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장군과 흥양(興陽)의 1관 4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철환 작성일2016.08.02 조회2,783회 댓글0건본문
고흥(高興)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송철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길고도 긴 전란을 말하자면 조선 선조 25년 임진란을 제일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장 7년 동안 이 강토가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진란 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7년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백성의 생활고는 차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당시 수많은 장수가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웠지만, 우리가 유독 이순신 장군을 마음속에서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은 구국 충정의 이념 정신이 드높고 자기의 맡은 바 소임에 언제나 정의가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수많은 사학자에 의해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많은 서술이 발표됐지만 내가 이 기고에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훌륭한 장수 밑에는 훌륭한 부장이 있지 않으면 그 위대한 전술도 큰 빛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장군의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이 두 분 사이에서 1554년 4월 28일(음 3월 8일) 자시에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경서 읽기보다 놀기를 좋아하였고 특히 친구들과 놀 때는 전쟁놀이를 즐기며 대장의 기질을 보였다. 시서를 읽기보다 말타기, 활쏘기 등 중국의 황석공 무술 경서와 장량의 병법을 좋아하였다. 함께 했던 친구 중에 유학자 유성룡(柳成龍)도 있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장군을 한번 보기를 원하였지만 같은 종씨라고 하여 끝내 상면하지 않았다. 장군의 성격은 언제나 청렴함을 잃지 않았으니 그 얼마나 정의로운가? 장군은 1576년 겨울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에 첫발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충청봉사 권관을 거치면서 육군 생활을 많이 하였다. 흥양(고흥군 일원의 옛 지명) 발포만호[萬戶: 조선 시대 때 각 도의 여러 진(鎭)에 파견된 종 4품의 무관직]로 부임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부장으로 있었지만, 종 4품으로 승급하여 발포만호로 처음 왔을 때 비로소 최초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 그때가 1580년(선조 13년)으로 그의 나이 36세였다. 발포만호로 부임해 오면서 처음 일선의 독립된 지휘관 생활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한 개의 진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상관의 사욕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년 7개월 만에 파직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 1586년(선조 19년) 정월에 부친의 상을 마치고, 사복주부로 조산만호에 나아가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에는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그 뒤 1591년(선조 24년) 진도군수가 되었다가 발포만호로 왔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왔을 때 장군의 친우 꿈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가지는 양 간에 가득한데 만민이 그 위에 몸을 의탁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나무뿌리가 기울어지려고 할 때, 사람의 몸을 붙잡고 있는 이가 있어 살펴본 즉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장군께서는 장차 왜놈이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병장기를 수리하고, 특히 병선을 보수 제작하고 각지 성을 보수하며 철저히 점검하였다. 전라좌수사 관하에 5관(순천, 광양, 보성, 낙안, 흥양) 5포(여도, 사도, 발포, 녹도, 방답포) 중 4포가 흥양에 있고, 좌수진영의 관할에 있는 것을 보아도 흥양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좌수사에 부임 후 2월 19일 여수 이목구비에서 출발하여 흥양(지금 점암면 여호) 여도에 도착했다. 이때에 여도에는 흥양현감 배흥립과 여도 권관 황옥천도 함께 나왔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날 2월 20일 이순신 장군은 녹도진으로 가기로 하고 먼저 흥양 전선소를 가서 점검 후 육로로 가지 않고 수로(배)를 이용해서 녹도만호 진영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녹도만호는 유성룡의 천거로 이순신 장군보다 두 살 위인 정운 장군이 부임하였다. 그는 청렴함과 정의와 불굴의 의지로 대의에 따라 움직였을 뿐, 지위의 높고 낮음에는 개의치 않았다. 정운 장군은 부임과 동시에 성곽 보수, 병장기 수리, 군선 보수, 군사 조련 등 지휘관으로 한 점의 손색이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런 그와 함께 술자리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다음날 2월 23일 녹도에서 사도진으로 출발하였으나 역풍이 세차게 불어 가지 못하고, 남성리에 배를 대고 포두면 익금을 지나 도화면 봉산마을을 거쳐 발포진으로 들어갔다. 발포진에 들어섰을 때는 꽃비에 일행이 모두 옷이 젖어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점검을 마친 뒤 2월 24일 아침부터 가랑비가 옴으로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 배를 타고 사도진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은 도착하자마자 병선을 점검하였다.
다음날 2월 25일 사도진에서 무기와 성곽 들을 점고한 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다. 점고 결과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2월 26일 아침에 출발하여 개이도에 도착하였는데, 이때의 순시 목적은 앞으로 닥쳐올 지도 모르는 전쟁준비 태세를 미리 점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왜군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왜군의 선봉부대 소서행장이 부산 공격을 시작한 십수 시간 만에 부산포가 함락되고 다음날에는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왜군의 후속부대 2진 가등청정과 3진 흑전장치 등이 계속 상륙하고 일지대는 연안지대로 서진하였다.
왜군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조야가 진동하였으며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溢)이 왜병은 신병(神兵)과 같다고 할 만큼 전의를 잃고 공포상태에 빠졌다. 비록 그 원인이 왜군의 조총과 조직화한 병력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군대의 무기력함을 드러낸 약점은 당시 사회 구조적인 모순이었다고 할 것이다.
국가에서 철통같이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충주 패보를 들은 선조는 하는 수 없이 한양을 버리고 평양에서 의주까지 몽진하였고 왜군은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에 서울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왜란 1년 전에 유성룡 추천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거북선을 건조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에게 연패를 당하고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구원을 청하게 되자 예하 장군을 좌수진영에 모아 논의하며 구원을 하느냐, 방어를 하느냐 하는 생각에 숙고하고 있었다. 그때 녹도만호 정운 장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상도도 우리 땅, 여기도 우리 땅, 집안에서 적을 막는 것보다 밖에 있는 적을 먼저 방어하여야 하는 것이 전술의 계책인데 방관만 하면 되겠는가?” 하고 고함쳤다. 이순신의 부관인 송희립 장군도 출병하여 원균을 도와 싸울 것을 말하자 그때서야 이순신 장군은 좌수영 관아 전 장병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5월 7일 제1차 옥포 해전이 일어났다. 옥포 해전은 첫 출정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제2차는 사천, 당포, 당함에서도 큰 전과를 올려 승전고가 울렸으며 제3차는 한산도 대첩이다. 이 대첩에서 왜선 60여 척을 쳐부수어 임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로 인해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앞의 내용에서도 보았듯이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많은 공을 세우기까지는 장군의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좌수영 관하 5포 중 4포가 흥양(고흥)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흥양 경내 1관 4포 중 수군병력만도 1,100~1,400명을 헤아렸을 것으로 추산된다(판옥선 1척에 100~120명의 수군이 탑승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음). 다시 한 번 흥양수군의 활약상을 『호남절의록』 내용을 통해서 확인해 보기로 하자. 『호남절의록』은 이순신 휘하에서 조방장이나 군관으로 지냈거나 자원 출전하여 수군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 144명의 약전을 기록하고 있다. 144명의 명단은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모두 그 이름이 확인된 인물이라고 사학자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전라도 연해 지역 23개 읍에 분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순위에 따라 열기해 보면 흥양 33명, 순천 18명, 나주 14명, 함평 11명, 무안 10명, 보성 7명, 영암 7명, 강진 6명, 해남 4명 순서로 나타나 있다고 순천대학교 사학과 조원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임란 시 고흥 백성이 얼마나 수군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는지 다시 한 번 재고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임진란 7년간을 전후하여 고흥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이순신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승승장구 승전할 수 있었을까? 기록에 보면 흥양은 평상시에는 민간인으로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란이 발발하면 병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흥양 사람이 많은 부장과 의병으로 배출되었으며, 그들의 도움으로 이순신 장군도 승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북선을 제조하는 데는 나대용(羅大用) 이름만 거론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흥양 출신 정걸 장군과 송덕일 장군도 다시 한 번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판옥선 제조자는 정걸 장군, 전투선 보수자는 송덕일 장군, 판옥선 위에다가 지붕을 만들어 완성한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임란일기』에는 송덕일 장군이 장공 41명을 데리고 와서 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송덕일에게 보낸 답서에 보면 기한을 지켜 제작하는데 감독하여 대사를 그르침이 없도록 하라고 하고 선제(船制)에 있어서는 마음대로 기교하게 만들도록 하라는 답서가 이순신 「논선제서」에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이 자료들을 보면 이분들이 거북선 제조에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5월 29일 사천에서 이순신은 처음으로 거북선을 실전에 사용, 적선 12척을 전멸시키니 이것이 사천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이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니 육로에서 싸우던 왜적은 보급로가 끊어지므로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사망하자 왜군들도 자기 본국으로 철수하려고 경상 남해 쪽으로 집결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진린도독과 1598년 11월 18일 밤 2경(9시~11시)에 함께 출발하기로 약속하여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싸움하였다. 이날 밤 3경(11~1시)에 이순신 장군이 선상에서 무릎 꿇고 하늘에 축원하기를 “이 원수들을 다 제거한다면 곧 죽어도 한이 없다.” 하였는데 홀연히 큰 별이 바다 가운데에 떨어져 보이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여명이 밝아 올 적에 장군은 독전하는 중 적의 탄환에 맞았다. 이순신 장군이 말하기를 “전쟁이 급박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고 홀연히 운명하였다.
아들 회와 부장 송희립은 슬픔을 참고 장군 대신 기고(旗鼓)를 잡아 왜적을 멀리 퇴각시켰다. 그 후 모든 전선에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장군의 발상(發喪)을 준비하고 나라에 알리었다. 이순신 장군은 천하에 둘도 없는 문무와 지혜를 겸비한 충성스런 장군으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명장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장수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 그 밑에는 뛰어난 전략가와 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전략가가 있다고 할지라도 훌륭한 장군이 없으면 어느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없듯이 이순신 밑에는 흥양(고흥) 수군의 뛰어난 부장과 전략가가 많았다. 그래서 필자는 임란 사학을 연구하는 사학가들이 다시 흥양에 대하여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검간공(黔澗公)의 『임란일기』, 이분(李芬)의
『행장』, 『임란전서』 등에서 발췌
* 필자소개
현 고흥군 옛 지명 찾기 전문위원, 국사편찬위원회 광주전남 고흥군 사료조사위원, 고흥(高興)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대순회보 119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