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수도(人山修道)가 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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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2.03 조회5,149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김태윤
입도치성을 모시고 며칠 뒤 포덕소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도장에서 수염이 긴 도인이 큰 통나무를 어깨에 들고 뛰어다닌다는 것이다. 그 순간 도(道)가 속세를 떠난 도사 같은 이미지로 새겨졌다. 나도 은근히 그런 도인이 되어보려는 마음이 있던 때에 우연히 공사 현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막상 도장에 가보니 의외로 그냥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들뿐이었다. 2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웃음만 나오지만 당시로서는 현대사회에서 수도를 한다는 게 조금 낯설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도를 닦으려면 산속에 들어가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는 산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도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게 되기까지 나에게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대사회는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미덕이라는 광고가 그런 욕망을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다보니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 환상에 젖게 된다. 하지만 어제보다는 풍족한 것 같은데 왠지 먹고 사는 게 쉽지 않다. 잠시라도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시간 투자를 하는 것도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이렇게 숨 가쁘게 남과 경쟁하면서 나의 가치는 점차 잊혀져 간다.
욕망은 도미노와 같다. 한번 넘어가면 걷잡을 수 없어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을 욕망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쓰러질 때까지 나는 욕망의 노예로 남게 된다. 그 속에서 남이라는 존재는 그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수도하면서도 욕망은 같이 따라다닌다. 이렇다 보니, 나만의 욕망을 좇을 때 상대와 대립적인 상극 관계가 되어버린다. 이제 잠시라도 좋으니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자.
사람의 모든 행동과 기능은 마음에서 나온다. 허무한 남의 꾀임과 당치 않는 허욕에 정신을 팔리는 것도 모두 나만의 욕망을 좇다 보니 생긴 것이다. 그런 욕망으로 인해 마음은 편벽(偏僻)되고 사사(私邪)되어 버린다. 이러한 욕망에서 벗어나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평무사한 마음가짐이 요청된다. 나만을 생각하던 사(私)의 영역에서 조금씩 벗어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열릴 때 나는 그런 욕망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대순진리회는 남 잘되게 하는 도를 닦는 곳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잘 되게 해주는 것일까? 만약 그 사람에게 자신의 욕망과 내면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해준다면 어떨까? 인간의 가치가 신(神)의 차원만큼이나 고귀하다는 인존(人尊)의 의미까지 알게 해준다면? 그 사람은 허망한 욕망을 추구하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고 욕망에 지친 자신을 어루만질 수 있을 때 자신의 참다운 가치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인산(人山) 속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게 되면서 남 잘되게 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남 잘되게 하려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 결국 자신의 내면적 성찰이 요구된다. 이제 수도는 감정과 욕망의 심기(心氣)에 얽매인 나에서 벗어나 내면의 심령(心靈)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내가 만나지 못했던 참다운 나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순간 나의 내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는 남 모르는 공부가 시작된다. 남 잘되게 하는 공부와 남 모르는 공부! 현대사회에서 수도가 바로 이런 공부를 하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대순회보> 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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