주본부도장에서 도장차량과 기사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편안하고 다정한 말씀이 신선하게 다가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기석 보정은 1933년생으로 1962년 11월 18일에 입도하여 1997년 7월 6일에 보정 임명을 모셨다.
입도하신 계기와 수도해 오신 과정을 말씀해주세요.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충남 서산 해미읍성 부근입니다. 아마 해미비행장이라고 하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비행장으로 인해서 유년시절 동무들과 놀던 자취는 지금에 와서는 찾아볼 수도 없어요. 다만 아련한 추억만 가슴속에 담고 있답니다.
군복무 기간 중에 휴가를 받아 혼례를 치르고, 제대 후에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저녁에 아버지께서 손님과 함께 들어오시며, 다짜고짜 치성 드릴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치성이 뭔지도 모르는 저로서는 참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묵묵히 치성물을 준비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날 그렇게 입도치성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입도하고 얼마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아버지께서는 읍내에 방(房)씨 성을 가진 태극도 도인을 만나 도를 접하셨습니다. 더욱이 수덕사 처사(處事)로 살림을 맡아 보던 시절부터 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이 도를 만난 것을 새로운 희망의 불빛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손수 주문을 종이에 옮겨 쓰신 후에도 틈이 날 때마다 낭송을 하셨고, 또한 선각으로부터 진리 교화를 듣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당시에 150호 정도 포덕을 하셨습니다. 그땐 적은 호수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물론 저 또한 아버지 옆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또 진리 교화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수도에 한창이셨던 선친께서는 어느 날 갑작스레 부산에 내려가야 된다며 살던 집을 정리하셨어요. 그리고 선친 소유의 산에 집을 지어 가족들을 거처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선친을 따라가려고 집에서 나왔다가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뭐라도 하기 위해 해미읍에 선친의 첫 수반인 김기찬씨 당숙 집에서 몇 달 있었어요. 그러다가 태안으로 가서 화물영업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영업이 그럭저럭 되다가 나중에 67년도부터 잘 되지 않아서 일을 그만두고 68년도에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도전님의 운전기사를 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말씀해 주세요.
태안에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 성(誠)을 모시러 서울에 갔습니다. 그때마다 선친께서는 수도에 좀 더 매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결심을 한 뒤 다 정리하고 서울에 오게 됐습니다. 막상 서울에 올라와 보니 할 일이 없어서 한 해 동안은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70년도 1월에 처사촌의 소개로 동국대학교에 취직이 되어 73년까지 대학교 이사장 승용차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도 계속하다보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아는 사람이 자금후원을 해준다며 택시사업을 권유했어요. 처음에 택시 4대를 구입하여 택시영업을 했는데, 가끔씩 지금의 이재근 선감(청주방면)을 만났습니다.
하루는 이재근 선감이 이야기 도중에 도전님께서 운전사를 구하신다고 말하면서 저에게 권유했습니다. 그때 저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아버지께 조언을 구하니까 운전기사를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도전님 운전기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때가 75년 봄이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짬을 내서 영업소를 보면서 도전님 운전기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75년 음력 5월 24일에 중곡도장 봉안치성을 모시고 나서부터는 전적으로 운전기사를 했습니다.
운전기사를 하는 동안 도전님께서 늘 편안하게 대해 주셔서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습니다. 항상 염려되는 것이 제 부주의로 사고를 낼까봐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한번은 얼마동안 운전을 못하고 몇 달 동안 대기한 적이 있었어요. 도전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본의 아니게 경미한 사고를 당했는데, 도전님께 사고경위를 말씀드리니까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사고는 사고라서 4개월 동안 대기를 했어요. 작은 사고라도 우습게 여기면 안 되거든요. 임원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일은 조그마한 일이라도 잘못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변고가 있다고요.
어느 날 도전님께서 임원들과 함께 설악산을 다녀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임원들은 25인승 버스를 빌려 갔었는데, 설악산을 둘러보시고 밤늦게 서울로 오는 길이었어요. 항상 도전님 차가 앞에 가시는데 무슨 연유이신지 조금 쉬었다가 가자고 하셨습니다. 한편 뒤따라오던 버스는 상황을 모르고 지나가더니 조금 가다가 갑자기 정지했어요.
그래서 뒤에 바짝 따라가 보니까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나가서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전님 모시던 차로 버스 뒤를 비춰준 덕분에 아무런 사고 없이 한쪽에 세웠어요. 차에서 내려 버스의 상태를 보니 배터리가 다 녹아내렸답니다. 그때 만약 앞에서 계속 운전해서 갔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죠. 그때는 도로가 좁은 국도였고 아주 위험했는데, 도전님께서 이를 다 아시고 미리 예방을 하신 것 같았어요.
1986년도가 되어 여주본부도장 공사를 할 때 도전님께서 봉강전 아래 지금의 내정자리에 가셔서 저와 다른 임원에게 줄자로 재고 말뚝을 세우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비탈진 산을 줄자로 잴 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내정이 들어서고 보니까 정말 훌륭한 환경으로 변모했답니다. 그때는 중곡도장에서 매일 새벽 5시가 되면 여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도전님께서 하루는 제가 나이도 많이 들어서 운전보다 힘이 덜 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중곡동 교운부에 있으면서 차와 기사관리를 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이때 교운부 부장은 공석으로 하고 저에게 차장이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운전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십니까?
도전님께서 수리사(군포시 속달동 소재)에서 일을 보시고 아침에 나오셨는데, 이때 다가오는 치성이 12월 초나흘 날이어서 수산시장에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치성에 올릴 어물을 직접 사셨거든요. 한겨울이라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내려가는 길이 엄청 비탈이 져서 얼마나 미끄럽던지 겁을 많이 먹고도 무사히 내려갔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도전님께서는 일절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보통 차에 타시면 목적지까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계셨습니다. 몇 시간을 가도 그대로 계시지 안 움직이셨어요.
운전하면서 언제든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졸음이 올 때에는 살을 꼬집어 보아도 아프기만 하고 소용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도전님께서 시봉을 시켜서 음료수를 챙겨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한번은 1984년도에 성궤(聖櫃)를 오랫동안 모신 구씨라는 사람이 논산 연무대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구씨가 성궤를 어떤 연유로 가져와서 모시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1년에 한 번씩 치성을 올렸답니다. 그런데 구씨의 딸을 통해서 대순진리회에 성궤를 인계하기로 하여 도전님께서 날을 잡고 임원들이 함께 성궤를 모시러 가게 되었답니다.
그 집에 가보니 초가지붕에 비가 전부 새서 마루와 부엌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궤를 모신 방 하나만 새지 않고 있는 거에요. 도전님께서 그 방에 들어가셨는데, 구씨가 잔을 올릴 형편이 못 되고 그냥 인사만 드린다고 하면서 4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열쇠를 건네주더니 한 임원이 받아서 열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같이 갔던 여러 임원이 시도해보았지만 절대 열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도전님께서 열쇠를 받으셔서 여시니까 단번에 열리더라고요. 역시 주인을 알아보고 응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궤 문을 열고 안을 보았는데, 『전경』(교운 2장 20절)에서 보듯 호피 한 장은 수를 놓아 선명하게 찍혀있었고, 국화는 문을 열면 보이게 붓으로 그려져있었고, 오강록이란 한문이 쓰여 있었습니다. 성궤를 방안에서 마루로 꺼내어 대충 먼지를 털고 도전님 차에 실었습니다.
이렇게 출발하여 연무대를 지나던 중 도전님께서 죽암 휴게소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때가 오후 1시쯤 되었는데, 도전님께서 오후 4시까지는 들어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점심을 시켜놓고 얼마 먹을 사이도 없이 어디선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휴게소 앞의 파라솔이 다 날아가고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도전님께서 서둘러 가야된다고 하셔서 곧바로 출발했습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는데, 뇌성벽력이 우렁차게 치고 고속도로에는 빗물이 차가 떠밀릴 정도로 철철 넘쳐 많이 당황했습니다.
얼마나 뇌성벽력이 세게 치던지 차 밑바닥까지 “철커덩”할 정도로 울렸답니다. 정말 정신이 아찔했었어요. 그래도 도전님께서는 빨리 가자고 하셨는데 뒤에 오는 차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계속 오는데 수원쯤 오니까 비가 그쳤어요. 수원에는 비가 오지 않아 바닥이 뽀얗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곡도장에 오니까 오후 4시 3분이 되었습니다.
도전님께서 해방 후 귀국하실 당시 겪은 일화를 들려주십시오.
그 일은 도전님께서 직접 이야기해주셔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 가끔 말씀하셨는데, 집안형편이 어려울 때 동생에게 일본으로부터 강제징용이 나왔는데, 동생에게는 가사를 맡겨 농사를 짓게 하시고 대신에 도전님께서 징용을 가셨답니다.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징용을 갔던 사람들이 귀국할 때, 도전님께서는 아오모리(靑森, Aomori)로 나오셨답니다. 이때 일본에서 징용자 모두를 몰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배를 운항시켰답니다. 도전님께서는 배안에 계시다가 답답해서 갑판으로 올라오셨는데, 배가 기우뚱하면서 가라앉아 돛대를 잡고 계셨답니다. 배가 자꾸 침몰해 돛대마저 내려가서 바다 위에 딱딱한 물건(바다거북이라는 일설이 있음)을 타고 표류하시다가 지나가던 우리나라 배에 구조되어 부산까지 오셨답니다. 그 배를 타시고 충북 괴산 병방골 댁까지 오시는데 무려 보름이나 걸리셨답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 천지신명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나중에 제가 1945년 8월 26일자 신문을 봤는데,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했답니다.
도전님 모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제 기억으로는 도전님께서 “도를 믿다가 죽어도 마음만 변함이 없으면 다름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충주의 어떤 내수가 있었답니다. 시집살이가 어려워 기도를 모실 수가 없어 부엌에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모셨는데, 어느 날 뜻밖에도 그 내수가 명을 달리했답니다. 도전님께서 부산 감천도장에서 공부를 돌리셨는데, 그 내수가 죽어서도 공부를 들어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공부하고 수도하는 것은 죽으나 사나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하시면서 살아서는 인간의 정(情)에 얽혀서 제대로 못하지만, 죽어서는 자식이 옆에 와도 자기 갈 길을 간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일심수도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시고, 살아서는 포덕하고 범위를 넓힐 수는 있어도 일심수도는 죽어서 영(靈)으로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마음만 변치 않으면 수도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운수를 받는 것은 죽으나 사나 도심을 갖고 상제님 모시는 성·경·신만 변함이 없으면 같다고 하셨어요. 도전님 댁에서 가족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두 들으라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수도해 오시면서 보람을 느낀 점과 수도하는 사람에게 당부 말씀을 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참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도전님께서 10여 년 동안 기사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사실은 잊을 수가 없고 보람을 느끼는 거에요. 오늘날 이 자리까지 온 것도 모두가 도전님 덕화로 살펴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부족한 저를 믿으시고 써주신 것에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도인들은 자기의 온 정성으로 최선을 다해야지 마음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생각하면 변고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심을 다해서 수도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죄가 없어도 있는 듯이 잠시라도 방심말고 조심하라.”(교법 1장 36절)고 하신 것처럼 매사에 자기 정성을 다하고 항상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순회보》 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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