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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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호열 작성일2019.05.30 조회5,721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이호열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지만 … 앉아서 위태로워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이제 의기(義氣)를 들어,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는 바이니 … <「동학 무장 창의문」 중에서>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동학농민운동’을 한때 ‘동학란(東學亂)’이라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동학을 신봉하는 농민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의미의 명칭이다. 그러던 것이 ‘동학농민항쟁’, ‘갑오농민전쟁’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8종 교과서 대부분에 ‘동학농민운동’으로 실리게 되었고,01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최근에는 ‘동학농민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 운동이 단지 지방관리의 탐욕과 학정(虐政)에 대한 반발에 그친 것이 아니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며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열고자 하였고,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그 명분의 정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02 그 중심에는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은 정부가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고 올해 2월 국무회의를 거쳐 의결·공포한 것이다. 5월 11일을 기념일로 정하게 된 것은 지난해 공청회를 거쳐 심의위원회가 심의한 결과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이 날이 최대전승일이며,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을 거세게 하여 이후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국적으로 혁명의 불길을 확산시킨 의미 있는 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11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올해 제정된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에 대한 첫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다시 피는 녹두 꽃, 희망의 새 역사’를 주제로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및 관련 단체, 정·관계 및 지역 인사, 일반 시민 등이 참석하여 125년 전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일종의 반란으로 인식되어 그것을 이끌었던 전봉준은 ‘반란군의 수괴’라는 오명을 써 왔고, 함께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 또한 그와 같은 불명예를 씻을 수 없었다. 이를 바로 잡기위한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어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동학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동학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되고, 이 재단에서 국가기념일 제정을 추진해 온 결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5년 만에 오늘의 성과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선양사업 중 하나로 최근 SBS 방송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녹두꽃’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그리고 정읍시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공원 조성사업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말 조선이 선진열강들이 벌이는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어 가는 가운데,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폭정 속에서 많은 백성이 굶주리고 핍박받던 암울한 시기에 일어났다.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인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어난 이 운동은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1차 봉기에 이어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위한 2차 봉기로 나타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초 지방 탐관오리에 대한 항쟁인 고부 봉기로부터 시작되어 한때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미 기존 민란의 수준을 뛰어넘어 시대의 구조적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해 이를 진압하려 했고, 일본은 텐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급파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외세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는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죽창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패배하여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수 만에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한때 전국적으로 궐기하였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평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조선 정부를 대항해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왜곡·축소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야 재평가에 대한 역사학계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03
최근의 학술연구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하나는 민중이 주체로 나선 ‘아래로부터의 근대적 개혁 운동’으로서 한국의 자생적 근대 민주주의의 효시로 평가받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를 포함한 9인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항일의병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근대 민족자주정신의 원동력이라 평가받는 점이다.0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주요관계자는 “동학농민혁명은 낡은 신분제 중심 사회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내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운동의 뿌리”라며,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농민반란으로 왜곡되고 의미가 축소돼 지난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 왔음”을 아쉬워했다.05 또한, 한 강연자는 지난 4월 정읍에서 진행된 ‘녹두꽃에서 피어난 촛불’이라는 특별강연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시천주(侍天主)의 만민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임금이 나라의 주인인 왕조 시대에서 백성이 주인 되는 민주(民主)시대로 다시 개벽하고자 했던 혁명”06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따른 변화는 상제님께서 동학에 대해 하셨던 말씀과 공사를 돌이켜 보게 한다. 특히 동학의 지도자인 전봉준에 대하여는 “전명숙07은 만고 명장이라. 백의한사(白衣寒士)08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도다”(공사 1장 34절)라고 하시며, 한(漢)고조 유방보다 뛰어난 만고의 명장으로 인정하셨다. 이는 구한말 당시 동학을 믿는다고만 해도 ‘동비(東匪)’라 하여 붙잡혀 가던 시절에 반란군의 수괴로 일컬어지던 전봉준의 나라를 위하고자 했던 뜻있는 선비의 진심을 알아 보시고 높이 평가하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교법 1장 2절)라고 하신 말씀은 억압받고 천대받는 민중을 아끼고 사랑했던 전봉준의 지극한 마음을 평가하시어 상제님께서 그를 조선 명부(冥府)의 수장(首長)에 임명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봉준의 동상이 지난해 그의 순국 기일인 4월 24일에 맞추어 서울 종로 한복판에 세워졌다. 바로 종로 네거리(서울 보신각 맞은편)에 형형한 눈빛이 살아있는 그의 동상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상제님의 공사에 따라 시대가 그의 진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 상제님으로부터 만고의 명장으로 평가받으며 조선 명부의 수장이 된 전봉준의 동상이 서울의 중심인 보신각 인근에 자리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 사실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이대종, 「동학농민군의 ‘보국안민’ 계승한 통일트랙터와 농민수당」, 《민중의 소리》 2019.5.11 . http://www.vop.co.kr/A00001406314.html
·이현세,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다」, 《문화체육관광부 블로그》 2019.3.31 . https://blog.naver.com/mcstkorea/221501708298
·이현희, 「동학과 민족정신」, 『동학학보』 9, 2005.
·최광숙, 「동학은 촛불까지 이어진 민주주의·민족운동의 뿌리」, 《서울신문》 2019.5.10. 참고영상자료 ·[전주KBS,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도올선생 특별강연] 녹두꽃에서 피어난 촛불: 제1부, 2019.57.
01 이현세,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다」, 《문화체육관광부 블로그》 2019.3.31.
02 김용옥, 「녹두꽃에서 피어난 촛불」, [전주KBS,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특별강연] 참고.
03 이현세, 앞의 글, 참고.
04 이현희, 「동학과 민족운동」, 『동학학보』 Vol.9, p190, 참고.
05 최광숙, 「동학은 촛불까지 이어진 민주주의·민족운동의 뿌리」, 《서울신문》 2019.5.10.
06 김용옥, 앞의 영상, 참고.
07 전봉준의 자(字)
08 흰옷 입은 가난한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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