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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소통의 중심지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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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진 작성일2019.07.25 조회3,8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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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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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년대 초 주막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주막은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이었다. 그런데 『전경』에 보면 상제님께서 음식을 파는 주막에서 돼지를 잡으라고 하시거나 종도 김윤경이 상제님을 뵈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자 근처 주막으로 달려간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주막이 어떤 곳이었길래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일까? 『전경』에 스무 번 이상 나올 정도로 상제님께서 많이 이용하셨던 주막. 이 글에서는 주막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과 그 역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전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주막의 유형과 기능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시던 당시 주막은 장터, 나루터, 큰 고개를 비롯하여 작은 시골에까지 있을 만큼 그 수가 많았고 장소에 따라 규모와 유형도 다양했다. 큰 시장이나 나루터 근처의 주막은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기에 그 규모가 큰 편이었다. 이런 주막들은 건물이 여러 개였는데 본채, 행랑채, 건너채, 창고와 마구간 등이 있었다. 그래서 돼지, 소 등의 가축을 직접 키울 수 있었고 손님들의 말, 소, 당나귀 등을 관리하나 행상인들의 물건을 맡아주기도 하였다. 주막에서 파는 음식은 주로 돼지고기, 소고기, 수육, 계탕, 생선구이 등이었다.01 주모의 시중을 드는 중노미는 안주를 굽거나 공짜 안주를 먹는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02
  대부분의 주막에서 국밥을 팔았는데 규모가 큰 주막은 소고기로, 작은 주막은 개고기로 요리하였다. 주막 국밥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길 가던 나그네들이 막걸리를 한 사발 가득 부어 마신 후 가마솥에 푹 삶아낸 고기를 먹으면 그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술은 주로 탁주나 소주를 팔았고 양반을 위해 맛과 향기를 넣어 만든 방문주를 팔기도 하였다03 시골에는 작은 규모의 주막이 많았는데 방 한 칸에 자그마한 부엌이 전부인 경우도 있었다. 작은 주막에서는 주로 개장국(국밥), 국수 등을 팔았다.04
  상제님께서는 크기에 상관없이 주막을 이용하셨는데 문공신을 데리고 들르신 태인 행단 주막은 규모가 큰 곳으로 보인다.05 살아있는 돼지를 주모에게 잡으라 하시고 공사에 참관한 여러 사람과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누어 드셨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는 규모가 작은 주막도 이용하셨다. 『전경』에 주막을 운영하던 정괴산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상제님을 지성껏 공양하였다. 하루는 그가 상제님께 올릴 개장국을 질솥에 끓이다가 솥이 깨어져 낙담하자 상제님께서 쇠솥을 구해주신 이후 가세가 날로 늘었다. 여기서 그가 운영했던   주막은 작은 규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06 질솥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곳에서 주로 사용하던 것이었고 개장국도 시골에 자리한 작은 주막이나 주막 주인이 가난한 경우에 팔았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주막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도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상제님께서 객망리 주막에 가셨을 때 “나는 이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하마가(下馬街)에서 기다리라”07고 하시며 주막에서 주무셨다. 주막에서 음식을 먹으면 숙박비는 받지 않았으며, 도착한 순서대로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는 것이 관례였다.08 그러나 신분제 사회였기에 양반이 오면 일반 양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양보하거나 뺏기기도 하였다. 일례로 교리(校理)09직에 있었던 어떤 양반이 첫 지방 출장을 갔다가 편하게 독방을 쓰려고 주막에서 모든 투숙객을 쫓아냈는데 그곳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지 않은 판서(判書)가 있었다. 그는 제사를 지내러 가던 길이었는데 방에서 쫓겨나게 되자 그 교리를 크게 꾸짖고 임금께 고해 파직시켰다고 한다.10
  또한 주막은 상인부터 양반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정승 맹사성이 용인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과거를 치르러 가던 시골 양반이 허술한 맹사성을 깔보고 말끝에 ‘공’ 자와 ‘당’ 자를 붙여 막히는 쪽에서 술을 한턱내자고 했다. 며칠 뒤 서울의 과거장에서 그 시골 양반을 만난 맹사성이 “어떤공?” 하였더니, 그는 얼굴빛이 창백해지면서 “죽어지어당” 하고 사죄했다. 하지만 맹사성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벼슬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주막은 다양한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이 새로운 소식을 듣거나 전하고 싶을 때면 찾던 곳이었다. 1671년 영남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신정(申晸)은 감찰 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주막에서 얻기도 하였다11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서민의 의향이나 사회의 추세를 파악하기 위해 주막을 이용하였다.12 주막의 이러한 특성은 『전경』에서도 엿볼 수 있다. 행록 4장 22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윤경에게 살포정에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그가 그대로 따랐지만 뵙지 못하였다. 그러자 윤경은 소퇴원 주막으로 향하였고 이곳에서 새울로 오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13 당시 주막의 주모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다양한 역할을 하고 사건 사고가 많았던 곳
  주막은 마을을 벗어나서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이나 강을 건너는 나루터 등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길목에 많이 위치하였다. 그래서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조정에서는 공문을 전달하기 위해 봉수제, 파발제 등을 도입하였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자 주막 운영자를 통해서 이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기록을 보면 충청감사의 비밀 장계를 주막운영자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한 것이 한 예이다.14 또한, 조선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사항이 있을 경우 주막에 방을 붙이도록 했는데, 이를 따르지 않은 관리에게는 죄를 묻기도 하였다.15 주막에서는 공문서 전달뿐만 아니라 환자를 후송하기도 했다. 『양호초토등록(兩湖招討謄錄)』16 에 보면 동학군 진압 작전을 수행하던 관군이 전라도 삼례에서 총상을 입자 길목의 주막을 통해 환자를 후송하도록 하였다. 구한말의 정부에서도 군사적인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환자수송 방편으로 주막을 사용하였다.
  한편, 주막의 위치적 요건으로 인해서 봉물(封物)17 을 터는 큰 화적들이 종종 출몰하기도 했는데 그들을 잡기 위해 순검들이 주막에서 매복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서로 마주치는 날이면 주막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18 이러한 수난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이어졌다. 대한제국기의 의병들은 관군과 일본군이 이동할 때 주막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급습하곤 했는데, 이때 크고 작은 교전이 자주 발생하였다. 1908년 5월 3일 《황성신문》에는 “미상의 의병들이 광주(廣州) 초일면 비거리 주막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기습 공격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주막에서 종종 일어나던 소동은 상제님께서 거문바위 주막을 이용하실 때도 일어났다. 순검이 화적을 잡기 위해 변복하고서 야간 순시 중에 주막에서 쉬고 있었다.19 상제님께서 그를 보시고 주모에게 곧 죽을 사람이라 하시니, 이에 분노한 순검이 상제님을 구타하였다. 그래도 상제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죽을 사람으로부터 맞았다 하여 무엇이 아프리오”20 라는 말씀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셨다. 이때 주모가 순검에게 그분은 신인(神人)이니 사과하고 연고를 물으라고 말하자 그는 상제님께 용서를 빌고 살길을 여쭈었다. 상제님께서 “오늘 밤에 순시를 피하고 다른 곳으로 빨리 가라” 하시니 순검은 명을 좇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얼마 후 순검을 죽이기 위해 화적이 들이닥쳤으나 이미 몸을 피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주막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만이 아니었다. 주요 길목에 위치하여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서로의 애환과 소식을 나누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을 만나고 사람을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공사도 행하셨다. 이렇게 상제님께서 다양한 용도로 이용하셨던 주막은 그시대의 만남과 소통의 중심지였다.

 

 

 

【참고문헌】
이마무라 도모에, 『조선풍속집』, 서울: 민속원, 2011.
배도식, 「옛 주막의 민속적 고찰」, 『한국민속학』 15, 1982.
조혁연, 「19세기 충주지역 주막의 연구」, 충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5.
정혜경, 「막걸리 문화의 중심, 그림 속의 주막을 찾아」, 『한맛한얼』 3권 2호, 2010.

 

 

 

01 정혜경, 「막걸리 문화의 중심, 그림 속의 주막을 찾아」, 『한맛한얼』 3권 2호 (2010). p.217 참조.
02 배도식, 「옛 주막의 민속적 고찰」, 『한국민속학』15 (1982), p.93 .
03 같은 글, p.93.
04 배도식, 앞의 글, p.95.
05 행록 3장 17절.
06 행록 3장 19절.
07 행록 3장 35절.
08 배도식, 앞의 글, p.96.
09 조선 시대에 문서작성을 맡아보던 정5품 또는 종5품의 문관 벼슬이다.
10 이마무라 도모에, 『조선풍속집』 (서울: 민속원, 2011), p.398.
11 조혁연, 「19세기 충주지역 주막의 연구」 (충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5), p.151 참조.
12 1910년도 일본 경찰이 작성한 『주막담총(酒幕談叢)』이라는 정보기록 초안에 적혀있다.
13 행록 4장 22절
14 조혁연, 앞의 글, pp.145~146 참조.
15 조혁연, 앞의 글, p.148 참조.
16 『양호초토등록』은 1894년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난 뒤 홍계훈이 양호초토사에 임명되어 인천에 도착한 1894년 4월 3일부터 전주성을 수복한 뒤 귀경한 5월 23일까지 의정부로 발송한 장계를 날마다 기록한 책이다.
17 지방에서 중앙으로 올리던 여러 가지 물품이다.
18 배도식, 앞의 글, pp.93~94.
19 행록 3장 10절 참조.
20 행록 3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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