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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방면 정무용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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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6 조회2,8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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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에 노랑 빛이 짙어진 가을날, 고령방면 정무용 선감은 몇 달 전부터 약속된 인터뷰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셨다. 반백의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외모에서는 팔순을 넘긴 연세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해 오신 인터뷰 답변지에 적힌 단아한 필체로 학자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가 있었다. 정무용 선감은 1926년 생으로 1965년 1월 10일 입도해서 1984년 2월 1일에 보정 임명을, 1996년 7월 11일에 선감 임명을 모셨다. 

 

입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집안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중학교 입학금까지 대주셨고 대학원까지의 남은 학업은 고학으로 마쳤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했습니다. 1주일에 주야간 48시간 정도 수업을 했으니까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매번 다른 사람한테 밀려서 못 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문교부에서 추진하는 외국대학에서 연수받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점수는 분명히 제가 좋았는데 인맥이 있는 다른 학과 선생이 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수 임용 시험에서도 제 점수가 좋았어도 결과는 다른 학교 출신이 선발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저의 마음도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안되니까 답답하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교법 3장 24절)는 말씀처럼 제가 덜컥 폐결핵에 걸린 겁니다. 저 나름대로 상당히 신경이 쓰였던 가 봅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이 도에 입도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집사람한테 얘기를 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듣자 답답했던 제가 먼저 연락을 취해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에 경산선감(고 정선덕 선감)이 집에 와서 음양, 사상, 팔괘를 풀이해서 설명해 줬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었기에 『성경』의 「요한 계시록」에 있는 “다음 하늘은 홍보색과 녹보색이다.”라는 구절이 음양과 태극의 이치와 맞아 떨어지고 또한 “녹명지에 기록된 자라야만 산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정감록』에서 본 십승지(十勝地)라든지 구인종어양백(求人種於兩白)이란 구절에 관심이 갔습니다. 이런 저런 내용들이 관심이 가고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입도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결핵이 걸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1년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한 번에 30알씩 먹는 결핵약이 얼마나 독했던지 그때 생긴 이명(耳鳴)이 아직도 약간 남아 있습니다. 일정기간이 지나 전문의가 약을 먹지 않아도 좋다할 만큼 몸이 회복되고 나서 복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을 끊고도 아침에 일어나면 술에 취한 사람마냥 정신이 멍해 맑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꾸준히 모시고 수련을 하다보니 정신이 점점 맑아졌습니다.

  그리고 66년에 시학·시법·법학 공부를 했었습니다. 공부가기 전에 감천도장의 대강전 내부와 도장의 연못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 꿈을 꾸었는데 도장에 가서보니 꿈에 본 것과 똑같아서 조상님께서 입도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제가 가가호호(家家戶戶) 다니면서 도를 많이 전하지는 못했지만 저의 건강이 회복되고 가정이 화목할 수 있  는 것은 상제님의 덕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계기로 수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셨습니까?

  당시 선각분이 연락소가 없다보니 대구에 있는 저희 집에 방을 하나 내어 드렸습니다. 제가 다닌 직장이 영천에 있어 주말에만 집에 왔습니다. 한번은 학교 수학여행 문제로 평일에 집에 왔는데 그때도 선각분이 집에 계셨습니다. 저는 지방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고생하는데 선각까지 모시고 수도를 한다는 것이 그때 너무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매번 집에 올 때마다 선각이 계셨는데 그날따라 괜히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한테 이렇게 힘든데 수도를 그만두면 안 되겠냐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한참을 옥신각신 하다가 새벽 2시쯤 이번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수도를 그만두자는 결론을 짓고 늦게 기도를 모셨습니다. 도통주를 하는데 우지끈하며 마치 서까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사람도 그 소리에 놀라 주문을 멈췄습니다. 집사람은 대문을 발로 차고 창문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더군요. 기도를 모신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도를 그만두겠다는 저에게 아마 신명이 경고한 것이 아니었나 싶어 그 일을 계기로 포덕에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수도를 안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수도하시면서 어려운 일은 없으셨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자고로 화복이라 하나니 이것은 복보다 화를 먼저 겪는다는 말이니 당하는 화를 견디어 잘 받아 넘겨야 복이 이르느니라.”(교법 1장 19절)는 구절을 항상 마음에 명심하고 있습니다.

  1976년 9월, 대학에 다니던 둘째 아들이 집에서 잘 자다가 갑자기 딴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병을 앓던 아이도 아니었는데 오전에 강의가 없어 한숨자고 간다고 했던 아이가 점심때쯤 깨워보니 이미 싸늘하더랍니다. 어떻게 손 써볼 틈도 없이 그렇게 아들을 보내니 아비 된 자로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창졸간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집사람이 간경화가 생겼습니다. 딸아이가 약사인지라 이런 저런 약을 써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앓다가 집사람도 아들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슬픔도 슬픔이지만 같이 살면서 잘 대해 주지 못한 집사람이 떠났을 때는 미안한 마음에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너무 슬퍼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방면 선감이 도전님께 제가 그러고 있다고 말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도전님께서도 제 안사람을 알고 계셨는데 “정보정 뭘 그리 슬퍼해, 기운이 돌 때에 김선사 다시 보게 될 텐데.”라고 하셨답니다. “『성경』에 부활이 있다고 하듯이 우리 도에 부활이 있나니라.”는 훈시 말씀도 있듯이 그 말씀에 힘을 얻어 술을 끊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도전님 말씀 중에 기억이 남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저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을 주로 맡아 가르쳤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보니 도전님께서는 “학생들도 상제님의 소자(小子)이니 지도를 잘 해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도담을 조금씩 해 줬습니다. 많이 해 줄 수는 없었지만 1시간이라도 해주려고 했습니다. 학생들도 민족 신앙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다보니 호기심을 갖고 들어 주었습니다. 교직에 있는 십여 년 동안 4천 2백 명 정도 학생들한테 도담을 해준 것 같습니다. 저희 방면에 입도하지는 않았으나 제자들 중에는 다른 방면에 입도해서 상급임원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도의 일을 어떻게 참여하셨습니까?

  수학여행 전날 기도를 모시면서 겪은 일 이후로 우리 도가 신도(神道)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도의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주일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에서 다른 선생과 시간을 바꿔 조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사기록 종교란에도 대순진리회라고 썼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저는 별 상관 안했습니다. 지금도 화수회(花樹會: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친목을 위하여 이룬 모임이나 잔치)에 가면 『대순회보』를 나눠줍니다. 각자 마음가짐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도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면 나머지는 각자의 정성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제가 직장을 다니는 터라 도정 업무에 다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방학을 이용해서나 주말을 이용해서 최대한 종단의 행사에 참석을 했었습니다. 부르노 박사가 내방했을 때는 통역을 맡았습니다. 부르노 박사는 7개 국어를 할 만큼 능력 있던 사람입니다. 민족종교를 연구하던 사람인데 장병길 박사를 통해 소개받아서 오게 되었습니다. 부르노 박사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족 종단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도장에 와서 도장도 둘러보고 치성참석도 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도전님 곁에서 도전님 말씀을 전하는 정도였습니다. 제가 이사를 많이 하다 보니 그분과 찍은 사진이나 받았던 문건 등이 다 없어진 것이 좀 아쉽습니다.

  방학 때에는 당시 서울 신설동에 있었던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 당시 『전경』 편집을 장병길 교수가 주로 맡았습니다. 저는 작업에 조금 참여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별로 한 일이 없어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1985년도 대진고등학교 개교 때는 학교 연혁을 작성하고 교사 선발을 심사해서 도전님께서 채용하시도록 보고를 드렸습니다. 정년퇴임 후 대진대학교 교수자리 말씀이 계셨을 때 포덕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전에 저는 학교에서 교육을 했기에 안사람인 김선사가 포덕 사업을 했습니다. 평소에는 김선사가 수반 집에 찾아다니며 교화와 포덕 사업을 했고 일요일에는 저도 함께 다녔습니다. 포덕하면서 수반들은 고 정선덕 선감의 교화를 주로 듣게 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때라 일일이 찾아다니며 연락해야 했던 것이 불편했다면 불편했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수도인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우리 수도인은 조상의 보이지 않는 공덕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상제님께서는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헤아릴 수 없는 공력을 들이나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선령신들은 육십년 동안 공에 공을 쌓아 쓸만한 자손 하나를 타 내되 그렇게 공을 드려도 자손 하나를 얻지 못하는 선령신들도 많으니라. 이 같이 공을 드려 어렵게 태어난 것을 생각할 때 꿈같은 한 세상을 어찌 잠시인들 헛되게 보내리오.”(교법 2장 3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도인은 조상께서 우리들을 보내신 그 뜻을 항상 새겨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훈회, 수칙을 착실히 지키면서 수도를 하면 운수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인간의 복록은 내가 맡았으나 맡겨 줄 곳이 없어 한이로다. 이는 일심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지체없이 베풀어주리라.”(교법 2장 4절)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일심으로 도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수를 조급한 마음으로 바라지 말고 ‘평생 도를 닦는다.’라는 마음으로 수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수도를 해서 임원(任員)이 되면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자신의 심신(心身)을 다해 양위상제님과 도전님의 뜻을 수도인에게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수도인을 항상 살펴야 합니다. 학교로 비교해 본다면 학교 교장과 같은 것입니다. 교장이 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듯 상급임원이라면 방면의 일 하나 하나를 책임지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임원이 될수록 언행에 조심하고 덕을 베풀기를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체력이 부족하여 수호 근무를 못하는 저로서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도장을 수호하고 계신 수습대책위원장 및 임원들과 수도인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후기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온 정성을 다해 차분하게 인터뷰에 임하시는 모습이 감동스러웠다. 과거 종단의 일에 많이 참여하셨음에도 별로 한 일이 없다고 하시며 겸손해 하시는 모습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듯하다. 대순진리회의 역사 속에 중요한 과정 하나하나가 기록에 남아 있지 못한 부분을 아쉬워하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대순회보》 89호, 「도인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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