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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 타지마할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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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2019.02.22 조회1,7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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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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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 왕관모양의 타지마할 


  암리차르를 출발한 버스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델리를 통과하여 다시 남동쪽으로 20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무굴제국의 옛 수도 아그라(Agra)에 도착한 시간은 하루 반나절이 지난 7월 3일 저녁 무렵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건축물 ‘타지마할’이 이번 목적지였으나 일몰(日沒) 시간이 되어 문을 닫은 관계로 다음날 아침으로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루나 이틀 동안의 이동 후에 약 한 시간 남짓의 짧은 견학, 그리고 다시 계속되는 긴 이동…. 이것이 인도 답사의 특징이었다. 때문에 인도에 도착한 지 4~5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날짜 개념이 희박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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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아침, 조금이라도 서늘한 시간에 일정을 마치기 위해 7시에 숙소를 나섰으나 이미 기온은 30℃에 육박하고 있었다. 불교가 이곳 인도에서 발생하였다고는 하나 백팔배, 삼천배와 같은 수행법만은 여기서부터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이나 요가가 인도를 대표하는 수행법이 된 이유도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차창 밖으로 스쳐간 인도농촌의 한낮 풍경은 무더위로 인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대개 나무 그늘 아래 가만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소들은 물속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렇게 척박한 자연환경을 보니 새삼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절감하게 되었고, 이 땅에 태어난 것에 대해 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타지마할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도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인도정부는 문화재 보호라는 명목으로 외국인들로부터 750루피(한화 15,000원)라는 거액01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이는 내국인에 대한 입장료가 20루피인 점을 고려하면 지나친 감이 있었다. 입장권을 끊었지만 입구에 서 있는 경찰들은 일행을 바로 들여보내지 않고 꼼꼼한 소지품 검사를 통과한 사람들만 한 명씩 안으로 들여보냈다. 건물을 훼손할 수 있는 뾰족한 물건이나 껌 등의 반입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지어진 지 350년이 지난 이 건물은 아그라 일대가 공업지대로 변모하면서 점차 누렇게 변해가다가 2002년에 점토팩으로 본래의 백색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환경오염보다도 심각한 것은 바로 수많은 방문객들이 내뿜는 숨결이 건물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또 계속 같은 길을 따라 걷는 관광객들의 이동경로가 바닥의 마모를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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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적인 무굴의 정원양식인 수로(水路)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에 여인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정문을 지나니 드디어 사진을 통해 익히 보아 온 타지마할(Taj02 Mahal)의 자태가 눈부신 햇살 속에 드러난다.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진 타지마할의 전체 모습은 완벽한 좌우대칭으로서 마치 거대한 왕관을 보는 것 같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했다는 무굴제국의 제 5대 황제 샤자한(1592~1666)이 14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은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1593~1631)’을 위하여 지어 준 이 왕관(무덤)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황제의 한 여인에 대한 찬란하고도 열정적인 사랑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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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뭄타즈 마할은 샤자한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많은 부인을 두었던 그였지만 첫째와 셋째 부인에 비해 미모도 많이 떨어지는 두 번째 부인을 가장 총애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꾸밈없고 밝은 성격에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들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 않았고,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매사에 솔선수범하여 대신과 궁녀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남편의 마음을 읽는 데도 탁월하여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늘 마술처럼 알아 맞혔으며, 남편을 따라 전쟁터에까지 나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을 지켜보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질 수 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아내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샤자한의 비통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단 3일 만에 머리가 백발로 변해버렸다 한다. 그는 아내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하였고, 최고의 권력자였기에 가능했던 대공사가 곧 시작되었다.


  인도 전역은 물론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동원된 장인(匠人)들을 포함한 2만 명의 인력이 투입되었으며 건축자재 운반을 위해 천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 빛을 투과하는 흰색의 대리석은 인도 서부의 라자스탄 주에서 운반되었으며, 비취와 수정은 중국, 터키석은 티벳, 청금석은 아프가니스탄, 사파이어는 스리랑카, 루비는 아라비아에서 각각 운반되었다. 이렇게 수집된 28종의 보석과 준보석들이 흰 대리석에 파여진 문양을 따라 조각되었다. 1632년에 시작된 이 공사는 총 3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었고, 20여 년이 흐른 1653년이 되어서야 완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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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리석을 파내고 그 안에 색색의 보석을 박아 넣어 꽃잎을 표현해 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완공되었음에도 왕비에 대한 그의 그리움은 더해 갔으며 결국 중병에 걸려 정사(政事)를 돌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가 타지마할로 인한 국고탕진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나머지 형제를 모두 죽이고 아버지 샤자한을 타지마할에서 2km 정도 떨어진 아그라 성(城)에다 가두어버리는 패륜(悖倫)을 저질렀다.03 아들에 의해 유폐된 샤자한은 8년간이나 타지마할을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였으며 안타깝게 바라만보며 그곳에 묻힌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숨을 거두었고,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 곁에 묻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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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지마할 뒤편으로 흐르는 야무나 강(멀리 샤자한이 유폐되었던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아그라 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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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라 성(城)에 유폐된 샤자한이 죽을 때까지 가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만 보았던 타지마할의 모습

 

  시성(詩聖) 타고르가 타지마할을 묘사한 ‘시간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a teardrop on the cheek of time)’이라는 구절처럼 아름다운 건축물 속에 깃든 애절한 사연을 듣고난 후, 다소 무거워진 마음이 되어 다음 목적지 자이나교(敎) 사원이 있는 카주라호(khajuraho)로 출발하였다.


  이번에도 역시 10시간 가까이 이동한 끝에 늦은 밤에야 도착하였다. 이곳 카주라호에 한국 식당(인도인이 운영하는)이 몇 군데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에 일주일 가까이 인도음식에 지친 속을 달래고자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중간에 식당을 들르지 않았었다. 김치찌개와 라면이 나왔으나 사용한 물과 양념이 달라서 그런지 전혀 반갑지 않은 국적불명의 맛이어서 오히려 인도음식을 먹느니만 못했다. 도장에서 늘 먹던 칼칼한 김치국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자이나교를 살펴보기 위해 찾은 장소는 박물관과 사원을 겸하고 있는 곳이었다. 사원의 겉모습은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힌두교 사원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고 내부에 들어가서 보게 된 조각상들도 나체로 서 있는 상(像)을 빼면 얼핏 보아서 불교의 조각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자이나교 신도의 대부분이 인도의 서쪽과 남쪽지방에 모여 살고 이곳은 한참 떨어진 중부 지방이라 자이나교의 진면목을 살피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며칠 전에 본 생동감 넘치는 시크교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 사원 안에는 성직자 한 분과 내부 관계자처럼 보이는 아주머니 몇 분이 앉아서 조각상에 바쳐질 꽃들을 손질하고 있을 뿐 신도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관광객 또한 우리 일행밖에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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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두교사원의 외관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자이나교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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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佛像)과 흡사해서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 자이나교의 조상(彫像)

 

  그러나 자이나교는 현재의 빈약한 교세(인구의 0.5%미만)와는 달리 매우 긴 역사를 가진 유서(由緖) 깊은 종교이며, 힌두교·불교와 더불어 인도의 전통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기원전 5백년 대04에 살았던 마하비라(Mahvira, 기원전 599~527)05이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전에 이미 23명의 지나(Jina: 욕망, 증오, 분노, 탐욕, 자존심과 같은 세속적인 열정을 불굴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윤회라는 삶의 흐름을 건너는 데 성공한 승리자로서 깨달음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을 건네주는 역할을 한다. 자이나교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됨)들이 있었으며, 이중 23대의 지나인 파르슈바는 마하비라보다 250년 전에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를 진정한 창시자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이 지나(Jina)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전지전능한 신의 화신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人間)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지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불교의 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자이나교의 가장 주된 가르침은 어떠한 생명도 살상하지 않는다는 ‘아힝사’(ahims: 산스크리트어로 不殺生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힌두교도와 불교도들도 깊이 존중하는 덕목이며, 마하트마 간디는 이 ‘아힝사’의 원리에 바탕을 둔 무저항주의를 정치개혁을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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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적으로 출가주의(出家主義)를 표방하는 자이나교는 수행자에게 아힝사의 교리를 준수하기 위한 세 가지의 필수품을 소지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물 속의 미생물을 마시지 않기 위한 ‘물 거르는 주머니’, 둘째는 공기 속의 미생물을 마시지 않기 위한 ‘마스크’, 세 번째로 길을 걸을 때 벌레를 밟지 않기 위한 ‘방울달린 빗자루’가 그것이다. 그밖에 주요계율로는 불망어(不妄語: 허망한 말을 하지 않음), 부도(不盜: 도둑질 하지 않음), 불음(不淫: 음란하지 않음), 무소유(無所有: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음) 등이 있다. 이중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옷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공의파(空衣派)06과 흰 옷은 입어도 된다는 백의파(白衣派)가 있는데, 이들은 1세기 말경 수행자들의 규범에 관한 입장차이로 인하여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이나교의 일반신도들은 살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농업에조차 종사하지 않으며 거의 상업에만 종사하고 있다.07 따라서 많은 자산을 모았으나 ‘무소유’의 계율을 실천하기 위해 교단에 적극적인 기부를 하므로, 미미한 교세(현재 약 260만 명으로 추정)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재정은 상당히 탄탄한 편이라고 한다.

 

 

 <대순회보 68호>

 


01 환율 계산상으로는 15,000원이나 현지인들이 느끼는 체감물가로는 75,000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인도에서 보통 10루피 정도면 음료가 포함되지 않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

02 이슬람권에서 남녀 모두가 착용하는, 보통 꼭대기가 원추형이거나 곡선을 그리는 테 없는 모자이며 ‘타지’로 읽힌다. 이 단어는 ‘왕관’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서 유래하였다.

03 그 때문인지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였고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04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1969)는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기원전 800년과 기원전 200년을 상·하한선으로 하는 시기에 발생했던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 있어서 특히 기원전 500년 주위에는 획기적인 정신적·도덕적·지성적 ‘도약’이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도약이란 구체적으로 중동지방에서 발생한 예언자들을 통한 고전 유대교의 대두와 율법적 유대교의 태동, 인도에 있어 베다로부터 우파니샤드와 자이나교(Jainism) 등으로의 전환, 그리스에 있어 호머·헤시오도스로부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과 고전 철학으로의 발전 그리고 중국에 있어서는 유가(儒家)·도가(道家)의 등장 및 백가쟁명의 출현이었다. 

05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 본명은 바르다마나. 현재의 비하르주 빠트나 근처에서 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로 출생하였다. 30세에 출가하여 니간파타라고 불리는 수행자 무리 속에 들어가 12년 동안의 엄격한 고행을 거친 뒤, 완전지(完全智)를 체득하여 지나(승리자)가 되었다. 

06 수행의 깊이가 더할수록 나체의 정도가 심해지며, 완전한 나체로 지내는 사람은 일정 경지에 오른 수행자라고 한다. 그리고 나체가 될 수 없는 여성은 기본적으로 해탈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비구니는 한 생을 더 윤회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불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러한 공의파는 주로 남인도에 분포되어 있으며 백의파는 서인도에 주로 살고 있다고 한다. 

07 인도 최대의 기업인 ‘타타(TATA)자동차그룹’의 총수도 자이나교 신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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