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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방면 김옥자(金玉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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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15 조회3,3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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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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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며 “대장부(大丈夫) 대장부(大丈婦)”라 써서 불사르셨고, “어찌 남장군만 있으랴. 여장군도 있도다”(권지 1장 17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종단에도 여장군의 기세로 도(道)의 일을 하신 분들이 많이 있다. 부산방면 김옥자 교감은 교장을 지낸 부친과 교육자였던 모친 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자랐지만 도문에 들어와 여장군같이 많은 일을 하여 수도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분이다.
  김옥자 교감은 1929년 12월 28일(음) 생으로 1970년 8월 24일(음)에 입도하여 1979년 8월 14일(음)에 교감임명을 모셨다. 대순부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본부도장의 꽃꽂이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있다.


 
Q. 먼저 입도하시기 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원래 고향이 황해도인데 6.25 때 부산에 피난 갔다가 서울이 수복되면서 올라왔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당시 김구 선생을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으로 생각하고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고 나서 하루는 김구 선생이 우리 학교를 방문했는데, 그때 제가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김구 선생께서 “어디서 그렇게 고운 꾀꼬리 같은 노래가 나오느냐?” 하시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분의 손이 엄청 크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가슴이 너무 벅찼습니다. 그 후 김구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Q. 입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1960년대 중반 무렵 제가 야당 생활을 할 때 우리 남편의 사업이 부도나자 경찰이 잡아들인다고 해서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에 입당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를 공화당에 입당시키기 위한 처사였습니다. 그 후 요시찰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찰 보호 하에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공화당이 물러나고 민정당이 들어서면서 그때서야 공화당의 굴레를 벗게 되었지요. 입도하기 전에 사회에서 태극도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저의 선감께서 3년을 쫓아다니며 저를 입도시키려고 정성을 들였는데, 사실 우리 남편이 하자고 해서 입도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선각은 우리 남편인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제가 선각이라고 불렀습니다.

 

 

Q. 도전님 재세 시 분부를 모시고 활동하신 내용 중 대순부인회 창단활동 내용과 무료예식장 운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1. 먼저 대순부인회 창단과 활동 내용이 궁금합니다.

 

  1977년쯤 도전님께서 회원 간의 친목과 단합, 애경사 부조 및 지역 사회와의 화합을 추진하고, 3대 중요사업의 일환으로 봉사활동을 실천하라고 명하셔서 대순부인회가 창단되었습니다. 이때 도전님께서 “몇 명으로 시작하겠는가?” 하고 물으셔서, “처음에 30명으로 하다가 50명으로 늘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초기에는 상급임원의 부인들이 많이 참여하였습니다. 도전님께서 대순부인회 활동을 하면 도인들의 단결이 잘 될 거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봉사를 취미 삼아 하도록 하고, 부인회 활동에 희망이 생길 수 있도록 운영하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청송청년회, 청송부인회란 명칭으로 시작했습니다. 대순부인회는 대순청년회와 함께 정부에서 운영하는 검찰청 선도위원회, 동부경찰서 운영위원회 등과 구청의 산하 단체로 활동하였습니다. 과거에는 구청에도 봉사단체 활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생의 실천운동으로서 충효사상 선양, 노인잔치, 이웃돕기, 조기 골목청소, 농촌일손 돕기에 솔선하였고, 질서운동으로는 도시 교통정리와 어린이보호구역에서의 교통안내를 맡았습니다. 또한 봉사정신으로 무료예식장 운영, 미아보호 및 어린이날 이름표 달아주기, 자연보호 캠페인과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2. 무료예식장을 하게 된 계기와 운영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1977년 초 도전님 명으로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중곡도장 사무실 2층에서 무료예식장을 6년 동안 운영하였는데, 60여 쌍이 여기서 결혼했습니다. 당시 종사원 중 한 명이 그 예식장에서 1호로 결혼했습니다. 무료예식장을 개관하고 6년 후에는 장안동 예식장을 개관하였습니다. 당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재료를 구하고 봉황장식도 만들며 예식장을 꾸몄습니다.
  결혼식은 참 소박하고 검소했습니다. 당시 도인들이 그때 돈으로 만 원 가지고 예식을 치렀으니 말이죠. 사진은 본인이 알아서 준비하고 꽃이나 장갑, 부케를 만 원으로 마련하여 결혼식을 올린 겁니다. 이렇게 결혼식을 해도 여기저기서 예식장 신청이 많았는데, 도인뿐만 아니라 사회 사람들도 이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 참 좋아하셨습니다. 장안동 회관 지으면서 결혼식을 그곳에서 하게 되어 이전 예식장은 패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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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의 『대순지침』이 나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 도전님 훈시를 속필로 받아 적었는데, 사투리까지 그대로 적었죠. 훈시를 받아 적은 노트가 2~3권 되었는데, 그 훈시와 다른 두 사람의 필기가 『대순지침』의 초안이 되었습니다. 도전님께서 “내 말을 적은 것이 있으면 가지고 와보라” 하셔서 올려드렸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이순범 교무부장과 종교문화연구소의 장병길 교수 두 분이 글을 다듬어 『대순지침』으로 만든 것입니다. 도전님께 훈시 노트를 올려드리고 나서 얼마 후 이순범 교무부장이 『대순지침』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1984년에 『대순지침』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훈시를 모실 때 어떤 분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토씨 하나라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대순회보》에 도전님 훈시를 해설하는 내용이 나왔으면 좋겠고, 도인탐방에 도인들의 얼굴이 나오는데 재세 시 도인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하신 도전님의 용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Q. 도장에서 도인들이 꼭 지켜야 할 지침으로 도전님께서 특별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까?
 
  도전님께서 도장은 보금자리이며 상제님의 품 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치성을 마치고 임원들이 곧바로 방면에 나가는 것에 대하여 도전님께서는 “도장은 신성(神聖)한 곳이다. 도장은 도통 받고 운수 받는 곳이고,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봉안한 곳이다. 몸은 도장에 있고 정신은 밖에 있으니 신명이 도와주겠느냐? 너희 집에는 뭐가 그리 좋은 게 있어서 나가기 바쁘냐?” 하시며 당시 원장을 꾸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임원들을 나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도장은 상제님과 천지신명이 모셔져 있는 신성한 곳이니만큼 도인들이 도장에 올 때는 옷도 잘 갖추어 입고 도장 예절도 잘 지켜야 합니다. 옷보다도 마음가짐이 몇 배 중요합니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정성과 공경이 묻어나야 합니다. 

 

 

Q. 수도하면서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1986년에 여주본부도장 본전(지금의 봉강전)에서 단청할 때, 용을 그렸는데 마지막에 용의 눈동자를 찍고는 3일 동안 앓아누운 적이 있습니다. 용의 눈동자를 하나 찍고 두 번째 딱 찍었는데 “와다다다당” 하면서 제가 있는 곳으로 불꽃이 “타닥” 하고 튀어온 겁니다. 저는 번개를 맞은 줄 알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길로 병이 들어 3일 동안 못 나왔습니다. 작업 중 결근을 한 겁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밖에서는 하늘로 용이 올라간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도전님께서 봉황을 그리라고 하셨습니다. 봉황도 점안을 하자마자 도인들이 봉황이 난다고 하면서 빨리 나와서 보라고 야단이 났습니다. 저는 나가보지 않았지만 전하는 말로 꼭 봉황같이 생긴 구름이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는 겁니다. 용 그림을 그리고 제가 이틀 동안 못 일어나니까 도전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어도 모른 체 하시며 청심환만 시봉에게 내려 보내주셔서 먹은 경험이 있습니다.
  단청에 이어 도전님께서 도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정에서부터 도배하라고 하셨는데 집에서 도배하는 것도 사람 불러서 도배할 정도로 도배의 도 자도 모르는 저에게 도배를 하라고 하시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제가 교장댁 장녀로 유복하게 자랐으니 무슨 고생을 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도전님의 명을 받들고 기운을 모시고 하는 일이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대진대학교 기숙사부터 웬만한 곳의 도배를 다 했습니다.

 

 

Q. 수도하시면서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포천에서 도전님 부인이신 숭인(崇仁)부인 초상 치를 때, 처음 도전님으로부터 수고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장지(葬地)에서 부인회원들이 일렬로 서 있는데 도전님께서 옆으로 오시더니 가만히 “수고했어!”라고 작은 목소리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날의 감회가 마음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Q. 도전님 말씀 중 어떤 말씀이 기억에 남으십니까?

 

  예전에 도전님을 모시고 움직이던 중 천렵(川獵)을 하게된 적이 있어요. 그때 그렇게 물고기를 잘 잡는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임원이 그날은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고기를 못 잡을 줄 벌써 아시고 애초에 매운탕 대신 찌갯거리를 준비해서 가셨습니다. 찌개 매운탕에 호박을 넣는 것이 일반적인 요리법인데 도전님께서는 오이를 넣고 “한번 해 먹어봐, 오이가 끝까지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게 아주 맛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처음 먹어보는 오이찌개가 아삭아삭 씹히는 게 그렇게 맛이 있었습니다. 도전님께서 저희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니 어려서부터 상제님께서 작은 곤충도 해치시지 않을 만큼 호생의 덕이 두터우셨다는 『전경』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어디로 행차하실 때 우산을 들고나오면 도전님께서 원장에게 “너는 왜 우산 들고나오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일기예보에 낮에 비가 온다고 하였다고 말씀을 올리니, 도전님께서 “우산 들고나왔으니 비 오겠다. 비 올 준비하면 비 온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장이 그냥 우산을 기사에게 맡겨버렸습니다. 그런데 비가 안 왔어요.
 


Q. 현재 치성 때 꽃꽂이를 맡고 계신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1975년 가을쯤 처음으로 꽃이 영대에 올라갔습니다. 그때부터 근 40년 넘게 영대에 꽃을 올리게 된 것이죠. 당시 증산계열 49개 종파의 49명 대표자들이 우리 도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식탁 위에 꽃을 세 수반(水盤)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이 취소되면서 행사를 위해 준비한 꽃 수반 3개 중 1개는 남고 2개는 영대에 처음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나서야 알았지만 남은 수반 하나는 부정으로 영대에 못 올라간 겁니다. 당시 제 딸과 같이 준비를 했는데 아마 그때 침봉에 찔려 피가 나서 테이프를 감은 채 작업을 했는데 그 수반이 못 올라간 겁니다. 그때부터 부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성이 생리가 있으면 꽃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도전님께서 부정을 없애셨지만 지금도 꽃을 준비할 때는 부정을 가립니다. 우주에서 가장 신성한 곳인 영대에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도장에서 꽃꽂이를 하게 됐습니다. 1986년에 여주본부도장 짓고 나서 우리가 4층 엘리베이터 앞까지 꽃을 가져다 놓으면 시봉들이 꽃을 영대에 올렸는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특히 생화는 겨울에도 계속 물을 공급해주어야 하니까요. 뜨거운 물을 주어도 꽃이 자꾸 얼었습니다. 서울보다 여주가 훨씬 춥잖아요?
  그러니 도전님께서 생화는 자꾸 얼어서 안 되겠으니 조화를 쓰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조화 가게에 가서 꽃이란 꽃은 다 사서 갔다 드렸더니, 도전님께서 보시고 “나는 노란 국화가 좋다. 오행에서도 중앙 5·10토가 황색이 아니냐. 신명이 좋아하는 것은 꽃, 초, 향, 물, 쌀인데 이 5가지 중에서도 꽃을 제일 좋아한다. 신명이 있는 데는 다 꽃을 놓는다. 나는 국화가 제일 좋다”고 하셨습니다.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는 도전님의 분부를 모시지 못했지만 제가 그동안 해오던 명을 받들어 노란색, 흰색, 보라색 꽃이 들어갔습니다. 능소와 미륵불에는 갖가지 색으로 1만2천 송이가 들어가는데 세계적인 꽃도 있습니다. 그곳을 1만2천 송이로 장식한다는 생각으로 꽃을 꽂았습니다. 처음에는 차라리 나무를 심지 왜 꽃을 꽂느냐고 말이 많았습니다.
  능소의 꽃은 도전님 탄강일과 사월 초파일, 8월 1일 금초 때 1년에 3번 바꿉니다. 각 도장마다 2층에는 싱크대와 꽃꽂이 준비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상제님께 올리는 정성이므로 꽃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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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꽃꽂이하시면서 사명감이 남다를 수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하시는지요?

 

  도전님께서 꽃값이 모자라면 도장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한번도 그렇게 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꽃은 방면 도인들의 정성으로 올렸습니다. 저는 꽃꽂이할 때 도전님께서 분부하시며 내려주신 친필을 항상 품고 다닙니다. 부적같이 지니고 다니며 중요한 분에게만 보여줍니다. 몇십 년을 지니고 다닙니다. 현재도 도전님의 분부를 직접 모시는 듯이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Q. 도장 꽃꽂이를 맡고 계시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도인들은 왜 영대에 꽃을 올리는지, 그것도 노란 국화를 올리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도전님께서 신명이 좋아하는 것으로 꽃, 향, 초, 물, 쌀을 말씀하시면서 신명이 꽃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고, 도전님께서도 중앙 5·10토를 말씀하시며, “나는 그 꽃 중에서도 노란 꽃이 제일 좋다. 나는 노란 국화꽃이 제일 좋다”고 하셨습니다.
  영대에는 15신위를 모시니 15송이를 모십니다. 절에 가면 쌀을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는 꽃, 향, 초만 씁니다. 기도 모실 때는 물을 씁니다. 도전님께서 노란 국화를 가장 좋아하셨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도장에 노란색 국화가 만발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생화는 매달 치성 때마다 바뀝니다. 조화는 1년에 3번 갈아 올립니다. 조화는 한 번 꾸미는 데 일주일 걸립니다.

 

 

Q. 앨범을 보시면 도전님 재세 시 생각이 절로 나시겠습니다.

 

  『전경』에 류훈장과 최풍헌의 지난 일을 밝히신 상제님 말씀이 있습니다. 류훈장은 끝까지 풍헌을 믿었으므로 지난 임진란을 피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대순진리회 수도인이라면 누구나 도전님께서 남기신 유훈(遺訓)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감히 평할 수조차 없지만, 도전님처럼 참 그렇게 능하신 분은 없습니다. 정말로 지나고 나니 도전님의 업적이 점점 더 드러나고 세월이 갈수록 재세 시에 하신 말씀은 구구절절이 가슴에 아로새겨집니다. 도전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 하늘이 내신 진인이신데, 그때는 생각도 없이 분별심을 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가도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으니 만약에 남편이고, 어머니고, 아버지고,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떠오르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내정(內庭)에 들어가면 저도 모르게 애통해하는 겁니다. 
  도전님께서는 차도 중고로 사셨던 것처럼 당시에 필요한 것을 중고로 많이 사다 쓰셨습니다. 목수를 통하여 부엌의 식탁과 의자도 만들게 하시고 그 외의 것도 중고로 많이 쓰셨습니다. 도전님께서는 항상 검소하시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당시의 앨범을 보면 감회가 새로워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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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도인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전님께서 “도통을 해도 못 배운 사람보다 배운 사람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도인이라고 절대 사회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모든 일을 알아야 도(道)를 깨우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속에 도가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상제님께서도 가장 두려운 것이 “박람박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적인 모든 일을 알아야 합니다. 방면의 도인들이 사회적인 일도 잘 알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화가 필요합니다.
  도전님께서 무슨 이야기가 머리에 들어오려면 교화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뇌로 들어와서 입으로 흘러야 한다. 이쪽으로 들어와서 저쪽으로 흘러야 한다. 교화를 해도 그렇게 계속해야 영리(靈理)가 터진다. 교화가 내 머리에서 나가면서 영리가 터져야 한다. 자꾸 하다 보면 영리가 터진다”라고 하셨습니다.
  교직자들이 제일 가르치기 힘든 대상이 중학교 2, 3학년이라고 합니다. 초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숙한 것도 아닌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정성을 다하여 교화하다 보면 도전님 말씀과 같이 자신도 모르게 영리가 트이고 상대방도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순회보> 2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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