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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을 위한 최고의 명절 잔치, 호미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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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승훈 작성일2018.08.22 조회2,6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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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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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에서 즐기듯 일하는 법을 배우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능가하는 자는 ‘즐기면서 일하는 사람’이다. 죽을 둥 살 둥 일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일에 지쳐서 제 풀에 꺾이지만 즐기듯 일하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회사들이 직장인들에게 권장하는 방식도 이러한 것들이다. 즐기듯 일해야 생산력과 품질이 좋아지고, 직원들의 사기와 창의력도 최고조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즐기듯 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노동의 과정 속에서 즐거움과 재미를 느낀다는 것으로 집중력은 높아지고 피로도는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노동 강도가 강화되고, 생산이 분업화·개별화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처럼 즐기듯 일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 농업사회에서는 즐기듯이 일하는 생산 시스템이 있었으니 바로 ‘두레’라는 농업조직이었다. ‘두레문화’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큼 두레는 농민들의 단순한 협업 모임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문화적 관습들을 파생시켰다.

 

두레 조직에서는 풍물(농악)과 장단, 노래와 가락에 맞춰서 농사일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풍물과 노래에 맞춰서 집단적으로 일하면 힘도 덜 들고 노동의 피로도 줄어들었다. 19세기의 인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열 폭의 『풍속도병(風俗圖屛』에서는 두레 조직의 즐기듯 일하는 문화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 가운에 여름 풍속도를 보면 김매는 여성들의 아래쪽에 꽹과리, 장고, 소고, 날라리를 든 풍물패들이 흥겹게 놀고 있다. 그림의 제일 하단에는 지팡이와 장죽을 든 양반과 아이들이 농민들을 지켜보며 서 있다. ‘땀 흘려 일하는 논밭에 웬 농악패들이 있을까?’하고 의문스러워 하겠지만 이러한 풍물패들이야 말로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주며 생산의 효과를 높여주는 두레의 일원들이었다.

 

그런데 두레가 싹 틔운 또 하나의 놀이문화가 있어 주목된다. 바로 ‘호미씻이’이다. 밀양백중놀이, 송파백중놀이 등과 같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백중놀이’라고 이름 짓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들은 모두 두레문화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호미씻이나, 백중놀이나 모두 김매기를 끝내고 가을걷이로 나아가기 전에, 생산과정의 변화를 맞이하여 농민들을 위로하고 힘을 재충전하는 잔치였다.

 

◈ 고양 농민들의 잔치, 송포의 호미걸이

 

내 어렸을 적 기억 속에 경기도 고양시 일산은 넓은 벌판이면서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80년대 서울역에서 경의선을 타고 가다 내리면 젊은이들이 애용하는 술집들이 간간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일산의 대화동에는 ‘송포’라는 넓은 벌판이 있다. 송포의 농민들은 한강이 만들어낸 비옥한 토양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고, 그 가운데 ‘호미걸이’라는 농민문화를 이뤄냈다. ‘고양송포호미걸이’는 송포 농민들의 연희 문화로서 그 보존 가치가 높아 1998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 22호로 지정되었다. 

 

‘호미걸이’란 낱말은 도시 속에서 살면서 농기구조차 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매우 생소한 용어이다. ‘호미걸이’는 ‘호미씻이’와 같은 말로서 한해의 농사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농사에서 사용했던 호미를 씻어서 걸어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양송포호미걸이’는 음력 칠월 칠일인 ‘칠석’부터 칠월 보름인 ‘백중’ 사이에 행해지는 놀이이다. 호미씻이는 고양의 송포뿐만 아니라 전국에 퍼져 있는 농민문화이며, 농사일 중 가장 힘든 노동인 김매기를 끝내고 농민들이 함께 모여서 즐겁게 노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지역마다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호미걸이(경기도), 두레먹기(충청도), 술멕이·풍장놀이·장원례(전라도), 풋굿(경상도), 질먹기(강원도) 등의 명칭으로 불려졌다.

 

그런데 ‘고양송포호미걸이’는 매년 연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농사가 잘 될 것 같다고 판단되는 해에 행해졌다고 한다. 아마도 농꾼들의 잔치인 호미걸이에 많은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일례로 1936년 8월 28일자 『조선중앙일보』를 보면 “15일부터 오늘까지 논산군내 15면 180리에서 두레술로 먹은 것이 무려 2,715말에 달한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엄청난 두레술은 호미씻이와 같이 두레를 위하여 벌인 잔치에서 먹은 술이다. 이러한 두레술뿐만 아니라 1년 중에서 가장 많은 음식들이 농부들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흉년 시에는 큰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송포의 호미걸이는 먼저 마을에서 모시는 수호신인 도당나무에 제를 올리는 의식부터 시작된다. 호미걸이를 하는 날이면 기를 앞세우고 길군악을 치면서 뒷산인 도당산(都堂山)에 올라가 풍년을 기원하는 산상제(山上祭)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로 다시 내려와서 여성들끼리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고사를 하고, 이웃 두레패들을 불러서 대동놀이를 한다. 대동놀이에서는 후배 두레가 선배 두레에게 기(旗)로써 절을 하며 예를 표하는 ‘기세배’를 한다. 또한 갖은 재주를 부리고, 호미걸이 소리를 부르며, 모두 어울려서 춤을 추는 등 그야말로 대동놀이의 진수가 펼쳐진다. 대동놀이를 마치면 두레패가 집집마다 풍물을 치고 도는데, 집주인은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여 집안마다 한바탕 흥겨운 잔치가 이어진다.

 

◈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시로 읊은 ‘호미씻이’

 

조선시대의 사료에서는 호미씻이를 ‘세서(洗鋤), 세서연(洗鋤宴), 세서희(洗鋤戱)’라고 기록하였다. 이 세서희는 이앙법(移秧法)의 역사와 연대하여 발전하였으니 조선 후기 벼농사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앙법’은 못자리에서 어느 정도 모를 키워서 논에 옮겨심는 모내기법으로서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농법이다. 이 이앙법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크게 확산되었다. 이앙법이 널리 퍼지면서 집약적인 노동이 요구되어 두레조직이 생겨났고, 고된 제초작업인 김매기를 모두 끝낸 이후에 두레를 위한 호미씻이를 하게 된 것이다.

 

호미씻이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 시들해졌으나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최고의 명절로서 산업화 시대 이전까지 전승되어 왔다. 농민의 수고를 풀어주는 호미씻이는 흥겹고 질펀한 잔치였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장가인 계곡 장유가 적은 ‘호미씻이’라는 시에서도 흥겨운 농민잔치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 앉자마자 사방에서 꽃 피우는 농사 얘기, 저쪽은 이쪽보다 김매기가 늦었다느니, 아랫배미가 윗배미보단 벼가 더 잘 됐다느니, 청년들이 잔을 돌리자 노인들 거나해져, 짧은 옷소매 일어나서 춤도 절로 덩실덩실, 일 년 내내 고된 농사 이날 하루 즐거움, 농촌 들녘 오늘만은 모든 근심 잊으리라… ” 이 시는 현장 답사기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장유는 시골에 살면서 눈으로 직접 호미씻이를 확인했기에 이를 시로 기록한다고 하였다. 그는 호미씻이를 농가에서 김매는 일을 다 끝내고 나서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호미씻이를 백중(百中)에 맞춰서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백중의 풍속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원래 백중은 농민을 위한 명절보다는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명절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백중일은 5대 명절 중의 하나로서, 죽은 조상들을 위한 우란분재(盂蘭盆齋)를 베풀고,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억불정책이 심화되면서 백중 행사가 축소되었고, 대신 농가의 축제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농사책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는 “백종(百種)은 7월 15일이다. 농가에서는 제초를 완료하고 술을 마시고 함께 즐기니, 이를 세서희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역시, 농촌 지식인 우하영(禹夏永)이 저술한 『천일록(千一錄)』에서도 “매년 7월 보름에 농가의 남녀들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노는데 이를 세서연이라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백중은 ‘불가(佛家)의 명절’보다는 ‘농가(農家)의 명절’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 머슴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날

 

호미씻이에서는 농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먼저, 마을에서 농사를 제일 잘 짓는 상일꾼을 뽑는 ‘장원례(壯元禮)’는 농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의식이다. 이 장원례는 현재 최고의 기술 장인인 명장(明匠)을 선정하듯, 제일 일을 잘하는 농사꾼을 뽑아서 농민의 본보기로 삼는 것이다. 장원례는 농업사회에서 농사를 장려하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도모하고자 하는 풍속이다. 상일꾼이 된 농민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풍성한 음식으로 차려진 큰 상을 받게 되며, 짚으로 만든 삿갓을 머리에 쓰고 소를 타고 돌아다니는 영예를 안게 된다.

 

두레의 신입 회원으로 인정받는 ‘진세턱’도 이날 벌어진다. 진세턱은 청소년들이 두레패에 가입하여 장정 대접을 받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두레에 가입해야지 정식 농사꾼으로서 인정받고 성인으로서의 품을 받을 수 있다. 장정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만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때 농사꾼으로서 힘든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을의 정자 아래에 있는 들돌을 힘껏 들어보는 ‘들돌들기’를 한다. 두레의 신입회원이 기존 회원들에게 술을 거나하게 대접하는 회식도 겸한다. 요즈음의 직장에서 하는 신고식과 마찬가지로 두레의 새내기가 된 후배가 선배들을 위하여 한턱 쏘는 것이다.

 

그러나 호미씻이의 백미는 역시 주인들이 농사를 짓는 머슴들을 위하여 베풀어 먹이는 행사이다. 호미씻이를 ‘머슴의 설’, ‘머슴의 명절’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머슴들에게 새 옷을 지어주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하루를 잘 놀게 한다. 같이 밥을 먹을 때에도 머슴에게 상석을 내어주고 주인은 말석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주인은 고생하는 머슴을 위하여 머슴의 역할까지 한다. 고된 과정인 김매기를 마친 머슴들을 위하여 이날만큼은 주인들이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도 호미씻이 날에는 양반과 머슴의 신분을 뛰어넘어, 생산자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농민을 위한 명절 잔치인 호미씻이는 이모저모로 오늘의 사회에 귀감이 될 만하다. 일과 놀이가 하나로 뭉쳐진 두레의 관습도 그렇지만 노동과 생산의 현장에서 땀 흘리는 백성들을 받드는 자세는 현대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들이 되새길 만한 정신인 것이다.

 

 

 

* 필자소개

유승훈 :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민중 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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