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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의 기풍(祈豊)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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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승훈 작성일2018.05.03 조회1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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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을 향한 열망과 몸짓,

정월 대보름의 기풍(祈豊)놀이

유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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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다운 달은 어디로 갔을까

 

얼마 전부터 양력 1월 1일의 해맞이 행사가 밀려드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붉게 뜨는 해를 보기 위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몰리는 현상은 전통적 세시풍속에는 없던 기이한 일이다. 을미개혁 시 태양력을 받아들인 이후, 100년이 넘게 양력을 따르고 있다. 우리 생활이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는 양력에 맞춰 편성된 까닭에 해를 숭배하는 문화까지 번진 것일까? 전통적인 우리 문화는 달의 운행과 원리에 따라 이뤄졌으며, 전통적 세시풍속일은 대부분 음력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늦은 밤, 대지를 교교하게 비추던 그 아름다운 달을 추구하던 문화는 어디로 갔을까?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도심 속 불빛으로 인하여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일까?

 

전통적인 민간 사상에서 보면 태양은 남성·하늘·양의 기운을, 반면에 달은 여성·대지·음의 기운을 상징한다. 농업사회에서는 달의 원리와 상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풍만한 달은 그 자체로 풍요로운 생산, 즉 풍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세시풍속 가운데 정월 대보름이 조상들에게 무엇보다 각광을 받는 것도 풍년을 기원하는 농사력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달은 생산과 풍요의 여성을 상징하는 바, 새해의 첫 보름달은 여성성이 극대화된 날로서 풍농과 풍작을 기원하는 기풍행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농업사회가 퇴장하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 정월 대보름이 약화되고, 양력 1월 1일의 해맞이 행사가 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정월 대보름, 놀이의 박람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달보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태음력이라는 동양의 과학적 월력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이다. 고대인들은 달의 차고 일그러짐을 보면서 세월의 변화를 인식하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하였다. 깜깜한 시골 밤에 떠오른 밝은 달을 한번쯤 경험해본 분이라면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달의 변화로 세월을 인식하는 사회에서 정월 대보름은 중요한 의미를 띨 수밖에 없었다. 정월 대보름을 도교적인 명칭인 ‘상원(上元)’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순조 때의 유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보름날 밤에 온 집안에다 등잔불을 켜놓고 밤을 새운다. 마치 섣달 그믐날 밤 수세(守歲)하는 것과 같이 한다”라고 하였다. 정월 대보름은 그해 처음으로 완전히 찬 달을 볼 수 있는 날이니 설날처럼 한 해가 시작되는 기점이 된 것이다.

과거 정월 대보름에는 ‘놀이의 향연’, ‘놀이의 박람회’라 할 만큼 다채로운 놀이와 행사가 펼쳐졌다. 『동국세시기』에서 정월 대보름에 했던 세시 풍속을 찾아보면, 연놀이, 연싸움, 달맞이, 다리밟기, 편싸움, 줄다리기, 놋다리밟기 등 수많은 놀이가 열거되어 있다. 놀이의 시각에서 보면 전통 사회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날은 설날보다 정월 대보름이었다. 설날은 새해 첫날로서 ‘근신’과 ‘조심’을 화두로 하여 친족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적 행사가 많다. 세배, 차례, 덕담 등 설날에 하는 세시풍속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 반면에 정월 대보름에는 ‘개방’과 ‘소통’의 날로서 마을과 고을을 단위로 하는 공동체 행사가 많았다. 당연히 정월 대보름 행사에는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놀이의 규모나 범위도 커지게 마련이다.

 

국제적 박람회에서도 포인트가 되는 전시장이 있듯이, 놀이의 박람회에서도 정월 대보름의 의미를 특별히 반영하는 놀이가 있다. 바로 풍년을 바라는 열망이 깃든 ‘기풍(祈豊) 놀이’이다. 기풍놀이의 근본에는 역시 풍만한 보름달이 있다. 대보름에 산 위로 뜨는 보름달의 형상을 가지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 달보기는 전국적으로 성행한 풍속이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보름달의 모습, 달빛, 높낮이로 그 해의 농사일과 기후 등을 점치고 있다. 일례로 부산의 녹산동 산양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매년 달이 뜨는 것을 보기 위한 자신만의 고정된 위치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해에 달 뜨는 높이와 위치 등의 차이점을 쉽게 알기 위해서이다. 이 장소에서 대보름 저녁에 달보기를 하는데 달이 밑으로 뜨거나 희미하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달이 붉으면 그 해에는 날씨가 가물어 농사가 잘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달보기 풍속은 그 내용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전국적으로 분포된 전통 놀이였다.

 

 

 

승지들이 서로 이기기를 힘써서 다투니

 

한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민가에서는 마당에 높게 볏가릿대를 세웠다. ‘볏가리’는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더미를 말하는데, ‘볏가릿대’는 풍년 기원을 위한, 높게 세운 장대를 일컫는다. 이 장대에 벼, 보리, 기장, 수수 등 여러 가지 곡식을 싸서 매달아 두는 것이다. 장대를 높이 세우는 일은 ‘입간(立竿) 민속’의 하나로서 자신의 소망을 하늘에 전달하기를 바라는 기원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높은 장대에 오곡을 매달아 둠으로써 풍년을 기원하는 열망을 하늘에 전달하는 것이다.

 

이 볏가릿대 세우기는 마을의 공동체 행사로 진행되기도 한다. 충남의 당진·서산 지역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협동을 하여 들판에 커다란 볏가릿대를 세운다. 먼저 큰 소나무를 베어다가 맨 꼭대기에 오곡을 헝겊으로 싸서 매달아 세워두고, 동아줄을 소나무 장대에 달아서 길게 늘어뜨린 후에 땅에 고정시켜 둔다. 멀리서 보면, 흡사 알곡이 잔뜩 매달려 고개 숙인 벼와 같다. 볏가릿대 형상 자체가 풍년을 뜻하는 주술적 상징인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풍물패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로 이어진다. 이처럼 볏가릿대 세우기는 정월 대보름을 맞아서 마을 공동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 놀이였다.

 

조선시대 민가에서 볏가릿대를 세워서 풍년을 기원했다면 이에 비교할 만한 것으로서 궁궐의 내농작(內農作)을 들 수 있다. 내농작은 ‘가농작(假農作)’이라고도 한다. 이는 대보름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농잠(農蠶)의 형상을 만들어서 궁궐 안에 세워두는 것이다. 농잠의 형상을 만드는 일은 춘추시대의 민요를 모은 『시경(詩經)』의 칠월 편에 나오는 내용을 본뜬 것이다. 「빈풍」 칠월 편은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고,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농가의 일상을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빈풍」 칠월 편을 재현하기 위해서 기암괴석, 산천초목 등의 자연환경, 농사일하는 모습, 양잠과 길쌈하는 장면 등을 만들어 세워둔 것이 ‘가농작’이다.

 

그런데 왜 「빈풍」 칠월 편의 내용을 형상으로 만들어 궁중에 세워두었을까? 중종(中宗)은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임금은 깊은 구중궁궐(九重宮闕)에만 거처하여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종조 이래로 반드시 내농작을 시행하여 구경했다”(『중종실록』 22년 12월 9일) 구중궁궐은 겹겹이 대문으로 쌓인, 임금이 거처하는 깊은 궁궐을 이야기 한다. 아무리 현명한 군주라도 백성들과 멀리 떨어진 구중궁궐에 있으면 농사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된다. 이 때 중농주의(重農主義)의 입장에서 내농작을 시행함으로써 세자에게는 권농주의를 교육시키고, 왕과 신하들은 스스로 농사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내농작 행사는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서 맡아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승지(承旨)를 필두로 승정원을 두 패로 나눈 다음에 경쟁적인 놀이로 진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종실록』(18년 1월 9일)에서는 내농작 놀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좌우로 나누어서 가농작(假農作)하는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승지들이 각각 서로 이기기를 힘써서 민첩하고 교묘하게 재주 있는 자를 다투어 차지하여 낭청(郞廳)을 삼고 공장(工匠)을 많이 모아서, 무릇 사람과 새·짐승·곤충·초목의 그 형상을 극도에 이르도록 꾸미고, 소용되는 잡물은 여러 관사(官司)와 시장에서 독촉해 거두어서 사령(使令)이 길에 분주하게 왕래하여 성안이 소란하였다.” 승지들이 서로 재주 있는 자를 차지하려고 다투었고, 부하들이 재료를 얻으려고 분주하게 왕래하니 성안에 소동이 날 정도였다. 내농작이 경쟁적인 놀이 행사로 치러지다 보니까 승지들이 서로 이기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승지간 알력이 생기고 승정원에서 불협화음이 적지 않아서 내농작을 없애자는 상소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농업사회인 조선에서 풍년을 기원하고 중농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내농작 놀이를 쉽게 혁파하기 어려웠다.

 

 

 

풍년 기원의 진정한 열망과 몸짓

 

올해 구제역 여파로 인하여 대보름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지만 근래 들어 정월 대보름 행사가 눈에 띄게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마련하고자 대보름 행사를 기획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나 각종 문화기관에서도 대보름 행사를 만들고, 다양한 놀이를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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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행사에서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역시 ‘달집태우기’이다. 달집 태우기는 거대한 불의 향연을 펼칠 수 있어 시민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망을 소지에 적어서 하늘로 날려 보내는 주술적 행사도 시민들의 호기심을 끄는 데 제격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왜 달집을 만들어서 태웠던 것일까? 달집 태우기는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행사이면서 동시에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상징적 의례였다. 즉, 달을 불에 그슬리게 함으로써 가뭄을 막고, 농사짓기가 순조로운 기후를 기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달집태우기 역시 기풍의 열망이 담긴 놀이로 생각할 수 있겠다.

 

농업 사회에서 풍년이야말로 누구나 희구하는 강렬한 염원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농촌이 점차 사라지고, 농사의 중요성을 모르는 시류 속에서 이러한 열망의 몸짓인 정월 대보름 기풍 놀이의 의미를 한번 쯤 되새겨 봤으면 한다. 수입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서도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이다”라는 세종의 말씀이 자꾸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왜일까?

 

 

 

 

* 필자소개

유승훈 :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민중 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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