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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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숙 작성일2020.11.15 조회4,421회 댓글0건본문
배봉3 방면 교감 김정숙
신은 우리의 말을 들음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을 내 삶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류시화 시인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여행 에세이에 나오는 제목과 문장 일부다. 가끔 난 내가 무엇을 잊고 사는지를 모르고 지내다가 이렇게 한 문장에 꽂히면 여지없이 모든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과 생각들, 과거의 모든 것을 떠올리며 자책하고 혹은 흐뭇해하며, 새롭게 경각심을 갖게 된다.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교법 1장 5절)
나의 믿음을 어떻게 보여 드릴지 알 길 없다가 물론 사강령과 삼요체를 달달 외워 어떤 몸가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는 아주 먼 타국의 수행자들이 행하고 있는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새삼스레 다시금 수도에 대한 열공 모드로 전환하게 되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1992~1994년쯤 내 나이 20대 초반일 때 사회에서 한때 독서 붐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책을 대여해주는 분이 직접 고객을 찾아가서 빌려주고 회수하는 서비스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엉겁결에 가입 신청을 해서 회원이 된 후 1년에 95권까지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많은 책 들 중에 역사소설 『광개토대제』, 『베니스의 개성상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외에도 외국 소설, 불교 서적 등등 셀 수 없이 많이 읽었지만, 제목이나 내용이 기억이 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때는 책 내용의 감동하기보다 내가 일주일에 읽어내는 독서량에 더 큰 관심이 있어서 ‘주인공이 아까 뭘 했더라?’라는 내용 파악이 안 되어도 그냥 읽어 내려갔다. 그래도 그때의 독서가 나를 꽤 인간답게 만들어 놨다고 본다.
어려서 교회를 다녔던 내가 소설일지라도 불교 관련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그때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고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어려서 배운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머리에 남아서인지 불교 서적은 거리를 좀 두게 되었다. 하지만 독서량을 채워야 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책이라면 종교를 막론하고 무던히도 읽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나를 너무 예수님만 바라보는 어린양으로 잘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내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 나온 문장 딱 하나는 기억에 남는다. 중요한 문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소화(小花)! 그날 그것이 그녀와의 인연이었다’라는 문장에서 난 ‘인연’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애달프고 슬프다는 느낌을 그때 깊이 체험했다. 소화는 무속인이었고, 1950년대 배경의 소설에서 내게 와닿았던 것은 빨갱이, 피난, 산속에서의 격전이 아닌 인연이라는 단어!
이후 내가 입도할 때도 조상과의 인연에 대한 교화를 들으면 눈물이 나고, 마음을 돌이키게 되고, 이후에 포덕사업을 하면서 선·후각이 되는 연운에서도 나를 좀 괴롭게 하는 인간관계는 끊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다 나의 인연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었다. 현시점에서 그때를 떠올리면 별 거부반응 없이 입도하기 위해 책을 통해 이미 작업을 해놓으신 조상님의 큰 그림 같기도 하다.
“삼생의 인연이 있어야 나를 좇으리라.”
이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광대한 말씀이신가! 이 거대한 천지 안의 은하 생명체에서 상제님을 따르고 천지 공정에 참여할 수 있는 인연이라는 것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이켜보면 우리는 모두 다 이런 마음일 것이다. 도문소자가 된 자신을 보면서 상제님 전에, 조상님 전에 감사할 것이고,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된 것임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상제님과 맺은 인연으로 수도를 하면서도 너무 많은 부분이 퇴색되고, 변질되었던 것 같다. ‘부패와 발효의 차이’ 부패가 되면 변질이 되고 발효가 되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모든 건 한 끗 차이다. 아직도 무수히 말로 평가하고, 말로 안다고 하고, 말로 가르치고 있다. 내가 아무리 말로 아니라고 해봤자 사람은 물론 신명도 듣지 않을 테고, 행위를 보고 신뢰를 한다는 책의 표현에 내가 마음을 뺏긴 건 또다시 조상님의 큰 그림일 것이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하니 괴질이 도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무서워지기도 하고, 도장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마음이 안심이 안 되고 다급해지니까 이제야 수도를 미흡하게 했던 것들이 떠오르고…. 이렇듯 사람은 자기가 그때는 아니라고 하지만 지나고 나면 잘못한 것이 스스로 떠오르는 것 같다.
나는 『전경』을 보면서 오래전부터 가져왔던 의문, 특히 교운 1장 13절에 나오는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을 이곳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도다”라는 내용을 아무리 애써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제님의 공사이다 보니 병욱을 순간 상제님의 권능으로 못 알아보게 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상태로 지내다가 드라마를 통해서 그 의문이 다소 해소된 적이 있다. 어느 드라마에서 차원을 넘나드는 군주가 나오고, 군주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현재 상황을 이렇게 만든 악의 축인 작은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그렇게 과거 시점을 돌려놨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현재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될 것을 알기에 군주를 사랑하는 이들은 과거로 가는 것을 만류하게 된다. 드라마라서 그런지 어찌어찌해서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터미네이터 같은 외국 영화도 나는 차원을 넘나드는 것 자체를 이해를 못 하겠는데 작가는 가능하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글을 썼고 연출을 했을 것이다.
경전의 내용과 드라마의 내용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나는 같은 내용으로 여겨지고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왜 이 내용에 내가 집착하게 되었냐면, 내가 도장에 공부방에 들어가서도 지우고 싶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가끔 있었다. 요즘 들어 영상 떠오르는 게 더 잦아진 것 같기도 하다. 충격적인 일을 겪은 시절도 아닌 단지 발표회 때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워 말도 잘하지 못했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부끄러움으로 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일 때가 있다.
많은 심리학책에서는 내면의 아이를 받아들이고 잘 다독이라고 하지만 그런 충고는 정말 뜬금없이 들린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현재의 내가 바뀌면 과거의 내가 바뀐다’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공간 차원을 넘어 과거까지 갈 필요가 없다. 현재의 나에게는 과거 그 일을 겪었던 기운이 같이 존재한다. 신체적 모습은 나 혼자이지만 기운으로는 여러 기운이 있을 수 있다. 나에게 있는 그 기운이 나인 것처럼 그때를 떠올리며 부끄러워하는 것이기에 이 내면의 아이를 잘 달래고 가르쳐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게 아닌 내가 나를 타이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나의 수심연성 세기연질 수도 연마의 기세가 뭉쳐 과거까지 여음이 미친다면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과거의 나를 그때의 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그때 어땠는지를 아예 모르거나 그때의 나를 지금 수도하고 있는 나로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김병욱 종도도 상제님 공사에 쓰이는 기운으로 바뀌었기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건 물론 과학적 근거 없는 내 개인의 생각이고 내가 내린 결론일 뿐이다. 후천에는 삼계가 다 통한다는 말씀을 현재 내 기운을 바꿔내면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생각해 본다.
수도한다는 것은 차원을 넘어 선천의 나를, 이렇게 형성된 내 성향을 바꿔내는 일이기에 아주 힘든 것이다. 상제님도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신다고 하셨기에 내가 변화되고자 갈망하면 나를 놓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 엄청난 일을 도전님께서는 간결하게 훈회와 수칙으로 말씀하셨다. 참으로 가르침대로 실천만 한다면 운수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또 새삼 마음에서 일어난다.
과거 좋았든 좋지 않았든 어떤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의 처사를 상제님 공사에 맞게 올바르게 마음을 쓴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바뀌게 될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다만 내 어리석음에 이런 원리를 너무 늦게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된 아쉬움이 있다. 나는 삼생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기에 악을 선으로 갚는 수도를 꼭 이뤄내고자 한다.
책에서 건넨 또 다른 화두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현재 위험하거나 혹은 힘든 일들을 겪는 것에 대해서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자기가 비참한 상태가 아닌 자기 소명에 맞는, 자기 정체성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일을 경험하게 해준 고마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갖가지 크고 작은 일들은 내 기세를 꺾고 나를 체념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 ‘내가 누구이고, 무슨 마음을 써야 하기에 일이 진행이 안되는가!’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그렇게 배워 나가고 알아가는 것이라면서….
내 마음 상태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 감사한 독서의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수기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앞으로 더 많은 상황을 마주함에 힘들어하기보다 현재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 차원을 넘어 내 과거로까지 가서 바꿔내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순간에서 영원이란 말처럼 현 순간이 과거 현재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각인하여 일상을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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