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 방면 최하영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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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2 조회3,210회 댓글0건본문
입도 전에 하신 일과 당시 상황은 어떠하였는지요?
저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 덕산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고, 집안은 기독교를 믿는 교인 집안이었습니다. 대구 약전골목에서 약재 건재상을 하고 있었는데, 『성경』 내용에 관해서 의문점이 많아 교회 목사에게 자주 질문을 했는데 저에게 뚜렷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교리로는 당면한 문제를 풀기 어려웠을 뿐만아니라, 미래에 대한 해결책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중, 약전 골목에 출입하던 사람들로부터 도(道)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주 봉화 풍기지역에 사시는 분들을 통해서 『정감록』, 계룡산에서 수도하는 것, 풍기가 십승지중 하나라는 등등의 얘기를 듣고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그 무렵 저는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우리 동네에 축지법 쓰는 도사가 있었는데, 어느 한겨울 밤에 사랑방에 모여있던 동네사람들에게 “내가 배를 한 개씩 배불리 먹도록 해주겠으니, 큰 양풍이 하나를 가져오고 불을 끄시오”라고 말한 후, 도사는 어둠속에서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배를 하나씩 손에 집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배는 아주 달고 맛있었으며, 한 개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고 직접 경험한 분으로부터 들을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이 말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정말 헷갈렸습니다. 도대체 도(道)라는 것은 무엇이고 그 실체는 무엇일까? 이 의문에 대해 도를 언급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풀어줄 『성경』 외에 더 차원 높은 것을 찾다가 사서삼경, 불경 등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서적을 읽을수록 도의 실체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입도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세요.
도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갈 무렵, 어떤 한의사 분과 『중용』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헤어질 때 그 분께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거든 다음에 다시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이 운영하는 한의원에 갔다가 우연히 『대순진리회요람』이라는 책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 책에 대해 물어 보지 못했고, 돌아오던 내내 그 글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순진리회’ 거참 ‘회’ 하나 거창하다. 그런데 ‘이 단체가 친목단체일까? 사회사업단체일까’ 그 책 속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그 한의원을 방문해서 그 책자에 대해 여쭈어 보자, “아니 그것을 언제 어떻게 봤어”라고 한의사께서는 되 물었습니다. 책상위에 놓인 것을 봤다고 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책 내용에 대해 여쭈어보자, 저에게 “혹시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교회 다니고 있다고 대답하자, “ 오! 그래 그러면 이해하기 어렵지”라고 말했습니다. 종교단체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기만 하셨습니다. 만감이 교차 하던 중 그 책을 잠시 보여줄 수 있냐고 묻자, 장롱 속 옷 품속에서 꺼내주며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 내일 오후 3시까지는 돌려 달라 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책을 읽어보았으나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저는 그 한의사 분의 인품과 대순진리회가 수도하는 곳이라는 말씀에 이끌려 만난 지 한 달여 만인 음력 1977년 3월 3일 도문에 입도했고, 그 한의사 분이 바로 제 선각이 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제님의 덕화를 입은 것인데, 항상 제 정성이 부족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수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일은 없었는지요?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교회를 다녔던 때문인지 몰라도 지인을 포덕하기가 어려워 포덕사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서적 외판원도 해보면서 포덕사업을 하였습니다. 선각께서 “최 외수는 농사짓는 것에 비유하자면 모래밭에 모를 심어 놓고 매일 물을 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부지런하여야 한다.”는 조언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지금도 명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쉼과 틈이 없이 정성을 들이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점은 불변의 진리인 것 같습니다.
지인들 60명을 상대했는데 한 사람도 입도를 시키지 못하다가 61명 째 분을 처음 입도시켰던 일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업 현장에서 공사를 받든 것이 제가 지금까지 수도해온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포천 대진대 공사를 받들면서 제 정신력과 의지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도를 하시면서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무엇인지요?
포천 대진대 공사, 동두천 제생병원 골조공사와 토성 금강산수련도장 공사를 받들었던 것이 저에게는 자부심과 더불어 수도생활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대구 비산동에 소재한 방면 회관을 지을 때, 책임을 맡아 공사를 수행했던 것이 큰 보람으로 여겨지는 일입니다.
도전님 말씀 중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당시에는 결혼도 미루고 포덕사업에만 전념하는 분위기였지만, 저는 30세에 결혼을 하여 10년 동안 아이를 낳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결혼하고 애 낳는 게 포덕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여주본부도장 정심원 공사할 때의 일입니다. 배수로 공사 때 돌 작업을 하는데 방수한 곳이 자꾸 훼손되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판넬과 천을 이용하여 편리한 방법을 찾아 보수했는데, 도전님께서 “앞으로 그렇게 하면 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도전님의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날씨가 무척 더워 일꾼들이 물을 마셔도 갈증을 풀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는데, 도전님께서 처음으로 간장 탄 물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간장 물을 마시니 신기하게도 갈증이 금새 해소되었습니다.
현재 치성과 강식 때 북 치는 일을 맡고 계시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분규 후 청주방면 권종진 선감께서 부산방면 이형석 선감께 북을 치게 하셨습니다. 봉강식 때 북칠 사람을 수호 임원 중에 보조를 두기로 하였는데 제가 선발되었습니다. 이 선감의 개인사정으로 두 달간 대신 북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북치는 것이 부담이 되어 사양했는데, 이 선감께서 건강상 몸 치료차 지방으로 가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부득이 북치는 일을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북을 맡으시면 사명감이 남 다를 수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북을 치시는지요?
치성이나 강식 때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늘 북을 칠 때마다 긴장이 되어 손발이 땀으로 흥건합니다. 늘 긴장하면서도 제가 치는 이 북소리에 천지신명께서 감응하신다는 것에 감개가 무량합니다. 늘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하지만 지나고 나면 정성이 부족하였다는 생각에 반성을 하곤 합니다.
치성 때와 강식 때 북을 치는 횟수가 다른 것 같은데요.
북치는 횟수는 이형석 선감께 설명을 듣고 권종진 선감께 여쭈어보아 확인을 받았습니다. 치성 때는 5타씩 3번 15타를 치고, 강식 때는 7타씩 3번 21타를 친다고 배웠습니다.
북을 맡고 계시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많은 공사를 받드는 중에 이적이나 기적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몸과 마음을 조신(操身)·조심(操心)하려고 노력합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조심스럽게 법도에 맞게 행하는 것이 예라고 생각합니다. 도장 안에서의 예, 숭도문 안에서의 예, 영대 안에서의 예가 각각 절도에 맞아야 합니다. 도전님께서 “예는 지방에서 배우고 도장에서는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도장에는 신명이 가득 차 있다. 신명이 안 보여서 그렇지 보이면 한 발짝도 못 움직인다.”라고 하셨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도장에서는 양수거지(兩手据之)로 다니고, 숭도문 안에서는 극경(極敬)의 예를 갖추며, 영대 안에서 이동 시에는 국궁(鞠躬)의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수도인들 스스로가 지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수도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부족한 사람인데 감히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정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람 기르기가 누에 기르기와 같다고 하신 상제님 말씀처럼 사람이 잘 되고 못되는 것은 다 얼마만큼 정성을 들이는가 하는 데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성이 무엇인지 내가 제대로 알아야 되지만 과거 한때는 수반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식사 시간은 피하고 만나더라도 용건만 보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각께서 “수반 집에서 밥도 같이 먹고 그 집 사정도 잘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상제님께서 “내 밥을 먹는 자라야 내 일을 하여 주느니라.” 하셨듯이 상제님 일꾼으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수반 집에서 식사도 같이 하면서 서로가 소통하며 자연스러운 대화로 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성에 대하여 말씀드리다 보니 지난날 중곡도장에서 종각을 설립할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방면 선감께서 종각 건립 기금을 도장에 올려드렸는데, 도전님께서 “너무 많다. 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정성으로 하는 것이다.” 하시며 다시 내려주셨답니다. 저의 선각이신 홍길수 교령께서 방면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누어 다시 올리니 도전님께서 허허 웃으시며 “여러 사람 이름으로 나누어 그냥 다시 가져왔구나.” 하시며 “옛날에 에밀레종에 대한 전설이 있지 않느냐. 종을 만드는 데 인신(人身) 공양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종에는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셨답니다. 이때 저는 도의 일을 할 때는 한 사람의 큰 정성보다 많은 사람의 정성을 모아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끝으로 청소년 캠프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평소에 청소년들에게 도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왔는데 마침 기획부에서 청소년 캠프를 한다는 안을 내서 그때 무척 마음이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단체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제공해 주고 싶었고, 특히 아이들이 도장에 오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감격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이 곧 대순진리회의 미래이고 장래에 우리 도를 이끌어 갈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국가와 종단의 발전을 짊어질 인재로 육성하는 데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고, 다 같이 힘을 모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순회보>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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