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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방면 전희숙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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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6 조회2,7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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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영월 전희숙 선감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약속 장소인 종무원 2층에서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다 하시지만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해주시려는 노력 덕분에 인터뷰가 수월했다. 

전희숙 선감은 1948년생으로 (음)1966년 2월 15일에 입도해, 1987년 5월 24일 교감 임명을, 1990년 10월 28일 선감 임명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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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는 어떤 계기로 하셨습니까?


저는 11살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천주교를 믿었습니다. 당시 천주교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고 그 부분에 대해 무척 감사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도 성당에 다니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엿장수 한 사람이 오게 되었고 그분이 점심을 못 드셨다고 하자 어머니께서 점심을 차려드렸습니다. 사랑방에서 아버지가 같이 계시면서 그분께 얘기를 들으시더니 날을 잡으셨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엿장수가 포덕을 다니던 포령(현재 선무에 해당하는 직위)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구들이 밤늦게 저만 빼놓고 사랑방에서 뭔가를 하더라구요. 동생 말로는 절을 많이 했다는데 그렇게 아버지께서 먼저 알아보시고 몇 달 후에 저한테 입도치성부터 하라고 시키신 겁니다.

당시 제가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에 절할 수 없다며 입도를 거부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치성 상을 차려놓았으니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절하라고 하셨습니다. 차마 아버지 체면을 떨어뜨릴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치성을 모셨습니다. 그 뒤로 기도 모시고 도담 듣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부모자식 인연을 끊자고 하시는데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또 당시 아버지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집안 분위기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 입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동화되어갔습니다.

 


당시 수도가 현재와 다른 점이 있습니까?


당시 도의 행사는 밤에 했습니다. 제가 입도를 충북 영동군 황간면 구교동에서 했습니다. 시골이어서 낮에는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 그랬는지 도담(道談)도 밤에만 했고 입도치성도 밤에만 했습니다.

그때는 『전경』이 없었던 때라 당시 임원들이 가지고 다니던 『대순 전경』에서 읽어주는 몇 구절이 전부였습니다. 책이 없었기에 등사해서 몇 구절씩 전달해 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그 인쇄물도 귀했습니다. 주문도 직접 써서 배웠습니다. 입도하고 제가 주문도 안 외우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시험 날을 정하시는 바람에 그 시험에 통과하려고 하다 보니 주문도 겨우 외웠습니다.

그때는 기도상도 정해진 규격이 없어서 각자가 알아서 만들었습니다. 1980년(경신년) 도전님께서 제반 사항을 정하셨습니다. 그때 정해주신 규격이 가로×세로×높이가 15×10×9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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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부산 감천 도장에 1966년 12월 4일 치성에 참석을 하고는 68년 3월 3일에 감천으로 이사했습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지방에서 포덕을 다니셨는데 농토와 집이 팔리지 않아 다른 식구들은 얼른 부산으로 오시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도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빨리 부산에 가고자 하는 마음에 동생 셋을 데리고 먼저 부산으로 이사했습니다.

부산에서 치성 참석 몇 번 하고 시학·시법, 법학 공부를 한 번 했습니다. 그때는 부정을 많이 가리는 때였습니다. 우선 내수들 몸 부정[身不淨]이라고 생리기간 중에는 모든 도의 행사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뿐 아니라 성도 못 모셨죠. 또 죽음 부정[死不淨]이라고 초상을 치르는 3일간에도 그랬습니다. 초상집에 다녀만 와도 3일간 도의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지요. 혹 모르고 초상집에 갔더라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산 부정[生不淨]은 아이를 낳으면 21일간 가렸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집에 없어도 부정으로 가렸습니다. 그 기간에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모르고 갔어도 그만큼 기간을 부정으로 가렸습니다. 참 조심스러운 시기였습니다. 1년에 꼭 한 번씩 그 공부 반에 그 사람이 들어갔습니다. 공부 자리 바뀌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부정이 생길 때만 바꾸어 들어갔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어떤 부정이라도 생기면 즉각 시학원에게 알려서 바로 교체를 해야 하니까 도인들이 도장 주변에 모여 살았습니다. 감천2동 105번지에는 3천이 넘는 세대가 한 집도 외부인 없이 모두 도인이었습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인데도 감천은 통행금지가 없었습니다. 밤에도 낮과 같이 환하게 가로등을 밝혀 놓아 공부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다녔습니다. 전국에 통행금지가 있어도 그곳은 없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도전님께서 서울 오셔서 단계적으로 부정을 풀어주셨습니다.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우선 내수들 몸 부정부터 풀어주신 다음 산 부정을 풀어주셨습니다, 죽음부정은 시학공부 시작할 때 90년에 풀어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도장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전에는 도장에 아기를 데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아기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도장에 와서 수호를 서지 않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수호를 위해 미리 풀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로 오셔서는 어땠습니까? 그 당시 수도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습니까?


서울에 와서 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희가 서울로 올라오자 중곡도장 터를 사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당시 도전님을 따르던 도인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수반일 때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서울에 와서 첫 성을 모실 때 천 이백 호 정도를 모셨다고 들었습니다. 

지방에는 도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인들이 다 떨어지고 사회적으로도 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후 10년 동안은 포덕이 거의 안 되다 시피했습니다. 그럴 때 중곡도장을 지었으니…, 정말 상제님 뜻이니까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내수라 현장 일은 안했지만 현장에 가서 보면 “신명을 모시는 곳이라 발파 작업은 안 된다.” 하셔서 일일이 곡괭이로 팠습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각자 나름대로 된장 조금, 고추장 조금 가져와서 정성을 보였습니다. 우리 방면에 허교감이라고, 그나마 좀 살던 사람이라 집에 있는 정원수도 가져오고 그랬습니다.

포덕도 안 되고 도장 건설에 돈도 필요하고 하니 물질적으로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수도를 해오는 도중에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마음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천주교에서 도에 올 때 마음 바꾸기가 어려워 갈등한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 닦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흔들리기도 하는데 저는 당연히 ‘올 것이 왔구나, 복마가 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일체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고생을 사서 한 거죠. 내일 나의 개인 걱정은 안 하고 오늘 도의 일에 충실한 것으로 만족했으니 인생이 온통 도였죠. 

그러다 84년에 대순진리회가 ‘추적 60분’에 방송되면서부터 포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방송 며칠 전부터 예고가 나오면서 과거 도와 관계된 사람들이 서로 연락해서 보게 된 거죠. 그런데 방송을 잘 분석해보면 저희한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석구석 선전만 잘 되었습니다. 정말 포덕이 잘 안 되다가 그 방송이 나가고 활성화되었습니다.

 


영월은 가족 전체가 수도하는 방면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어떤 비결이 있을까요?


저희는 태극도부터 온 방면치고는 포덕이 너무 적어서 정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가화도 많이 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전에 도전님께서 말씀하시길 “있는 도인을 키우면 포덕은 재기중(在其中)이다.”라고 하셨는데 있는 사람을 잘 키우면 그 사람이 포덕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재주가 없어 있는 도인들을 교화해서 키우는 데 전력할 뿐입니다. 연운으로 포덕을 많이 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도전님 말씀 중에 마음에 새겨두고 있으신 부분은? 


도전님 말씀 중에 “도인을 대할 때 부자지정(父子之情)도 멀다 모자지정(母子之情)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임원들이 도인을 대할 때 권위가 아니라 모자지정으로 해야 한다는 부분을 어떤 말씀보다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입도시키고 키웠다고 자기 사람이 아니다. 상제님 도인이고 내 도인이다. 입도할 때 도문소자라고 녹명지를 올렸으니 소자라는 말은 자식이 부모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상제님의 아들, 딸인 것이다. 왕자들이 자기 동생이지만 반말하지 않고 예로서 대하는 것은 내 동생이기 이전에 지존지엄하신 임금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제님의 아들, 딸인데 임금 아들에 비하겠느냐?” 하신 말씀 또한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수도하시면서 이것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도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 생각이지만 방면에서도 수도인은 2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교화합니다. 일하는 사람과 수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구요. 수도하는 사람은 법을 잘 지키고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며 올바르게 하고, 일하는 사람은 질보다 양을 추구하면서 법보다 자기 편의적으로 편법을 쓰다 보니 때로는 덕화 손상할 일도 생기는 거죠. 수십만 호를 포덕을 해도 자기 개인의 수도가 되어있지 않으면 남의 신발노릇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발은 일할 때만 필요하고 일 끝나면 한쪽에 벗어 놓는 것이니 결국은 일하는 사람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은 수도의 과정인데 어느 틈에 우리가 일하는 사람으로 전락해서 한 때 일한 사람으로 끝나기가 쉽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수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정말 후천 오만 년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고 교화합니다. 

 


수도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전에 『전경』을 처음 편찬하고 임원들에게 숙제를 주셨는데 어떤 임원이 도전님께 여쭙기를 “여러 사람의 가장 많은 의견을 대순 전체의 교화 자료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우리 『전경』은 누가 풀어도 다 맞다. 다만 못은 박지 마라.”하셨다고 저희 선감께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방면에 그 분부를 끊임없이 인식시킵니다. 

과거 저희가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중에 일명 ‘사실론(四實論)’이란 걸 겪었습니다. “서울은 허령이다. 다음에 4번째에 진짜 운수가 온다.”고 했습니다. 『전경』에 “삼천이라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구절을 풀어서 구천상제님에서 옥황상제님으로 1번, 도주님에서 도전님으로 1번 옮겼으니 다시 한 번 더 옮겨야 3천이라는 겁니다. 말에도 ‘사실’이라지 않느냐, 네 번째가 진짜 열매다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자기한테 『전경』 구절을 맞춰 풀이해서 자기가 도통을 준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명되어 나가면서 몇몇을 데리고 어느 섬에서 3번이나 도통난다고 하며 도통 공부한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어떤 이는 『전경』 구절이며 『채지가』, 비결을 풀어 맞추며 청계탑 연화대를 진리의 바탕이니 모든 진리의 바탕은 연씨에게 줬다하는 사람, 자기가 곰보니까 『전경』 시두손님 공사에 시두손님이 천연두이니 자기가 시두손님 공사에 맞다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그렇게 각자 못 박은 사람에게 따라가는 겁니다. 나갈 사람한테 맞는 구절이 있어야 나갈 사람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맞는 게 있으니까 쏠려가는 거겠죠. 앞으로도 어떤 사람이 『전경』 구절에 맞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이 말씀을 명심하고 있다면 남아 있는 사람은 대순을 이탈하는 일이 없겠죠.

중곡도장 대순성전에 가면 겨울 봄 여름 가을 순서로 된 4폭의 벽화가 있는데 아마도 삼천이라야 이루어진다는 걸 잘못 이해해서 현혹되지 말라고 암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 겨울 금산사 그림, 두 번째 구천상제님 탄강하신 마을의 봄 풍경, 세 번째 옥황상제님 탄강하신 마을의 여름 풍경, 끝으로 도전님 탄강하신 마을이 아닌 중곡도장에 밤알이 익어 벌어진 것과 벼가 익어 고개 숙이고 있는 풍경이 있거든요. 이처럼 금산사 미륵금불에서 신명으로 30년 계시다가 강세하셔서 한 번 옮기시고, 구천상제님에서 옥황상제님으로 다시 한 번, 거기서 도전님으로 옮기니 삼천인 겁니다. 도전님 관련해서는 탄강지가 아니고 중곡도장인 것은 대순이 득의지추인 가을이 되는 겁니다. 나간 사람들은 삼천이라는 계산의 출발점을 잘 못 잡은 거죠. 삼천은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임을 명심해야 도인들이 대순에서 떠나지 않겠죠. 

수도를 올바르게 잘한다는 것이 내 스타일대로 하자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누구를 따라 하는 것도 아니고 훈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양보다 질을 추구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수도하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취재후기>

방면이 겪어낸 고생을 너무나 담담하게 말씀해 주시는 선감께 뭐라고 더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인터뷰 끝나고 1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차를 타고 가시는 모습에 선감의 수도 흔적이 느껴진다. 세종문 단청 작업 때도 현장에서 직접 붓을 잡으시고 매번 수호 때마다 솔선하여 수호를 서시는 모습이 진정 실천 수도하는 도인의 모습으로 가슴에 자리 한다. 

<대순회보> 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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