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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 발자취를 따라간 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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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숙 작성일2019.02.18 조회1,3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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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3 방면 보정 김정숙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한때 인기 있던 드라마의 유명한 대사다. 배들평야에 남아 있던 서러움이 느껴져 나도 참 많이 아팠다. 세월이 이리 흘러도 그 통한의 설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가 보다.

 

 

4월 24일 우리 군산방면 임원들은 종교문화답사를 하기 위해 출발지인 전북 정읍의 만석보(萬石洑)에 모였다.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 눈 쌓인 배들평야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하다 말하지 못하고, …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만석보 긴 둑에 … 무릎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 [만석보 시비(詩碑) 중에서]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된 만석보의 비문을 읽어 내려가며 마음 아파했다. 전날부터 많은 비가 내리다 때마침 답사 직전부터 그친 터라, 들판은 선명한 짙푸름을 더욱 짙게 드러냈다. 인공조형물에 익숙한 나는 자연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과에 속하지만, 풍요롭고 평온한 저 배들평야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옥한 그 평야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자극했고, 권력이라는 구조 속에서 약탈과 수탈의 근원지가 됐으며, 수많은 백성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아니 저 평야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우리는 그 시절 백성들의 울분을 같이 느끼며 아파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고단한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되며, 지금 이 시대에 살아가게 해주신 상제님, 조상님 전에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상제님께서 세상을 바꿔 놓으신 것이 확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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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소재

 


  우리는 1박 2일 코스의 일정을 하루 만에 소화해야 했기에 상제님께서 태어나신 곳, 공사 보신 곳 등을 바쁘게 찾아다녔다. 공사 보신 곳이 빈터로만 남아 있더라도 발자취를 따라다니면서 듣는 교화는 나를 계속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문득 상제님께서는 문공신, 신경수, 박공우 등 여러 종도를 통해 천지공사를 처결하셨는데, 나는 과연 도전님의 일꾼으로 상제님의 공사에 제대로 쓰임이 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암울했던 그 시대가 아닌 포덕천하, 구제창생, 지상천국건설의 목적을 위해 창설된 대순진리회 현판이 세워졌던 1972년에 내가 태어났다. 시기적으로 우연의 일치일 수 있지만, 나는 상제님의 포덕천하에 쓰임이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라 믿는다. 일꾼으로 나올 때 ‘많은 사람 살리라고 지금 태어나게 해주셨다는 것을’ 분명 마음에 새겼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 마음이 많이 흐려졌던 것이다.
  인솔자분이 상제님의 생가에서 교화하던 중 “한고조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나니…”를 말씀하셨다. 익히 알고 있는 구절이었지만, 나는 소하에 대해 굳이 알아보려고 하기보다 그냥 유방(劉邦)을 도운 재상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강사분이 ‘전쟁의 모든 뒷수습을 다 했던 소하’라고 말하는 순간, 소하가 한 일은 결국 음덕(陰德)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음덕이 포덕천하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깊이 생각지 못한 채, 앞에서 통솔해야 사업가라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사업적 결과만을 따지던 나 자신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결과가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이뤄내고 유지하기까지의 음덕에 대해선 소홀히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상제님께서 『전경』의 여러 구절에서 음덕이 크다고 말씀해주셨지만 난 단지 교화용 문구로만 여겨왔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내 주변 분들의 존재를 들여다보지 못한 부분이 많았었다. 나는 포덕천하에 같이 동참하고 있는 소중한 인연들에게 얼마만큼의 마음을 썼을까?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진 위인들의 교화를 계속 들어왔으며, 만석보에서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저리도록 아팠던 내가 그것을 행으로 옮기기는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인가?
  사람의 존귀함에 대해 진실로 내 마음이 겸허해질 때 천하창생을 살리고자 하신 상제님의 숭고하신 뜻을 제대로 받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솔선수범, 화합단결이다. 화합·단결은 언덕을 잘만 가져도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말 한마디도 좋게 해주고 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 마음을 풀지 못하고 말로만 화합을 외치고 있었으니…. 나는 화합을 실천하여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만드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다짐하며, 우리 방면이 상제님 공사에 크게 쓰일 수 있기를 심고 드린다.
  답사(4월 24일) 다음 날, 답사를 다니는 사이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순국 123년 만에 서울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다는 가슴 뭉클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조선명부인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고 남북회담을 하다니…. “상제께서 김 형렬의 집에서 그의 시종을 받아 명부 공사를 행하시니라. 상제께서 형렬에게 “조선명부(朝鮮冥府)를 전 명숙(全明淑)으로, 청국명부(淸國冥府)를 김 일부(金一夫)로, 일본명부(日本冥府를 최 수운(崔水雲)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노라”고 말씀하시고 곧 “하룻밤 사이에 대세가 돌려 잡히리라”고 말씀을 잇고 글을 써서 불사르셨도다”(공사 1장 7절)라는 『전경』 구절이 너무도 실감이 난다. 답사를 통해 상제님 공사가 우리 도인들을 통해 실현된 듯한 생각이 들어 너무 좋았고 가슴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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