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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마주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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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남우 작성일2019.12.24 조회5,6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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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5 선무 이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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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대표작 ‘세한도’ 그리고 ‘추사체’,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대표작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여유당전서』,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브스키(Bronislaw Malinowski, 1884~1942)가 1923~1924년에 걸쳐 발표한 ‘심리학과 저술들’. 이들의 공통점은 유배지에서 나온 대 걸작이란 점이다. 인생을 바꿀만한, 그 인생의 대표가 될 만한 정수의 역작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유배의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이끌고 발현하게 만든 것일까?

 

추사 김정희는 정치적 이유로 두 번에 걸쳐 9년의 유배 기간을 보내게 된다. 추사의 유배는 단지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이다. 죄인을 탱자나무 가시로 둘러싼 담에 가두고 바깥으로 못 나가게 한 가택연금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제주도가 멋진 관광지라 하나 200년 전만 해도 육지와 가장 멀리 떨어지고 외진 곳을 상징하는 섬이라서 죽음을 염두에 두고 가는 길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1년도 버티기 힘겨운 유배 생활 중에 추사는 특유의 필체인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고, 추사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다.

 

고산 윤선도는 20여 년의 유배 생활, 20여 년의 은거 생활, 10여 년의 관리 활동이 그의 50년 총 관직 생활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산의 작품 상당수가 은거와 유배 생활 중에 만들어졌다. 얼마 전 JTBC의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에 대해 다뤘던 내용이 기억난다. 조선 시대 인물 중 고산은 유난히 찾아보기 힘든 고난과 역경의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정도 유배 길에 오르면 신세를 한탄하며 어둡게 지낼 만도 한데, 오히려 그는 보길도에 그만의 생활중심지를 만들어 유유자적하고, 심지어 정자에 온돌을 만들어 겨울에도 언제든 풍류가 가능하게도 했다고 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며 자족한 마음으로 살았으리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그러한 마음에서 나온 것 아니겠는가. ‘오우가(五友歌)’ 역시 다섯 벗을 노래한 것인데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의 덕을 예찬한 시조이다. 삶에 대해 좀 더 여유를 갖고 관조하는 자세를 지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다산학의 총체이자 유배기 18년간 진심갈력했던 학문연구의 축적물이다. 다산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500여 권의 저술을 집대성하여 총 7집 154권으로 편집한 문집이다. 다산이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유배 갈 당시 셋째 형 정약종은 죽임을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 역시 유배 가게 되면서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본인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상실된 것은 물론이고 초기 유배 생활에서도 천주교도라 해서 주변 사람들의 배척이 심했다고 한다. 18년간의 긴 유배 생활 동안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역경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그의 마음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5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책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남길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하다.

 

이후 다산은 유배가 풀리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좌절하는 대신, 학문연구에 정진했는데 청나라 고증학파, 경학 이론, 일본의 학문까지 섭렵하였고, 유배 생활의 고통을 학문으로 승화함으로써 ‘악조건에서 자아를 완성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그의 학문의 업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고난의 시기에 맞선 그 ‘마음의 힘’에 집중해 말하고 싶다. 긴 유배 생활은 그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 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될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인류학자 말리노브스키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류학자로 손꼽힌다. 말리노브스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이유로 파푸아뉴기니 동쪽의 키리위나라는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이곳에서 그는 직접 원주민들과 살을 부대끼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3년 가까이 그들 문화를 밀착 조사했다. 요즘 시대야 현지 조사가 자연스럽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만 해도 현지에 텐트를 치고서 거리를 두고 관찰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당시 생소했던 ‘현지 조사’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러면서 얻은 인류학 연구물 중 심리학과 관련된 저술들을 1923년~1924년에 걸쳐 발표하였다. 이것은 당시 심리학계의 거장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도전장을 내밀며 엄청난 학문 성과를 밝힌 것이었다. 그저 폴란드 변두리 출신의 이름 없는 학자가 말이다. 요컨대 인류학이 유배된 자에 의해 태동한 것이다.

 

유배 기간은 고독하고 슬프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저들의 시련을 마주한 자세에서 보다시피 놀랍게도 유배 기간은 상처와 트라우마와 아픔 등을 승화시키고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사까지 바꿀 힘이 된다.

 

다리를 다친 뒤로 나의 요즘 삶은 추사 김정희와 감히 비교할 순 없지만, 마치 유배당한 것 같은 몇 달간의 가택연금형이다. 그동안 시간이 되지 않아 꿈에만 그리던 금강산 연수를 참여하지 못했는데, 간신히 시간이 되어 참여를 며칠 앞두고 설레던 그때, 그만 불미스러운 일로 다리를 다쳐 수술까지 하였다. 그리고 깁스를 풀 때까지 집 밖으로 못 나가고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생활이 5개월여다. 돌아보면 직장과 가정 그리고 수도 면에서 나름 바쁘게 살아왔던 거 같다. 또 바쁘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이라 알고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다리를 다치고 거의 기어 다니는 수준이 되다 보니 화장실을 간다거나 집안에서 원하는 곳으로 불과 몇 미터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그동안 힘겨웠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여러 현상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마음도 너무 괴로웠다. 그래도 다행히 늘 심고 드려온 것이 있어서였는지, 어느 날 『전경』을 읽고 유튜브 강의를 검색하다가 갑자기 어떤 내용이 마음속으로 쑥 들어오면서 내 부족한 민낯과 마주하는 순간이 왔다. ‘아!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던 내 탓이구나, 내가 그동안 참 이기적인 성향을 많이 갖고 살았구나, 수도 사업을 하면서 내가 선·후각에 대해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이 참 많았구나!’라는 각성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내가 뿌리고 다녔던 행동과 말, 피해의식, 불평하는 마음들 모조리 다 부끄러워졌다. 아무도 없는 허공이지만 공기마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귀까지 붉어졌다.

 

이렇듯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면 스스로 뭐가 잘못되어가는지 모른 채, 바쁜 삶에만 열중하며 살았을 것 같다. 운수 마당에 가면 모든 게 밝아진다고 하던데 그때 가서 내 민낯에 부끄러워하고 후회로 괴로워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바쁜 게 열심히 잘 사는 거라 여기고, 그러다 고통이 오면 그 상황을 넘기기에 급급하며 살았다. 근본적으로 고통이 오는 건 내 내면에서부터 기인한 게 상당수이고 삶에 대한 나의 처세와 성향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나를 바꾸기보다 밖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였고, 나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상황만 극복하려는데 연연해서 무조건 참기만 했으니 당연히 괴로움을 자초한 삶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이 시련은 어떤 형태로든 필연이었다. 평소 너무 바쁘게 살아서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는데, 다리를 다치면서 어쩔 수 없이 모든 활동을 쉬고, 조용히 독서와 사색을 많이 하고 있다. 기도도 예전보다 많이 모시게 되면서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고 보인다. 어떤 날은 나도 놀랄 만큼 뭘 해도 영감이 연달아 떠올라 계속 메모하기 바빴다. 그러면서 지금의 나는 이 시련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지만 분명 지금의 나에겐 꼭 필요한 과정이라 수긍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내 수도의 문제를 보게 해 주신 상제님의 덕화에 감사드렸다. 덕화가 꼭 좋은 일로만 오리란 법이 어디 있겠나. 화복이라고 했다. 내가 정말 도에서 성공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시련과 역경을 어렵고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시련은 내 문제를 보게 해 주고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나오게도 해 주었다. 떫은맛의 풋과일을 푹 익어가게 성숙시켜 주는 마법이다. 일례로 추사 김정희에 대한 재밌는 일화를 들면,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화암사에서 공부하는 등 불교에 일가견이 있었고 당대 최고의 명필을 자부하던 터여서 유배 가는 길에도 기세 당당하게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그는 대흥사에 걸린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글씨를 보고는 “저런 촌스러운 글씨를 달고 있느냐?”며 글씨를 써서 바꿔 달게 한다. 그때 써 준 글씨가 ‘무량수각(無量壽閣)’이다. 원교는 동국진체의 대가로서 우리 고유의 필체가 담긴 향색(鄕色) 짙은 글씨를 썼다. 당시 신문학과 신예술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던 청나라에 들어가 뛰어난 학자들과 교류한 진보 지식인 추사는 ‘촌스러운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9년여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라며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 것을 정중히 청한다.

 

추사가 유배 가면서 썼던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 글씨와 유배 살이 7년째에 쓴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 글씨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전자는 한껏 멋을 부려 쓴 태가 난다. 후자는 골격이 드러난 태로 좀 더 단단함이 느껴지며 명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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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대흥사 이광사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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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유배 전 대흥사에 남긴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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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유배 중 화암사에 남긴 글씨

 

9년간의 유배 생활에 겪어야 했던 혹독한 시련과 그 시간이 주는 삶의 깊이가 그의 눈을 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맞춰 글씨도 완성케 했다. 이에 대해 유홍준 교수는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뤄졌다고 외로운 유배 생활 9년에 걸쳐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체득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영광의 중국 북경 길 대신에 아픔의 제주도로 갔기에 오늘의 추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어떠한 마음의 변화와 성숙으로 추사체를 이루고 눈을 뜨게 된 것일까? 조선 시대, 한 문인의 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 전과 같지 않게 보이는 것은 분명 내면 성숙의 힘이다. 나는 여기서 “시련을 극복하자!”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처음부터 시련을 마주하는 그 ‘자세’에 돋보기를 놓고 시작했다. 시련과 역경은 모두가 꺼리고 누구에게나 괴롭다. 그러나 어렵고 나쁘게만 보는 부정적인 자세를 벗어나 가슴을 활짝 열어서 밝게 보는 긍정적인 자세를 갖자는데 목소리를 내고 싶다.

 

나는 도자기이자 명검이고 누에이다. 그것은 전부 과정의 조건이 필요한데, 도자기가 되기 위해선 1,200도의 가마 불이 필요하고 명검에는 물과 불에 담금질하기를 1,000일에 1,000번 반복되는 단련이 필요하며 누에는 익은 누에가 되는 1령에서 5령까지의 성장마다 허물을 벗는 조건이 필요하다. 이쯤 되면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힘든 과정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자세가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누군가가 “부정적 습관은 모든 기회 뒤에 숨어있는 하나의 문제점을 굳이 찾아내고, 긍정적 습관은 많은 문제점 속에 감춰있는 하나의 가능성 불씨를 잡고 크게 키운다.”라고 했다. 『전경』 교법 1장 11절에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는 말씀은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것 같다. 풀이하면, ‘나쁘다고 제거하고자 하니 풀이 아닌 것이 없고, 좋아하여 취하고자 들여다보니 모두가 꽃이로다.’라고 해석된다. 그것이 상황이든 사람이든 같은 대상이라도 나의 마음가짐이나 생각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말씀이다. 긍정적 마음에서 나오는 자세가 문제 해결에 바람직하다는 말씀 같다.

 

더구나 우리는 긍정적 자세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풀리는 이치에 관해서도 공부해 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구절 『전경』 교법 3장 12절을 보면,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크게 다친 공우가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한다. 이에 상제님께서 그에게 과거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척이 되어 닥친 일임을 알려주시며 오히려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하신다. 이에 그는 미워하는 마음을 풀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가해자를 은인처럼 잘 대해줘야겠다고 마음먹자 상황이 잘 풀린다. 나도 내가 겪는 일들에 대해 상제님께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시고 보여주신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스스로 공우의 사례를 보며 깨우치고 수도해야 하는 것이 내 몫인 듯하다.

 

심우도의 6폭 중 가장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드라마로 연출하자면 가장 시청률이 높을 것 같은 장면은 ‘면이수지(勉而修之)’가 아닐까 싶다. 비바람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길은 끊겨 도와주는 이 하나 보이지 않는 그림이다. 인생에 그 순간만 멈춰보면 그때가 가장 괴롭겠지만, 주인공의 내공은 거기서 길러진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케 하고 성숙시키는 길이 천둥·번개 속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이해한다. 물론 나도 살면서 아직도 부정적 습관을 겉옷처럼 입고 있는 사람이라, 긍정적 자세가 쉽진 않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못 할 건 아니라고 외치며 이글을 마치려 한다.

 

상제님의 덕화 속에서 시련이 풀리는 이치를 믿고 긍정과 감사의 자세로 시련을 마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자의 정성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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