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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숙이 거사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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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귀만 작성일2022.12.10 조회2,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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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부 김귀만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교법 1장 2절)

 

202211151504_Daesoon_262_%EC%97%AD%EC%82▲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종로구 영풍문고 앞 소재

 

 

  위의 성구는 상제님께서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목도하시고 그 중심에서 전쟁을 이끌던 대장 전명숙(全明淑, 1855~1895)이 죽어서 조선 명부가 된 이유를 설명하신 구절이다. 한 고을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작은 민란의 차원을 넘어서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에서 일본군 및 관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 대규모 전쟁의 처참한 상흔 속에서 상제님의 시선은 오히려 전명숙의 마음을 향해 있었다. 그 마음은 ‘자신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잘 되는 것’이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이었다. 상제님의 이 말씀은 과연 전명숙의 거사에서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일까?
  동학농민혁명은 통상 다음의 네 단계로 구분한다.01 제1단계는 고부민란으로,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폭정에 분개한 고부 백성 천여 명이 1894년 1월 11일02 관아를 습격하여 점거한 사건이다. 군수가 교체되고 이후 부임한 박원명의 회유책으로 난민이 해산한 3월 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제2단계는 제1차 농민전쟁(1차 기포) 시기로, 동학농민군이 3월 20일 무장(茂長, 현 전북 고창)에서 기포(起包: 동학의 포 조직을 기반으로 봉기함)하여 이후 고부를 비롯한 여러 관아를 점령하고 관군을 격파하며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성까지 점령한 5월 7일까지다. 제3단계는 집강소(執綱所) 시기로, 5월 8일 양측이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농민군이 전주성을 빠져나와 전라도 각지로 흩어져 집강소를 설치하고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으로 행정자치를 펴나간 9월 12일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제4단계는 제2차 농민전쟁(2차 기포)의 단계로 동학군이 조선 궁궐을 침범하여 국왕을 사로잡고 있던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혈전을 말하며 이는 전명숙이 재봉기한 9월 13일부터 동년 말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전명숙이 지닌 ‘남을 잘 되게 해주려는 마음’은 그가 처음 거사를 도모할 때부터 끝까지 품고 있던 뜻이지만,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는’ 신분해방의 양상은 고부민란 때도, 1차 기포 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1차 농민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농민 집강소 시기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전라도 전역에서 벌어진 신분해방의 혁명은 신식 무기를 갖추고 동학농민군 섬멸에 나선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멈춰지게 된다. 이 글에서는 집강소 시기에 나타난 전명숙의 역할을 중심으로 그의 마음이 어떻게 현실로 드러났는지 그 정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봉준공초」에 나타난 전명숙의 거사 이유

  동학농민군의 1차 기포03의 목적은 서울로 진격하여 양반관료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동학군이 작성한 창의문이나 격문 등을 참고하면 이러한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하면서 발표한 <무장포고문>에 따르면, “조정에는 왕을 제대로 보필하는 인재가 없고 지방에는 오직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만 득실대고 있으니 팔도의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어 도탄에 빠지게 되었는데 양반들은 오직 저 혼자만 잘 될 생각으로 벼슬자리만 엿보고 있다”04라고 꾸짖는다. 동학군은 왕조를 전복시킨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왕을 잘못 보필하고 있는 관료와 백성을 수탈하는 지방관의 악행을 토로하고 있다. 3월 26일경 전라도 일대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호응과 궐기를 촉구하며 공표한 <백산격문>에는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05라고 하면서 타도의 대상이 양반, 부호, 수령 등임을 명확히 한다. 또 동학농민군 내부에서 강령처럼 사용한 <4대명의(四大名義)>에 따르면,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 양반관료)를 모두 없앤다”06라고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전명숙이 거사한 이유를 동학농민군이 대내외적으로 선포한 이러한 글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이하 「공초」)07를 통해 그 이유를 전명숙의 육성으로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공초」에 따르면, 고부에서 난을 일으킨 이유를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심문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이 그 이유임을 듣게 되고, 전명숙 본인에게 얼마나 수탈을 당했는지 묻는다. 이에 전명숙은, 자신은 가진 것이 없어서 피해가 없다고 진술하자 다음과 같이 묻는다.

 

문: 너는 피해가 없는데 어찌하여 소란을 일으켰는가?
답: 나의 피해 때문에 봉기하는 게 어찌 남자의 일이라 하겠는가? 많은 백성이 원탄(冤歎)하는 까닭에 백성을 위하여 그 폐해를 제거[爲民除害]하고자 했다.
08

 

  전명숙은 자신의 피해 때문에, 다시 말해 자신을 위해서 기포하지 않았다. 무자비한 수탈로 원을 맺고 한탄하는 백성을 보고 그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 위민제해(爲民除害)라는 말속에서 자신이 아닌 남을 향해 있었던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폐해의 일차적 원인은 경제적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였다.
  4월 27일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병력을 요청했고,09 첩자까지 보내 조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일본 역시 곧바로 병력을 투입한다. 청나라는 아산만에 5월 5일, 일본군은 인천에 5월 6일 도착한다.10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임 전라관찰사 김학진(金鶴鎭, 1838~1917)은 외국 군대의 철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전주성을 두고 대치하던 관군 측의 초토사 홍계훈과 동학군의 전명숙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하도록 한다. 전명숙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김학진으로부터 폐정(弊政: 백성에게 폐해가 되는 정치)개혁의 약속을 얻어낸 뒤 5월 8일 전주성에서 동학농민군을 철수시킨다.

 


폐정개혁을 위한 집강소의 설치와 공인

  전주화약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없지만, 김학진이 5월 중순에 각 읍으로 내려보낸 효유문(曉諭文: 깨닫도록 타이르는 글) 11을 근거로 할 때 적어도 두 가지 합의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전라관찰사 김학진이 전라도의 폐정을 개혁하기로 약속한 것이며, 둘째는 이 폐정개혁이 제대로 실행되는지 동학군으로 하여금 감시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때 그 감시의 역을 맡은 것이 바로 ‘집강(執綱)’이다. 이 효유문에 따르면, “작은 폐정은 감영에서 혁파하고 큰 폐정은 임금께 아뢰어 혁파할 것이며 너희들이 사는 면리(面里)에 집강을 두었으니 억울한 것이 있으면 해당 집강을 경유하여 영(營)에 호소해서 공정한 결정을 기다릴 것”12을 주문하고 있다.
  사실 ‘집강’은 동학에서 처음 사용한 명칭은 아니다. 집강은 조선 시대에 이미 향청에서 사용하고 있었으며 ‘기강을 세우는 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13 당시 지방통치는 국왕-관찰사(도)-수령(군현)을 축으로 운영되었고 각 고을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지닌 군수나 현령과 같은 수령이었다. 그런데 집강은 군현(郡縣)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군현의 하위에 있는 면리(面里)에만 존재했다. 따라서 김학진의 ‘면리집강’은 폐정개혁을 감시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으며 동학군 역시 이것을 잘 알고 면리 대신 군에 집강을 설치하려고 하였다.14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고을의 수령들과 충돌을 빚었으며, 특히 나주, 남원, 운봉, 순창에서는 농민군의 입성조차 저지하였다.15 이러한 불협화음을 해소하기 위해 김학진은 전명숙을 전주성으로 초청한다. 당시 전주에 살던 정석모라는 유생은 이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6월, 관찰사가 감영으로 전봉준 등을 오도록 초청했다. 이때 전주성을 지키는 군졸들은 총과 창을 갖고 좌우로 정렬하였는데 전봉준은 큰 갓에 삼베옷을 입고 머리를 들고 들어오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관찰사는 그와 관민상화지책(官民相和之策)을 상의한 결과 각 군(郡)에 집강 설치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동학도들은 각 읍을 나눠 점거하고 집강소(執綱所)를 관청에 설치하고 서기ㆍ성찰ㆍ집사ㆍ동몽 등의 직책을 두었으니 온전히 하나의 관청을 이루었다.16

 

202211151503_Daesoon_262_%EC%97%AD%EC%82▲ 「불멸-바람길」 조각상 중 부분, 전북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 기념공원, 임영선 작.

 

 

  전주화약 당시 전명숙과 김학진은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가 이들에게는 첫 만남이었다. 군졸들이 무기를 들고 도열해 있어 긴장감이 감돌지만 정작 전명숙은 아무런 무기 없이 평상복인 삼베옷에 큰 갓을 쓰고 당당하게 입성한다. 전라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농민군과 지방관들의 대립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관을 대표한 김학진과 민을 대표한 전명숙이 전주성에서 만나 서로 화합할 방안을 모색했고, 그 방법으로 전명숙은 ‘군집강’의 설치를 요구하였으며 김학진은 이를 수락했다.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을 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합법적으로 지방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했던 동학교도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이로부터 전라도 53주는 한 고을도 빠진 곳이 없이 모두 다 집강소가 설립되어 민간이 서정(庶政: 여러 방면에 걸친 정치ㆍ행정에 관한 일)을 집행하게 되었다”17라고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위기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선을 침탈하려는 속셈으로 국내에 진입한 일본군이 6월 21일 새벽에 경복궁을 침범하여 국왕을 생포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학진은 국난 극복을 논의하기 위해 7월 6일 전명숙을 전주성으로 다시 초청한다.18 이 7월의 상황을 반(反)동학적 유림인 황현이 『오하기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학진은) 서울에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관 송사마(宋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에 들어가 전봉준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하자며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약속하게 하였다. … (전주성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마침내 진심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속마음까지 드러내 보여 의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군대의 지휘권을 전봉준에게 넘겨주었다. … 전봉준은 김학진을 끼고 전라도를 전제(專制: 혼자서 결정함)하였으며 김학진의 좌우는 모두 전봉준의 무리였다. … 김학진은 꼭두각시처럼 되어 감사로서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다만 동학군의 문서만을 봉행(奉行: 시키는 대로 받들어 행함)할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도인감사(道人監司)’라고 하였다.19

 

  친동학적 행보를 이어가는 김학진을 비꼬는 황현의 어투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당시 전명숙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명숙은 명실공히 김학진과 함께 도정(道政)을 운영하게 된 것이며 이를 통해 백성들이 원했던 폐정개혁을 도정에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20 김학진은 자신의 정무처인 선화당(宣化堂)을 전명숙에게 내주고 징청각(澄淸閣)에 거처하며 매사를 전명숙의 의사를 물어 처리하였다.21 또 전라감영에도 집강소 격인 대도소(大都所)가 설치되고 도집강(都執綱)이 임명된다.

 

202211151503_Daesoon_262_%EC%97%AD%EC%82▲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 전주 풍남문(豊南門)

 

 

탐관오리 척결에서 신분해방으로

  전명숙은 난의 주동자에서 관찰사와 함께 도정을 운영하는 협치의 대등한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22 이제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의 감시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를 실행할 수 있는 무력과 권위를 모두 쥐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집행하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에서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여러 번 지방관에게 제출한다.23 전주화약 시기(5월)와 맞물려 제출된 폐정개혁의 요구사항은 주로 탐관오리의 척결과 조세제도의 개선에 집중된다.24 그런데 집강소 공인기(6, 7월)의 폐정개혁안은 여기에 신분제 철폐와 관련된 조목들이 추가된다. 전주화약기에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긴급한 변수 앞에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만을 거론했지만, 집강소라는 조직이 공인되고 전명숙의 위상 또한 높아진 마당에 폐정의 근원적인 원인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위계를 나누어 피지배층인 농민으로부터 세금과 노동력의 착취를 가능하게 만든 봉건적 신분제도였다. ‘집강소의 폐정개혁 12개조’ 혹은 ‘집강소의 정강(政綱) 12개조’25에는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징습(懲習: 못된 버릇을 응징)할 것”, “노비문서는 화거(火祛: 불태워 없앰)할 것”, “천인의 대우는 개선할 것” 등의 조목이 포함된다.

 

202211151503_Daesoon_262_%EC%97%AD%EC%82▲ 「불멸-바람길」 조각상 중 농민군 부분, 전북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 기념공원, 임영선 작.

 


  동학농민군이 불량하다고 생각되는 유림과 양반을 응징하는 방법은 죽이거나 매질하지 않고 오직 ‘주리를 트는 것’26이었다. 양반의 신분으로 자신들보다 천하다고 여겼던 상놈ㆍ천인에게 주리를 틀린다는 것은 신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능욕까지 더해진다. 또 노비들이 길에서 갓을 쓴 양반을 만나면 ‘너도 양반이냐’라며 갓을 빼앗아 찢고 모욕을 주었다. 양반들은 이러한 신분 투쟁에 압도되어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태웠다.27 집강소가 벌인 이러한 신분해방운동은 호남 전역에서 봉건적 지배와 착취의 위계를 파괴하였다. 당시 전라도에서 펼쳐진 신분해방의 정황을 오지영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상의 모든 폐해(弊害)되는 것은 남김없이 혁청(革淸)하는 바람에 소위 부자ㆍ빈자라는 것과 양반ㆍ상놈, 상전ㆍ종놈, 적자ㆍ서자 등 모든 차별적 명색(名色)은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동학군의 별칭을 지어 부르기를 나라에 역적이오, 유도의 난적이오, 부자에 강도요, 양반에 원수라고 하는 것이며 심하면 양반의 후사를 끊으려고 양반의 불알까지 바르는 흉악한 놈들이란 말까지도 떠들어댔다.28

 

  동학농민군이 집강소의 정강을 집행하자 부자-빈자, 양반-상놈, 상전-종놈, 적자-서자와 같은 모든 차별적 구질서가 파괴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양반들이 동학도를 강도요, 원수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으니 이것은 당시 전라도에서 벌어진 격렬한 신분해방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도들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한 예가 공손했으며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평등한 예로 대하였고, 간혹 양반 중에 주인과 노비가 함께 입도한 경우에는 서로를 접장이라고 부르면서 동학의 법도를 따랐으며, 백정이나 평민도 양반과 평등한 예를 행했다.29
  약 7개월간30 호남 전역에서 벌어진 신분해방의 혁명은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계속된 일본군의 동학군 섬멸 작전으로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전명숙이 순창 피노리에서 잡히고 이후 정부가 개설한 재판장에 서게 된다. 법관은 그에게 “양반과 부자를 모조리 짓밟았으며 종문서를 불 질러 강상을 무너뜨린 죄”를 지적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악행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간하여 사복(私腹)을 채우는 자를 공격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31 전명숙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상놈과 양반이라는 신분의 차이와 그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천한 인간과 귀한 인간의 차별이라는 폐해의 근원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202211151503_Daesoon_262_%EC%97%AD%EC%82▲ 「불멸-바람길」 조각상 중 농민군 부분, 전북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 기념공원, 임영선 작.

 


나가며

  전명숙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민제해(爲民除害) 하려는 마음으로 거사를 일으켰다. 고부민란으로부터 제1차 농민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수령급 탐관들을 몰아냈으며, 집강소의 공인을 이끌어 내고 신분해방의 강령을 집행하여 호남 전역을 다른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전명숙과 일면식도 없는 노비들이 면천(免賤)을 얻었고, 여러 고을에 살던 장삼이사 농민의 세금과 고리대금으로 진 빚이 탕감되었다. 그러나 전명숙은 전라도의 백성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라도의 탐관오리만을 제거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전라도에서 먼저 탐학하는 관리와 매작하는 권신을 쫓아내면 팔도가 자연스럽게 일체가 되어 세상이 바뀔 것이라 여겼다.32 전명숙의 마음은 조선 백성 전체를 향해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왜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를 전명숙의 예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셨을까? 전명숙은 봉건적 신분제라는 시대의 가장 근원적이며 커다란 병폐를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당시 민중의 대부분이 관계된 문제였다. 또 전명숙은 거사가 진행되면서 동학농민군의 위세가 커지고 자신 또한 전라감사 격으로 위상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수많은 농민군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되어 자신이 잘 되고자 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 상제님께서는 남을 위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 기국과 한결같음까지 헤아리신 것 같다.
  당시 조선을 뒤흔든 동학농민군의 혁명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명숙이 왜 거사를 일으켰는지 그의 마음을 보려 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전쟁이라는 폭력성, 혁명이라는 격렬함에 시선을 빼앗겨 정작 전명숙이 왜 거사를 일으켰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상제님께서는 전쟁과 혁명의 이면에 있던 전명숙의 마음, 남을 잘 되게 해 주려던 그 마음에 주목하셨다. 상제님의 시선, 전명숙의 마음을 향해 있었던 그 시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공부하고 누구를 위해 수도하고 있는가. 전명숙의 거사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01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연구』 (서울: 일조각, 2016), pp.174-175 참고.
02 이 글에서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03 고부민란과 1차 기포에 대해서는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동학농민운동1」, 《대순회보》 79호 (2008), pp.22-27’을 참고할 것.
0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학농민혁명 자료총서』, 『수록』, 「茂長縣謄上東學人布告文」 참고.
0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백산대회 격문」 참고.
06 “구병입경(驅兵入京) 진멸권귀(盡滅權貴).”
07 전명숙이 순창 피노리에서 잡힌 후 서울로 압송되고 일본 영사관 등지에 수감되어 1895년 2월에서 3월 사이에 조선의 법무아문 관리와 서울 주재 일본 총영사인 우치다 사다스치(內田定槌)에 의해 다섯 차례의 심문을 받게 되는데 이때의 진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0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학란기록下』, 「전봉준공초」, 開國五百四年二月初九日東徒罪人全琫準初招問目, “問, 汝無被害, 何故起鬧. 供, 爲一身之害而起包, 豈可爲男子之事. 衆民冤歎故欲爲民除害.”
09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은 사실 청나라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청의 원세개(遠世凱)는 민영준에게 조선 정부에다 여러 차례 출병을 요청하라고 강요한다. 조선 정부는 수차례 거절하다 결국 청군이 오되 농민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하륙하지 못한다는 조건부 수락을 내린다.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서울: 태학사, 2005), pp.98-101.
10 신용하, 앞의 책, pp.215-216 참고.
11 이 효유문은 김제에 5월 19일, 무주에 5월 22일, 구례에 6월 3일 도착했다고 하였으므로[노용필, 『동학사와 집강소 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2001), p.167] 적어도 5월 19일 이전에 발송된 것이다.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수록』, 「曉諭文」 참고.
13 관찰사나 수령은 조정에서 파견되는 데 비해 이들 집강은 해당 면리에서 그곳의 실정을 잘 아는 지식 있고 명망 있는 자를 뽑아 면임(面任) 등의 행정에 자문함과 동시에 주민들의 기강을 세우는 데 협조하도록 한 직임이었다. (신용하, 앞의 책, p.228)
14 노용필, 앞의 책, pp.193-195 참고.
15 황현, 『오하기문』, 김종익 옮김 (서울: 역사비평사, 1995), pp.173-177 참고.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갑오약력』, 「是時 東徒屯聚于長城等地」, “六月, 觀察使請邀全琫準等于監營. 是時, 守成軍卒, 各持銃鎗, 整列左右, 全琫準以峩冠麻衣, 昂然而入少無忌憚, 觀察使相議官民相化之策, 許置執綱于各郡. 於是東徒割據各邑, 設執綱所于公廨, 置書記省察執事童蒙之各色, 宛成一官廳.” 
17 오지영, 『동학사』, 이장희 교주(校註) (서울: 박영사, 1976), p.153. 그러나 실제로 ‘나주’ 지역은 목사 민종렬의 저항으로 끝내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다.
18 전명숙과 김학진이 몇 차례 회담했는지에 대해 한 번이라는 설과 이 두 번이라는 설이 있다. 여기서는 두 차례(6월/7월) 회담을 가졌다는 노용필의 연구(노용필, 앞의 책, pp.164-174)를 따랐다. 한 차례라는 설은 당시 김학진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일제의 경복궁 범궐’이라는 돌출된 변수를 무시한 측면이 있다.
19 황현, 앞의 책, pp.197-198.
20 안외순, 「동학농민혁명과 전쟁 사이, 집강소의 관민 협치」, 『동학학보』 51 (2019), pp.188-191 참고.
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도문변』, 「白山敗績辨」, “及其到任讓賊於宣化堂自居澄淸閣每事由於賊矣.”
22 안외순, 앞의 글, p.188.
23 정창렬, 『한국사 39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99), pp.379-381 참고.
24 신용하, 앞의 책, p.222 참고.
25 ‘집강소의 정강’이란 표현은 오지영의 『동학사』 초고본(草稿本, 간행되지 않은 원고)에 등장한다. 간행본에는 ‘폐정개혁 12개조’로 바뀌었고 그 항목의 내용 또한 다소 바뀌었으나 신분해방과 관련된 조목은 대동소이하다. 초고본은 오지영이 1924년에 집필한 것이고, 간행본은 1940년에 출판된 책이다. 초고본과 간행본에 들어있는 12개조 항목에 대한 비교는 신용하의 책(pp.336-342)을 참고할 것.
26 황현, 앞의 책, p.131.
27 같은 책, p.231.
2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학사(초고본)』, 「집강소의 행정」.
29 황현, 앞의 책, pp.231-232.
30 전주화약이 있던 5월부터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11월까지 약 7개월간 집강소가 유지된다.
31 오지영, 앞의 책, p.180.
3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학란기록下』, 「전봉준공초」, 乙未二月十一日全琫準再招問目, “問 然則欲除, 全羅一道貪虐之官吏而起包耶, 欲八道一體爲之之意向耶. 供, 除全羅一道貪虐, 屛逐內職之賣爵權臣, 八道自然爲一體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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