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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천지를 밝히는 불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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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승훈 작성일2018.05.31 조회1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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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를 나눠주던 청명(淸明)

 

아쉽게도 2006년 사라진 휴일이 하나 있다. 바로 4월 5일, 식목일이다. 주 40시간 근무제도가 도입되어 공휴일 규정이 정비되면서 식목일은 공휴일에서 기념일로 바뀌어졌다. 목재 연료가 석탄·석유로 대체되고, 벌거숭이산들이 빠르게 숲 옷으로 갈아입었기에 나무 심기 행사의 중요성이 많이 퇴색한 것이다. 그러나 식목일은 시민들에게 정말 유용한 휴일이었다. 휴일인 식목일이 청명·한식과 겹치는 날이 많았으므로 성묘(省墓)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청명과 한식에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날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고 믿었다. 즉, ‘손 없는 날’이라는 것이다.

식목일과 자주 겹쳤던 청명(淸明)은 조금 생소한, 24절기 중의 하나이다. 청명(淸明)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으로 음력 3월에 드는, 24절기 가운데 다섯 번째 절기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청명을 맞이해서 매우 주목되는 세시풍속이 벌어졌다. 그것은 임금이 문무백관과 수령들에게 불을 내려주는 행사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3월조에서는 청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 준다. 이것은 곧 『주례』에 의거하여 당과 송나라에서 각 관청에 불을 나누어 주던, 예부터 전해오는 제도를 본떠서 하는 것이다. 농가에서는 이날부터 봄갈이가 시작된다.” 이처럼 불을 새로 피워 궁전에 진상하고, 관청과 대신들에게도 나눠주는 일을 ‘사화(賜火), 반화(頒火), 개화(改火)’라 하였다.

그런데 그 흔한 불씨를 임금이 왜 나눠주는 것일까? 불과 빛이 늘 넘치는 불야성(不夜城)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예전에 불은 매우 신성하고 귀중한 존재였다. 궁궐에서 임금이 불씨를 점화하여 신료들과 수령들에게 나눠준 것은 백성들의 살림을 지피라는 상징적 행위이다. 진정한 목민의 길이 무엇인지를 각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민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00년 동안 불씨를 이어온 전남 영광의 영월(寧越) 신씨(辛氏) 종가를 떠올려보면 불씨의 진중한 의미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 불씨는 밥을 하고, 온돌을 지피고, 등잔을 밝히는 집안의 생명과 같은 존재였다. 불씨의 보존은 집안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으니 살림을 책임지는 며느리의 가장 큰 의무였던 것이다.

 

 

귀신을 쫓는 불, 화희(火戱)가 되다.

 

동·서양의 문화를 가리지 않고 불은 종교적·제의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감쳐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나라 설화에서는 미륵신이 불의 근본을 알고 있는 생쥐를 혼내주고 나서야 발화법(發火法)을 들을 수 있었다. 설화의 세계에서 불은 신이 사용하던 신성한 물질이었던 것이다. 신비한 불이 인간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은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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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불은 귀신을 쫓는 축귀(逐鬼)와 제액(除厄)의 행사에서 사용되었다. 불꽃이 일어나는 연소 장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매우 신비하게 느껴진다. 붉게 타들어가면서 밝은 빛과 뜨거운 열을 내뿜는 불은 귀신을 몰아내기에 알맞은 주물(呪物)이었다. 설 전날, 민간에서는 다락·마루·방·부엌·곳간 등 집안 구석구석에 등불을 밝혀 놓는다. 마치 대낮처럼 환히 불을 밝힌다. 귀신과 액이 사라진 청정한 환경 속에서 설날을 맞는다는 뜻이다.

제의에서 사용되었던 불은 점차 놀이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 오랜 경험과 기술의 발전으로 불을 제어하고 다룰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 것이다. 대표적인 불놀이는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던 화희(火戱)였다. 화희는 연말(年末) 궁궐의 나례(儺禮) 의식에서 연행되었다. 나례는 궁궐에서 귀신을 쫓고자 행했던 벽사의례였는데 점차 놀이의 성격이 강해진 의식이었다. 궁궐에서 화희가 연행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후기에 화약의 제조법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인 까지 설치된 터였다. 군사적 목적의 화약이 놀이에 사용되면서 폭발과 굉음이 동반되는 대단한 광경을 연출할 수 있었다.

궁궐의 화희는 크게 화포(花砲)와 화전(火箭)이 주요 콘텐츠였다. 불대포와 불화살을 이용하여 땅을 요동치게 하고 하늘에 붉은 수를 놓는 것이 바로 화희였다. 화희는 군사들이 화기(火器)를 이용하여 연출하는 만큼 병기를 담당하던 군기시(軍器寺)에서 주관하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은 에서 다음과 같이 화희를 기록하였다. “(포통의) 끝에 불을 붙이면 조금 있다가 연기가 나고 불이 번쩍하면서 통의 종이가 모두 터지는데, 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시작할 때에 수많은 불화살을 동쪽 먼 산에다 묻어놓아 불을 붙이면 수많은 화살이 하늘로 튀어 오른다. 터질 때마다 소리가 나고 그 모양은 유성과 같아서 온 하늘이 환하다.”

 

 

《화성능행도병》에 그려진 불꽃쇼

 

성현이 본 화희는 불놀이보다 화려한 ‘불꽃쇼’라 할 수 있다. 나례에서는 사람이 불을 토해내는 ‘토화(吐火)’라는 불놀이도 있었다. 지금도 서커스나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기름을 입에 물고 있다가 불을 토해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런 불놀이는 어려운 재주를 보여주는 기예에 가깝다. 하지만 불꽃놀이는 화약에 의하여 불이 사방으로 튀기 때문에 굉장한 스펙터클을 연출한다. 세상천지를 아름답게 밝히는 화희는 사람의 혼을 빼앗을 정도로 신묘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화희는 연말의 나례의식뿐만 아니라 국가의 큰 행사에서도 벌어졌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경기도 화성으로 행차하였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1735년생 동갑이었으므로 둘 다 회갑을 맞이한 해였다. 화성행궁의 중심인 봉수당(奉壽堂)에서 뜻깊은 회갑연이 펼쳐졌는데 이러한 국가적 경사에 불꽃놀이가 빠질 수 없었다. 이 회갑연 장면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6폭 그림인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화성능행도병》은 정조의 화성 행차 시에 거행했던 일련의 행사와 잔치 모습을 8폭에 담은 기록화이다. 조선 시대의 기록화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걸작이다.

이 그림은 정조가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한 뒤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이 불꽃놀이는 포탄이 터지면서 생긴 불꽃이 주변으로 비산(飛散)하는 장관이었다. 그림의 중앙에 움푹 파인 땅에서 붉은 불꽃들이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정조실록』에서는 이때 ‘상이 득중정에서 활을 쏘고 매화포(埋火砲)를 관람하였다’라고 했다. 불꽃놀이를 위해 매화포를 쏘았으며 이로 인해 땅이 파이고, 불꽃은 위로 솟구쳐 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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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의 황홀한 조화, 선유(船遊)줄불놀이

 

성현도 말한 바 있지만 궁궐의 화희는 상당한 경비가 들어가는 연희이다. 불대포와 불화살을 동원하여 놀이를 하는 것은 임금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화희를 즐기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백성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전해지는 화려한 불꽃쇼가 있었으니 바로 ‘낙화(落火)놀이’이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대보름, 4월 초파일, 7월 보름 등에 행해졌다. 먼저 긴 줄을 나뭇가지나 장대에 매어 놓고, 줄 사이사이에 낙화봉을 매달아 둔다. 낙화봉이 불꽃을 내려면 화약이 들어가야 하는 법. 낙화봉에는 숯가루·사금파리가루·소금·점화물질 등을 다져서 넣었다. 이 낙화봉에 점화를 하면 줄을 따라서 긴 불이 붙어서 타오르게 된다. 붉은 줄불이 타오르면서 폭음을 내고, 사방으로 터지는 장면은 궁궐의 화희에 버금갈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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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놀이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줄불’이다. 수많은 줄을 따라서 불꽃이 위로 타오르기에 민간에서는 ‘줄불놀이’라 불렀다. 구한말부터 민족계몽 운동가로 활동했던 최영년(崔永年)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 줄불놀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 풍속에 4월 8일 숯가루를 넣은 주머니 수천 개를 만들어 숲 사이에 달아 놓고 불을 붙이면 눈과 같이 펑펑 쏟아진다. 이것을 ‘줄불’이라고 한다.” 줄불이 타오르면서 주변으로 불꽃이 튀는 장면을 펑펑 내리는 눈에 비유하였다. 붉은 불꽃이나 흰 눈꽃이나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아름답던 줄불놀이가 거의 명맥이 끊겨졌다가 다시 복원되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 마을에서 전승되었던 ‘선유줄불놀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선유줄불놀이는 줄불놀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멋진 놀이였다. 이것은 뱃놀이와 줄불놀이가 결합된 양반들의 풍류놀이였다. 배 위에서 시창과 음악을 즐기면서 불꽃놀이를 함께 관람하는 연희이다. 물과 불의 황홀한 조화를 맛볼 수 있는, 풍류 위의 풍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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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줄불놀이에는 뱃놀이, 줄불놀이 외에도 연화(蓮花)놀이, 낙화(落火)놀이가 함께 펼쳐진다. 연화놀이는 ‘달걀불놀이’이다. 달걀껍질을 이용하여 기름을 넣고 심지를 박은 후에 불을 붙여 강물에 띄우는 것이다. 다음의 낙화놀이는 위에서 언급한 ‘줄불놀이’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좁은 뜻의 낙화놀이이다. 높은 절벽인 부용대(芙蓉臺) 위에서 불을 붙인 솔가지단을 낙동강 아래로 던지는 놀이이다. 불붙은 솔가지단이 아래로 떨어지다가 절벽 바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불꽃이 튄다 하여 낙화(落火)인 것이다. 사방에서 줄불은 타오르고, 달걀불은 둥실둥실 강으로 떠내려가며, 불단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은 차마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저 황홀하다는 표현이 제격일 것이다.

물과 불은 성격상 상호 대립하는 물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극과 극의 물질이 서로 어우러져 놀이로 연출되면 황홀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부산 광안리 앞바다 의 불꽃놀이도 그렇다.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터지는 불꽃들은 하늘을 수놓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의 바다까지도 수놓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물에 비친 거대한 불꽃은 대립되기에 더욱 빛난다.

 

 

필자소개

유승훈 :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민중 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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