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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물놀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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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승훈 작성일2018.07.01 조회2,4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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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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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수욕장에서 떠올린 유두(流頭)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바다가 생각나는 7월이 돌아왔다. 바캉스의 달인 7월에 항상 집중 조명을 받는 곳은 바로 해수욕장이다. 우리나라 해수욕장을 상징하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은 이미 6월부터 개장을 하였다. 개장 시기를 이렇게 앞당긴 적은 예전에 없었다. 이유는 해마다 피서객이 증가하기 때문이라 한다. 여름철에 이 해수욕장을 다녀간 사람이 천만이 넘는다. 이로 볼 때 해수욕장의 물놀이는 현대인의 대표적 놀이로 등극했음은 이견이 없을 터이다. 헌데 여름의 해수욕장은 말 많고 탈 많은 곳이다. 그야말로 7~8월의 해수욕장은 영욕으로 점철된 난장(亂場)으로 변한다.

 

선조들에게 7월의 물놀이는 어떠했을까? 물놀이가 세속에 물든 현대 사회에서 선조들의 물놀이는 시원한 귀감이 될 만하다. 먼저 물이 상징하는 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 사람들에게 물은 신성한 물질이었다. 물은 생명이 탄생한 신비스러운 모태로서 재생과 불변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각종 의식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때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이 된다. 물은 부정을 가시게 하면서 할머니의 기도를 들어주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물에 신성한 힘이 들어 있다는 의식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전통이 아니다. 각 종교에서 물을 뿌리거나 물로 목욕하는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물이 오염을 정화하는 물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신성한 물이 불볕더위에 지친 백성들을 더욱 시원하게 해주는 날이 있었다. 바로 유두(流頭)날이다. 현대인들에게 낯선 세시일이지만 1970년대까지도 유두일을 즐기는 인파가 꽤 많았다. 음력 6월 15일인 유두(流頭)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을 줄인 말이다. 이것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머리를 감는 이유는 동쪽이 청(靑)을 상징하고, 양기가 왕성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양기가 왕성한 동쪽 방향으로 머리를 감음으로써 부정을 가시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유두음(流頭飮), 머리 감고 술 마시는 잔치

 

유두는 원래 경주에서 전해진 신라의 풍속으로 생각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경주의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고 을 하는데 이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이를 두고 “신라(新羅)의 풍속은 매년 유두절(流頭節)에 물가에서 계음하였던 것으로 우리나라의 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하는 은 유두연(流頭宴)을 말한다. 계음은 유두일에 벌어지는 잔치로서 단순히 머리를 감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행사를 벌였던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유두연’을 유두음(流頭飮)이라고 하였다. 즉 ‘명종 15년 6월의 병인일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함께 광진사에 모여서 유두음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유두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풍속에는 6월 15일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음으로써 좋지 못한 일을 제거한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이것을 유두음이라고 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사』에서는 유두에 머리를 감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고 즐겼으므로 유두음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민간에서는 유두날을 맞이하여 천신(薦新), 즉 그 계절에 난 새로운 음식을 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지냈다. 유두 무렵에는 참외, 수박과 같은 햇과일이 나는 시절이므로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 감사하는 것이다. 농사가 잘 되라고 농신제(農神祭)를 지내기도 한다. 찰떡을 논둑 밑에다 두고 농사가 잘 되기를 빌었다. 농신제를 용제(龍祭)라고 부르는 지역도 있다. 경상북도에서는 용제의 제물로는 기름이 들어가야 한다고 여겨 시루떡을 기름에 부치고, 호박전을 지져서 올렸다.

 

 

◈ 유두에 시원한 물맞이 하러 가자.

 

그래도 유두의 진미는 역시 물이다. 유두를 이두(吏讀)식으로는 ‘소두(梳頭)’, ‘수두(水頭)’로 표기하였다. 수두란 ‘물마리’인데, ‘마리’는 ‘머리’의 옛말로서 풀어쓰면 곧 ‘물맞이’가 되는 것이다. 유두날에 물 맞으러 잘 가는 장소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정릉계곡, 사직단이 있는 황학정 근방, 낙산 밑 등이 백성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유두일에는 여성들이 앞장서서 물맞이를 즐겼다. 끼리끼리 시원한 계곡에 모여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유두에 시원한 물을 맞으면서 더위를 식히는 것을 ‘물맞이’라고 한다. 그런데 물맞이도 다 같은 물맞이가 아니라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평남에서는 폭포수가 있는 곳, 특히 맑고 깨끗한 물이 쏟아지는 곳을 찾아서 물맞이를 하였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물맞이를 ‘냉청 맞으러 간다’고 하였다. 냉청은 차갑고 깨끗한 물이란 뜻으로 이러한 냉청수를 맞으면 한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경남에서는 여름에 땀띠나지 말고 건강하게 보내라는 뜻에서 약수터를 찾았다.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몸도 씻으며, 폭포에 가서 떨어지는 벼락수를 맞기도 하였다. 이것을 ‘약물맞이’라고 하였다.

 

물맞이 가운데 주류(主流)는 역시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을 머리로 맞는 것이다. 시원한 물이 머리에 쏟아져 온몸을 적시면, 한 여름의 더위가 금방 가시게 된다. 유두의 물맞이를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이러한 풍경이 담겨져 있다. 민간에서는 유두에 하는 물맞이는 부정을 가실 뿐만 아니라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였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을 맞으면 신경통, 냉병, 속병, 허리병 등에 걸리지 않고 한해를 잘 보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물놀이와 달리 물맞이에 대단히 조신(操身)을 한다. 물맞이를 하기 전에 몸을 정결히 해야 한다고 여겨 비릿한 음식까지 금하였다.

 

 

◈ 《계심어비도(溪深魚肥圖)》에 그려진 천렵(川獵)

       

여름철 물놀이를 더욱 재미있게 하는 행사가 천렵(川獵)이다. 전통 사회에서 남성들이 여름철에 제일 많이 하는 놀이가 아마도 ‘물고기잡이’였을 것이다. 마을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가까운 냇가나 강을 찾아서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 먹는 풍속이 천렵이다. 이 천렵의 재미를 잘 그린 그림이 있다. 그것은 19세기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었던 유숙(劉淑)이 그린 《계심어비도》. 민중들의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물놀이 풍속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생생한 조선 후기의 풍속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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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운데에 세 명의 남성이 그물을 잡고 물고기를 몰고 있으며. 아래에는 통발과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절벽 아래에는 혼자서 재미있게 물장구를 치고 있다. 그런데 그림 왼쪽에는 선비들이 모여서 이를 구경하고 있다. 민중들은 모두 웃통을 훨훨 벗고 물속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는 반면, 한여름에 갓과 도포를 착용한 채로 지켜보기만 하는 양반의 모습이 매우 대조된다. 무더위 속에서 흐르는 땀을 참으며 체통을 지켜야 하는 양반들의 모습이 딱하기까지 하다.

 

《계심어비도》에 그려진 천렵은 여름을 즐겁게 나는 대표적 물놀이였다. 천렵은 고대의 고기잡이 습속에서 유래하여 백성들의 물놀이로 이어졌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1년 12달 동안 농가에서 할 일을 읊은 것인데 천렵 풍속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노래에서는 “앞 시내에 물이 줄었으니 물고기를 잡아 보세, 낮이 길고 바람이 잔잔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그물을 둘러치고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내어 편평한 바위에 솥을 걸고 솟구쳐 끓여 내니, 팔진미(八珍味)나 오후청(五候鯖)이라도 이 맛에 비길 수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물을 쳐서 싱싱한 물고기를 잡고, 솥을 걸어서 매운탕을 끓여 맛있게 먹는 천렵의 풍속이 잘 드러나 있다.

 

 

◈ 사대부들의 고매한 탁족(濯足)

 

《계심어비도》에 그려진 양반들은 한 더위 속에서 갑갑해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여름을 나는 물놀이법이 있었다. 그림으로 비교해본다면 이경윤(李慶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를 들 수 있겠다. 이 그림은 생생한 풍속화가 아니라 인물들의 삶을 그린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의 하나이다. 이 고사탁족도는 동양 특유의 도가적 은일사상(隱逸思想)에 바탕을 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채로 왼쪽 발은 물속에 담그고, 오른발은 지긋이 위로 치켜들고 있다.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도인의 얼굴이 물을 통하여 깊은 이치를 깨달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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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탁족은 선비들이 더위를 보내는 여름철의 물놀이법이었다. 양반 체면에 옷을 훨훨 벗을 수는 없지만 오직 발만을 물에 담그는 것도 시원한 물놀이였다. 왜냐하면 발은 모든 신경과 핏줄이 모여 있는 곳으로 몸의 기운을 자극하는 데 중요한 신체 부위이다. 따뜻한 물에 족욕(足浴)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발이 얼마나 민감한 부위임을 알 수 있다. 탁족은 산간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더위를 쫓는 일이지만 사대부들의 정신 수양의 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올 여름은 해수욕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시원한 휴가를 보내는 것도 좋지만 선비들의 고매한 탁족으로 여름철을 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맹자』에서는 “창랑(滄浪)의 물이 맑음이여 나의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림이여 나의 발을 씻으리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물의 맑고 흐림과 같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수양하고 처신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물을 통하여 행복과 불행의 깊은 내면을 보여준 것이다. 탁족으로 물을 살펴보면, 물은 시원한 락(樂)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이끄는 도(道)의 대상인 것이다.

 

 

 

* 필자소개

 

유승훈 :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민중 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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