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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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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나연 작성일2019.09.20 조회3,7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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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정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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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다”, 참 많이 들어 본 말입니다. ‘누가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 혹은 그렇게 하는 게 옳다’라는 의미입니다. 짧지만 강한 힘을 가진 이 단어는 누구나 공감하거나 마땅하다고 느끼는 상황을 표현할 때 주로 쓰입니다. 그런데 과연 처음부터 당연한 것, 원래 그런 게 있을까요? 당연하게 여기는 바람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았던 기억이 있어 잠시 지난날을 되돌아봅니다.

  제 부모님은 다섯 살 차이로, 같은 날 다른 해에 태어난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한 번에 두 분의 생신을 축하해드립니다. 하늘이 주신 기쁨 두 배의 날이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 생신은 두 분이 아니라 아버지만을 위한 날이었습니다. 이날 어머니는 당신 생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해 이웃분들을 대접하느라 늘 바쁘셨습니다. 그렇다 보니 누가 봐도 생일의 주인공은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를 받고 친구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날 친구 가족들이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광경에 문득 ‘응? 왜 우리 어머니는 생신이 없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의 생신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으레 아버지 생신만을 준비하느라 어머니는 챙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일까요? 우리 가족은 이 상황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누구 하나 어머니의 생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궁금해서 묻는 제게 어머니는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뭐 어쩐다냐. 아버지 생신 축하하믄 다 한 거제. 아버지 생일이 내 생일이니까 그게 그거제. 우리 때는 다 그래야.” 섭섭하다, 서운하다는 말씀 한마디 없으셨습니다. 담담한 그 모습에 제 가슴은 먹먹해졌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생신 축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 상황은 더욱더 오래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은 수도생활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처럼 묵묵하게 수반을 챙기는 선각이 그렇습니다. 본인의 상황이나 일은 뒷전이고 언제나 수반이 우선이면서도 내색 한번 없으니 수반들은 그 노고와 은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 선각의 고마움을 알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결국,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 생겼을 때 비로소 선각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함과 바꾸며 살고 있을까요? 무언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때, 혹은 그런 말을 하거나 들을 때마다 잠시 멈추고 자신과 주변을 점검해 보는 건 어떨까요? 수도하면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 혹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삶은 더욱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날 이후 생신 때 어머니의 환한 웃음을 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올해도 저는 케이크를 사러 갈 예정입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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