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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祈禱)의 마음가짐과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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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31 조회4,0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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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김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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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修道)는 심신(心身)을 침잠추밀(沈潜推密)하여 대월(對越) 상제(上帝)의 영시(永侍)의 정신(精神)을 단전(丹田)에 연마(鍊磨)하여 영통(靈通)의 통일(統一)을 목적으로 공경(恭敬)하고 정성(精誠)하는 일념(一念)을 끊임없이 생각(生覺)하고 지성(至誠)으로 소정(所定)의 주문(呪文)을 봉송(奉誦)한다.(『대순진리회요람』, p.18)

 

 

위의 내용은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수도(修道)에 관해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수도는 영통의 통일을 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신 상제님을 영원히 모시는 정신을 단전에 연마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경과 정성을 들이며 소정의 주문을 봉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도에는 공부와 수련, 기도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수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 시 마음가짐과 자세에 관해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신명에게 복을 비는 일’01입니다. 그러나 대순진리회에서 기도의 핵심은 신앙의 대상이신 상제님을 영원히 모시는 영시(永侍)의 정신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평일(平日)기도와 주일(主日)기도가 있습니다. 평일에는 진술축미(辰戌丑未)로 매일 오전·오후 각 7시와 오전·오후 각 1시에 기도를 모십니다. 그리고 5일 간격으로 갑기(甲己)일에 드는 주일(主日)에는 자오묘유(子午卯酉)로 오전·오후 각 11시와 오전·오후 각 5시에 기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평일에 4번, 주일에 모두 8번을 모시게 됩니다.

 

도전님께서는 기도에 담긴 의미와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훈시(訓示)를 통해 상세하게 밝혀주셨습니다.

 

기도란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여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는 정신을 모아서 단전에 연마하여, 영통의 통일을 목적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일념(一念)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성으로 소정의 주문을 봉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에 대한 인식이 옳고 그름에 따라 믿음이 참된 믿음도 되며 거짓된 믿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야 하며 가면(假面) 가식(假飾)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정성이 있는 곳에 상제님의 하감(下鑑)하심이 있는 것이며,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기도는 물론이고, 회관이나 회실에서 주일기도를 모심에서도 철저히 하여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거나 외출을 하거나 바쁜 일을 하는 등 여건이 여의치 못한 경우에는 그 시간을 잘 기억하여 마음속으로 심고(心告)를 드리고 집에 돌아온 후 보충으로 기도를 모심이 가할 것이며, 또한 가정의 사정이 허락지 않아 기도 의식을 행하지 못하는 경우에 마음속으로 상제님께 발원함도 기도를 모심과 같다 할 것입니다. 시간을 잊지 않고 심고를 드리는 그 자체가 상제님을 항상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모시는 지극한 영시(永侍)의 정신이니 기도를 모신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볼 뿐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믿음과 기도는 옳은 정성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의 도전님 훈시는 1986년에 발간된 『대순회보』 제4호에 실려 있는 내용인데 벌써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말씀을 근본으로 기도를 모실 때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내적으로는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는 영시의 정신이 점점 더 진실해져 가야 합니다. 이때 가면 가식이 아닌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상제님의 지극한 기운을 모실 수 있습니다. 기도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 시간을 잊지 않고 심고(心告)를 드리는 것 자체가 상제님을 잊지 않는 정신이므로 기도를 모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상제님을 모시는 정신이 늘 끊임이 없이 조밀하게 이어져야 비로소 영통의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또한 상제님의 말씀과 뜻에 나의 심신이 적중토록 일심으로 수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를 통해 단련된 도인들의 정신이 일상생활로 이어져 도인으로서 언행을 비롯하여 처신·처사가 ‘본받을 만한 사람’이란 인망을 얻는다면 참된 도문소자(道門小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외적으로는 기도를 모실 때 정해진 의례(儀禮)에 따른 예절을 바르게 수행해야 합니다. 구천상제님께 올리는 배례로 상악천권(上握天權)과 하습지기(下襲地氣) 식으로 드리는 법배(法拜)는 물론 평배(平拜)와 좌배(坐拜)도 정해진 순서와 절차에 따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 시의 자세인 법좌(法坐)를 바르게 해야 몸과 마음이 안정될 수 있습니다. 주문(呪文)은 발음을 정확히 하고 주송(呪誦)을 온화하게 하며 다른 사람과 같이 모실 때에는 음률을 맞추고 고성이나 악성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특히 기도의 외적인 측면들은 습관처럼 굳어져 있기에 자신의 동작이 바르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임원이나 다른 도인에게 점검을 받아 잘못되었다면 바른 자세와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무엇보다 한결같은 정성(精誠)이 중요합니다. 『전경』에서 정성의 소중함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이선경의 장모를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49일간 정성을 들이기로 한 상제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목욕재계를 하며 매일 떡 한 시루씩 쪄서 상제님의 공사(公事)를 받들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굳은 결심으로 이 일을 시작했지만, 여러 날이 계속되자 점차 심신이 괴롭고 힘들어서 그만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아궁이에 한 짐의 나무를 다 때었지만 아무리 해도 떡이 익지 않았습니다. 몹시 당황한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 그녀를 불러 훈도(薰陶)하심으로써 잘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이선경의 장모는 풀어졌던 성심(誠心)을 다시 다잡고 한결같은 정성을 드려 49일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오색채운이 하늘에 서린 것을 가리키시며 그녀의 정성이 신명에게 사무칠 만큼 상제님의 공사에 기여했다며 치하하신 것입니다.02

 

이와 같은 예를 보듯이 매일 반복되는 기도에는 더한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결같은 정성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의 단전(丹田)이 연마(鍊磨)됩니다. 예로부터 사람의 몸엔 상단전·중단전·하단전, 이렇게 세 군데의 단전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도(道)에서 말하는 단전은 이 셋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나 공부, 수련 시에 의례적이나 형식적이 아닌 성지우성(誠之又誠)일 때 자연히 하단전부터 시작되어 중단전 상단전이 연마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는 마치 솥에 물을 넣고 불을 때어 떡을 찌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여기서 ‘연마’의 사전적 의미는 고체의 표면을 다른 고체로 갈아서 평평하고 미끄럽게 하거나 학문이나 기술을 연구하고 닦는다는 뜻입니다. 이 연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 ‘마저성침(磨杵成針)’이란 고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쇠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전경』에도 나오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李太白, 701~762)과 어느 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태백이 산에서 공부하다가 싫증이 나서 그만 포기하고 하산할 때, 작은 시내에서 쇠 절굿공이를 갈고 있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가 노인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노인은 쇠 절굿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었던 이태백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이 정진이 토대가 되어 나중에 시선(詩仙)이라 불릴 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중국 최고의 시인이란 평가를 얻었습니다. 이 고사에서 보듯이 자신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각고의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 시에 요구되는 정성도 이처럼 한결같아야 심신이 연마되고 이로써 정신개벽(精神開闢)과 인간개조(人間改造)가 되어 갑니다. 이 도중에는 소위 ‘마(魔)’라고 불리는 게 발동하여 반드시 싫증·나태·회의·신고(身苦)와 같은 어려움을 누구나 겪게 됩니다. 이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모든 일에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과정에는 반드시 장애가 있으니 이것을 겁액(劫厄)이라고 한다. 겁액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데 성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많은 사람이 이 겁액에 굴복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데서 탈선이 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앞길을 막아 버리는 사례가 많다.”03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완성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잘 참고 이겨내며 한결같은 정성으로 기도를 모시는 일입니다.

 

수도의 목적인 영통의 통일은 누구나 염원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자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나의 심신이 상제님의 말씀과 뜻에 적중(適中)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며 정해진 법방(法方)과 도법(道法)을 준수해 나가야 합니다. 기도의 내·외적인 측면인 마음 가짐과 자세를 바르게 간직하고 성지우성으로 자신을 연마해 갈 때 비로소 상제님의 덕화와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영통의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상제님을 모시는 영시의 정신을 응집하여 단전에 연마함으로써 심신의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는, 대순진리회의 수도에서 가장 근본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참된 정성이 깃든 기도는 자신의 완성과 종단의 발전뿐만 아니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01 『국어대사전』, 민중서림, 1993.

02 행록 1장 29절 참조.

03 『대순지침』, pp.93~94.

 

<대순회보 1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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