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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방면 김사건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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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6 조회2,6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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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사람은 목표를 가지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엄청난 인내력으로 끝까지 추구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번 호에 인터뷰한 고령 방면 김사건 교감이 그에 걸맞는 분일 것이다. 오랜 세월 한 자리에서 인내심으로 끝까지 자신의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많은 수도인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김사건 교감은 1939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966년 4월 28일 도(道)에 입문하였고, 1974년부터 1994년까지 20여 년간 중곡도장 종사원 직무를 맡아 보았다. 

 

입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처음 도(道)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66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김천은 대가족들이 모여 한 부락(部落)을 이루는 시절이었습니다. 전 1964년 일반 하사로 전역을 한 후, 고향에 내려와 가까운 면사무소에서 호적 정리 업무를 맡아 보았습니다.

  봄내음이 몸 안 가득 채워질 무렵, 선각인 정무용 선감 내외분이 저를 만나려고 대구에서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대구에서 김천 가는 교통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요즘처럼 고속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반버스를 몇 차례 갈아탄 후에야 도착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더구나 마을까지 들어오기 위해서는 꽤 많은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습니다.

  어렵사리 시간을 할애하여 도착한 정선감 내외분은 가족들과 못 다한 얘기도 나누고 그동안 가족들의 생각과 고민 등을 서로 주고받으며 담소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침 제가 도착하자, 전역 후에 안부 한번 묻지 못했다면서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셨답니다. 선각이신 정선감 내외분은 다름 아닌 저의 고모부와 고모였습니다.

  며칠 동안 선각께서는 집에 머물며 저에게 많은 교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특히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효(孝)의 밑거름이 되고, 인륜(人倫)이 바로 서는 것’이라는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입도치성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1966년 4월 28일(양)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수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셨습니까?

  차츰 도담(道談)에 익숙해져 가자, 궁금증과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젠 매일 교화를 듣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초여름 두 선각께서 찾아오시어 조촐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마루에 걸터앉아 모깃불을 지펴 놓고 도(道)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시간도 모자라 좁은 골방에서 밤새워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두 분도 그랬지만, 저 역시 피곤하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여름의 시작이라서 그런지 성가신 모기들의 활동이 그렇게 심한 상황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아마 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진부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각들께서 들려주신 교화는 망망한 바다에 방향을 잃은 돛단배에게 길을 알려주는 등댓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무언가에 얽매여 있었다는 느낌은 어느덧 사라지고, 수도를 통해 도통(道通)을 꼭 받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먼저 포덕소가 있는 대구에 가서 포덕사업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을 사업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다 이참에 가족들과 함께 부산 감천동으로 내려가서 좀 더 사업에 적극적으로 매진하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가족들의 양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였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은 제 뜻을 잘 받아주어 큰 어려움 없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선각께서 알려주신 교화 하나하나를 다시 정리하고 보충하여 새 인연을 만드는데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몇몇의 선무들이 나왔습니다. 또한 이 상태에서 안일하게 머물 것이 아니라 꾸준히 나아갈 수 있도록 굳은 다짐을 하였습니다.

 

20년 가까이 종사원으로 계셨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1969년 도전님께서 서울 중곡동에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부산에서 아직 올라오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예비군훈련은 35세까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그 규정을 위반 시에는 막대한 벌금을 물게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반하사로 전역하였기에 일반 병사와는 달리 교육 시간이 길었습니다. 또한 중대장을 역임하고 있어서 포덕사업에 매진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이미 도전님께서는 서울 중곡동에 본부를 창건하시고, 종교활동을 펼치시고 계신 터였습니다. 이에 방면 선각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서울로 올라가신 터라, 저 또한 교육을 끝냄과 동시에 상경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비군훈련 기간이 끝나자마자, 가족들과 함께 본부가 있는 중곡동으로 무작정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때가 1974년 초겨울 무렵이었습니다.

  처음 둥지를 틀고 몇 달 동안은 가족들의 생계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그러다 여러 모로 안정되면서 다시 인연 만들기에 매진하였고, 그동안 소식이 끊어진 방면 선각들에게도 수소문을 취하였습니다.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리다가 선각인 정무용 선감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道)를 처음 접하던 시절처럼 많은 도담(道談)을 나눌 수 있었고, 포덕사업도 함께 하여 저로서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정무용 선감은 저를 찾아와서 본부도장에서 종사원을 모집하는데,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것이 부족한 저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설레고 좋았습니다. 많은 고심 끝에 전 도(道)에서 쓰일 수 있다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1975년 11월부터 종사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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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종사원 생활은 어떠하셨습니까?

  당시 본부도장 종무원에 들어가니 총무부·기획부·수도부·교무부 이렇게 4개의 부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부서의 장(長)만 있었지, 부원(部員)은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갖가지 생필품과 사무용품의 부족 등 모든 것이 열악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사무실 필기구가 떨어져 사비를 들여 충당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부족한 물품들을 계속 사비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하사금이 쌀 한 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현재와 비교를 더 하자면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하루 일과는 새벽녘에 나와 밤 12시 전후가 되어야 끝났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일들은 손수 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하더라도 펜에 잉크를 찍어서 몇 장씩 써 내려가고, 외근을 가더라도 도보로 몇 킬로미터를 가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사적인 시간을 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어려웠습니다. 정말이지 도(道)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견디기 힘들었답니다. 또한 일반 직장인들이 외근 업무를 보다 끼니때가 되면, 가까운 음식점을 찾아 식사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사원들은 도전님께서 아무리 늦어도 도장에 들어와서 식사를 하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당시에는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래서 저 때문에 그 시절 식사를 담당하고 계셨던 연내수(청주 방면) 아주머니께서 참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밤 12시가 되어서 외근을 마치고 들어오면 불평 한마디 없이 식사를 차려 주시곤 하셨답니다.

  제가 선무로 중곡도장 종무원에 들어갈 때, 부원은 저 혼자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각 부서의 업무를 동시에 맡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유선전화기 보급마저 넉넉한 시절이 아니어서 제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도장 주변에 살고 계시던 약 20여 명의 임원들에게 도전님의 분부를 일일이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총무의 업무는 한 달에 모인 성금(誠金)을 은행에 입금하고, 도장 건물의 증축공사비와 교육사업 그리고 부식비 등의 지출을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곡동에는 은행이 없어 약 5㎞ 떨어진 지금의 화양동에 자전거로 매일 입출금을 확인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장부를 정리하면, 도전님께서는 매일 세세하게 검토를 하셨습니다.

 

종사원 기간 중 기억이 남는 일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도전님께서는 늘 근검절약을 중요시하셨습니다. 너무 어려운 살림살이였기에 더욱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청량리 시장에서 배추시래기를 거두어 와서 된장에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그 생활상을 아시겠죠. 이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도전님께서는 직접 경동시장에서 약재를 구입하신 후, 정성껏 다려내어 도인들에게 마시게끔 하셨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서 도전님께서는 건강 보조제 음료와 약으로 교체하셨는데, 이때부터 많은 도인들이 이를 복용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제가 도전님으로부터 큰 꾸지람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도장의 하루 부식비가 오백 원 정도 지출되고 있었는데, 이 금액은 당시 중상층 한 가정이 하루를 겨우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부식비였습니다. 그런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도전님께서는 “너 집안 같으면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할 수 있겠느냐? 사무실로 가지 말고, 얼른 보따리 싸서 집으로 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럽고 몸 둘 바를 몰라 몇날 며칠을 끙끙 앓았습니다.

  여주에 도장을 건설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여주 도장은 도인들이 와서 공사에 참여를 하기도 했지만, 합성공업회사라는 외부업체가 상주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도전님께서 저에게 픽업 차량을 타고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여주 읍내에 있는 장터로 향하셨습니다. 차에서 내려 직접 부식을 선택하여 저에게 주면서, “본부보다 더 잘 해 주지도 말고, 못하지도 않게 해 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전님께서는 일꾼들의 건강을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서울에서 쇠고기 국거리를 직접 챙겨 여주도장 공사 현장에 새벽 일찍 도착하시어 일꾼들에게 먹게끔 하셨습니다.

  한번은 도전님께서 임원들을 대동하여 대진대학교 부지에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말뚝을 세우려고 포천에 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임원들에게 손수 말뚝 박을 자리를 일일이 잡아주셨습니다. 일을 마친 후 도전님께서는 임원들과 함께 송우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셨습니다. 임원들에게 식사를 하게 하면서, 정작 도전님께서는 양배추 몇 조각만 드시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에 모두들 송구스러워 먹기를 꺼려하자, 도전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괜찮다. 나는 이것이면 된다. 힘든 일을 한 여러분들이 많이 먹어야 기력을 보충할 수 있고,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지 않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도장에서 종사원 생활을 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2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느꼈던 도전님은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너무나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일에는 엄격하셨지만, 사적인 자리에는 개인의 이름을 자상하게 불러주셨답니다. 또한 “도인들도 많이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시며, 틈틈이 책 읽기를 권하셨습니다. 점차 도세(道勢)가 확장되면서 여주에 본부도장과 포천에 수도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종사원의 숫자도 증가하여 순환근무가 이루어졌고, 또 요즘처럼 각 부서에 내수들도 배치가 되었습니다. 1994년에 20년 가까이 종사원으로 있다가 방면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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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인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수도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의 고난과 시련이 누구에게나 닥치기 마련일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인내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몇 번의 시련이 닥쳐 이제나 저제나 포기하려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하나 참으며 묵묵히 나아가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방면에 가면 자주 이런 교화를 들으실 것입니다. 소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고요. 소는 힘들거나 기쁘거나 그렇다고 아프거나 화가 난다고 해서 우리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잖아요. 단지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훔치 훔치’ 하면서 서 있을 뿐이죠. 또한 우리가 힘이 들 때일수록, 오히려 상제님을 찾고 운수가 하루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 자리를 지키지 않습니까? 꼭 참고 끝까지 인내력을 갖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종사원의 신분은 도전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리입니다. 그만큼 힘든 자리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종사원들은 어떤 일에 불평불만을 가질 수 없으며, 사적인 시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업무에 묵묵히 책임을 완수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일이 아닙니다. 도전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받들며, 늘 방면 수도인의 손발이 되어 드리기 위해 동분서주할 뿐이랍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종사원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순회보》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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