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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인물 이순신 :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가능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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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현 작성일2018.12.06 조회5,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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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원실 교감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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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률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1장 32절)

 

  상제님께서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영재(英材)라고 평가하셨는데, 충무공 이순신은 어떠한 면 때문에 상제님으로부터 그러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상제님께서는 충무공이 단순히 머리가 비상하다거나 재능이 뛰어나다는 면만 가지고 그러한 평가를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아마도 충무공이 상제님으로부터 영재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공의 생애 중 가장 고통스러웠을 기간이라 할 수 있는, 모함으로 인해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1597년 2월 26일부터 백의종군을 거쳐 명량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적의 유탄에 눈을 감던 1598년 11월 19일까지의 과정에서, 공이 품었던 한결같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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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년에 조선을 쳐들어온 왜적을 맞아 연일 승전을 거듭한 충무공은 왜적의 진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공으로 인해 조선침략에 큰 차질이 생긴 왜군은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공을 모함하여 전쟁에 나설 수 없도록 하는 간계를 꾸몄다. 왜군 소서행장의 밀명을 받은 첩자 요시라의 속임수에 빠진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나가 가또의 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린다. 공은 이것이 왜군의 간계임을 파악하였지만, 임금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 출군하여 험난한 바닷길에 나서야만 했다. 
  공은 왜군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하여 신중한 군사 작전을 펴야 했는데, 조정은 이에 대해 공이 의도적으로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왜군 함대를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에 갖은 모함까지 더해 드디어 조정은 공을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에서 해임시키고 1597년 3월 4일 투옥시키고야 만다. 
  공에 대한 혐의는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으며 바다에서 가또의 부대를 요격해서 적장의 머리를 바치라는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가 내린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에는 “법률대로 하면 이순신의 죄는 사형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마치 남의 나라 신하처럼 제 임금을 속였으니 반드시 사형에 처할 것이고 결코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순신을 심문하여 그의 반역 사실을 분명히 알고자 하니 어떻게 심문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상의하게 하라.”고 적혀있다.

  조선시대의 심문이란 죄에 대한 증거를 확보한 후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증만 가지고 고문을 통해 죄를 만들어 내는 고문수사가 관행이었고, 그 고문의 과정에서 생명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선조의 지시 내용은 공에 대한 사형 집행을 합리화하기 위한 요식 절차를 거치는 수순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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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함으로 압송되는 충무공(아산 현충사 소장)

  

  공이 문초를 당하자 우의정 정탁(鄭琢, 1526~1605)은 신구차(伸救箚, 죄 없음을 굽어 살펴 달라는 상소문)를 선조에게 올린다. 전시(戰時)에 충직한 장수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정탁 등의 간절한 구명운동과 공을 죽임으로써 전쟁이 불리해 질 수도 있다고 고민하던 선조는 1597년 4월 1일, 공을 하옥한 지 28일만에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단서를 붙여 석방한다. 
  고문으로 상한 몸을 이끌고 공이 처음 머물게 된 곳은 남대문 밖에 있는 생원 윤간의 종집이었다. 이것은 공의 신분이 종과 같으니, 종과 같은 생활을 하고 근신하라는 뜻이었다. 공은 그날 『난중일기』에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라고 적었다.


  공은 백의종군을 위해 4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합천 초계에 있는 권율 장군의 막하로 떠났다. 그런데 며칠 후 여수에 계시던 연로한 어머님이 공을 보기 위해 아산으로 오시던 도중 배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공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남편과 세 아들을 먼저 보낸 분 이었기에, 공은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각별한 효심으로 전란 중인 1593년 1월 전라좌수영이 있던 고음천(현 여수시 학동 송현마을)에서 어머니를 모셨던 것이다. 공이 그토록 효성을 다하려 했던 어머니는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아산으로 돌아오다 기력이 소진되어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야 만 것이었다. 그 상(喪)중에도 금부도사의 서리가 찾아와서 백의종군의 길을 재촉하였고, 공은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공이 적은 일기 내용을 잠시 소개해 본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訃告)를 전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靈前)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이 대목에 이르면 ‘참으로 그 당시 선조와 조정이 공에게 하는 처사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라는 단순한 역사의 재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당시 권력층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어렵다. 공은 나라가 국방에 전혀 무관심할 때도 오직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공은 적을 섬멸하는 전투 지휘뿐 아니라 군수·병참·보급·징모·부상자 처리에서부터 전함 제작·화포 제작·탄약 생산·농경·제렴에 이르는 전쟁의 모든 국면을 스스로 해결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고작 공에게 수군통제사라는 지휘권만을 인정해주고는, 오히려 궁중용 소비물품(종이, 훈련용 총포와 화살)까지 요구하던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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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의 일들을 기록한 『난중일기』. 전 7책 부록 1책으로 되어있다.

  

  망국으로 치닫던 전쟁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해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했고 나라와 백성을 건지려는 공의 마음은 한시도 변함이 없었거늘, 돌아오는 것은 죄인 취급과 목숨을 잃을 뻔한 모진 고문,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백의종군 길에 올라 관노의 비좁은 방을 빌려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공은 이를 단지 서글프다고만 표현하고 있지만, 세상 천지에 장군 같은 사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공이 모함받은 때를 틈타 공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소모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무모한 작전으로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하니 수군은 괴멸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급함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다시 공을 통제사로 임명, 적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공이 임지에 도달하니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병력으로는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공은 “저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비록 소장이 미천하오나 아직은 죽지 않았습니다.(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장계를 올렸다. 당시의 상황을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97년(丁酉年) 9월 15일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陣)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옮겼다. 벽파정(碧波亭)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숫자가 적은 수군(水軍)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으며 또 이르되,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법으로 다스려서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또 『난중일기』를 보면 그때 공이 오한, 식은땀, 두통 등 병고에 시달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아마 고문은 공의 건강을 크게 훼손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수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해협에서 133척의 일본군과 대적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으로 잃어버린 제해권(制海權)을 탈환하고 일본의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와해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왜군이 철수하려 하자 공은 마지막 결전을 시도하여 11월 18일 노량(露梁)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장군도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그때 나이 54세였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공의 유언에 따라 장군의 죽음은 발표되지 않았고, 군사들은 끝까지 싸워 적에게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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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해전의 모습

  

  훗날 선조는 제문에서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며 애통한 심정을 토로했고, 정조는 손수 지은 「충무공신도비문」에서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의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나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쓴다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사령관 도고헤이하치로는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자신이 처한 모든 악조건과 정치적 불운을 모두 ‘현실’로 받아들였다. ‘현실’에 개인의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고, 현실을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였다. 그래서인지 『난중일기』에는 자신에게 가해진 고문과 관직 삭탈, 정치적 음모와 박해 등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또한 나라가 자신을 버렸지만, 공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며 거기에 대한 그 어떤 권리도 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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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의 묘소 (아산군 응봉면 어라산 소재)

 

  어찌 소인된 자가 상제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상제님께서 공을 영재라고 평가하신 이유는 아마도 공이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결같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그 불굴의 의지 때문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명량해전! 그것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포기하려던 것에서 이루어 낸 기적과도 같은 값진 승리였다. 기적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 “될 일을 못 되게 하고 못 될 일을 되게 하여야 하나니…”(교법 3장 28절)라고 하신 상제님 말씀처럼, 우리도 수도과정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올바르게 상제님의 뜻을 받들고자 한다면, 결코 불가능이란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 앞선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잘못에 분노하기보다, 우선 나 스스로가 그 잘못을 또다시 반복하고는 있지 않은가 돌아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그때의 선조와 조정 간신들이 공에게 했듯이, 우리 역시 권위만을 내세워 수반들을 억누르고 수반들의 공을 무시하는 등 그들을 이용하고만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대순회보>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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