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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뿌려진 원(冤), 그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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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9.02.23 조회1,8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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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뿌려진 원(冤)01, 그 슬픈 이야기

 

 


교무부 차장 차선근

 

2006년 12월 21일, 우리나라의 종교학자 30여 명을 태운 비행기는 눈이 부시게 맑은 창공(蒼空)을 가른 끝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오키나와 섬에 내려앉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뜻있는 종교학자들이 매년 양국을 오가며 개최하는 한일종교포럼의 사전답사가 오키나와에서 실시되었는데, 이 행사에 대순진리회 교무부가 초청되어 필자도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국 여행으로 인한 설레임은 잠시였을 뿐, 오키나와에 체재하는 며칠 동안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왜냐하면 오키나와는 관광휴양지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 이면에는 고통과 한(恨)이 깊이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원(冤)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더 큰 원(冤)의 단초가 되고야만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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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112㎞에 너비 11㎞인 길쭉한 모양의 본도(本島)를 중심으로 16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에 130여 만 명이 모여 사는 오키나와는 일본열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 동안 류쿠[琉球]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은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 사츠마번[薩摩藩, 현재의 가고시마 현]의 조공국(朝貢國)으로 전락하더니02 1867년 이후로는 완전히 일본에 편입되고 만다. 게다가 그들은 일본 본토인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류쿠진[琉球人]’이라 불리며 차별받았다. 오키나와 인(人)들은 이로 인해 많은 원(冤)을 가지게 되었지만, 태평양 전쟁에 휘말려들면서 보다 더 큰 원(冤)을 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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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사라진 류쿠왕국의 중심지 슈리성[首里城] 정전(正殿).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03 오키나와현 나하시 소재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개전 초기 6개월간은 일본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1942년 6월에 이르러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 항공모함 4척과 최정예 해군 조종사 대부분을 궤멸시킴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전력을 크게 잃은 일본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이오지마[硫黃島]를 함락시킨 뒤04 1945년 4월에 일본 본토 상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4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 남단에 있는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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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은 사령관 우시지마 중장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전을 전개하다 패퇴하자 포로로 잡히지 않고 백병전·자살·자폭으로 죽음을 맞는 옥쇄작전에 들어갔다. 이로써 쌍방 간에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여 미군은 전사자만 12,000명에 이르고 부상은 36,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사망자만 20만 명을 훨씬 넘게 되었다. 목숨을 잃은 일본군의 절반 이상은 전쟁터에 강제 동원된 섬의 주민들이었다.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지역주민이 전투에 동원된 사례는 이곳 오키나와가 유일하다고 한다. 또한 아무런 이유없이 강제로 끌려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유골조차 수습 못한 우리나라 사람들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쟁을 거치면서 오키나와에는 많은 원(冤)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치열했던 전투는 단순히 원(冤)을 남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류에게 뼈아픈 상처를 가져다 준 ‘원자폭탄 투하’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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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에 투하된 ‘꼬마’라는 이름의 원자폭탄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옥쇄작전으로 인하여 수많은 피해를 본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한다면 더욱 많은 인명 손실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금단(禁斷)의 무기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3일 뒤에는 나가사키에 연이어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11만 명의 인구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두 도시는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05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지만, 피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피폭(被爆) 방사선으로 인해 오랜 시간에 걸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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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오키나와 전투에서 우시지마 중장이 옥쇄를 명령하지만 않았다면, 원자폭탄의 이런 처참한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오키나와의 전투는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을 잉태하는 단초가 되었다. 오키나와의 원(冤)은 원자폭탄으로 인한 희생에서 비롯되는 더 큰 원(冤)을 낳은 것이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혀져버린 고통과 슬픔의 숨결을 찾아서 


  12월 22일과 23일 이틀간 한일 종교학자들은 역사의 고통을 확인하기 위해 전투가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오키나와 섬의 남부를 군데군데 돌아다녔다. 바위나 암벽 등 곳곳에서 선명히 나 있는 총알 자국들과 폭흔(爆痕)은 당시의 격전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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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인명피해의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인 우시지마 중장을 기념하는 여명의 탑. 아직도 일본에는 군국주의의 망령이 살아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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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명의 탑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용혼의 탑. 전쟁에 희생된 일본군들을 위한 탑으로 군국주의의 잔재에 불과하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소재  

 

  그런데 놀랍게도 오키나와에서는 이 전쟁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그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전쟁의 주범인 우시지마 중장을 기념하는 탑(‘여명의 탑’이라고 부름)이 거대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옥쇄를 명령함으로써 피아(彼我)간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오키나와의 사령관 우시지마… 그를 기념하는 탑이라니! 게다가 그 탑 바로 아래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을 위해 ‘용감히 싸우다 죽은’ 자들을 기리는 ‘용혼(勇魂)의 탑’이라는 이름의 기념비까지 세워놓은 것이었다. 


  이들 탑에는 전사자들에 대한 애도만 있을 뿐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그 어떤 내용도, 강제로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동포들이나 죄 없이 죽어간 섬 주민들에 대한 그 어떤 애도도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사자들을 전쟁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을 돌며 섬에서의 전투와 탑들에 대한 이런 의미를 설명해 준 사람은 제주대학교 조성윤 교수였다. 일본 땅에서 일본에 대한 역사를 알려주는 사람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인 점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강돈구 교수가 일본의 한 종교학자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자신들은 오키나와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고, 더구나 오키나와에서의 전투는 일본 교과서에조차 실려 있지 않다고 하니 오키나와에 답사를 온 30여 명의 일본 종교학자들도 오키나와 참상의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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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에 들어서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의 ‘평화의 초(礎)’에는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가해자인 일본군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심지어 미군들의 이름도 있다. 그러나 이 주춧돌은 전쟁의 참상만을 기록한다는 의미만을 가질 뿐 일본 자신의 역사에 대한 참회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키나와에 뿌려진 우리 민족의 한(恨), 그 이야기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 1인 12만 명이 ‘황국신민’이란 이름으로 집단자결을 강요받는 등 희생되었으므로, 오키나와는 전쟁으로 인한 나름대로의 한(恨)이 서려있는 곳이다. 그러나 어쨌든 오키나와도 일본제국의 일원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당시 정신대를 포함하여 오키나와에 끌려온 한국인은 1만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머나먼 이역 땅에서 일본군에 의해 인간방패로 삼아져 목숨을 빼앗겨야만 했고 유골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역사의 평가와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에 뿌려진 동포들의 한(恨)은 풀릴 길을 찾지 못한 채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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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한 우리 동포들의 모습. 무려 100만 명 이상이 끌려갔다고 전해지며, 여성들도 20만 명 이상이 정신대로 전쟁에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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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에바루시 문화센터 안에 전시되어 있는 오키나와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군영(軍營) 그림. 여기에는 위안부들이 거처한 곳의 그림도 보이는데, 여기에 그려진 위안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직까지 그들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1997년, 오키나와에서 ‘평화 실현을 위한 모임’이라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꾸준히 과거사 학습 모임을 개최하더니, 1999년 8월에 경북 영양군청 근처에 오키나와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비를 세운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작년 2006년 5월에 오키나와 섬 중부 해안마을 요미탄에 한국인 징용자와 위안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한(恨)의 비(碑)를 세우면서06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도 일본에 의한 피해자이지만 2차 대전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우리 오키나와 인(人)들을 용서해 달라.” 말하고 과거 역사에 대한 참회를 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차원의 역사 참회는 아직 요원한 일로 느껴지는 가운데 민간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들의 과거 반성을 보면서,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우리 동포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달래지기를 기원해본다. 

   


‘고통과 평화와 영적 감수성’을 주제로 한 토론회 


  답사를 끝낸 뒤 12월 23일 저녁, 한일 종교학자들은 오키나와 전투의 격전지였던 하에바루시07의 문화센터에서 오키나와에 어린 고통과 원한에 대해 거의 3시간 가까이 토론을 하게 되었다. 고통과 원한이라면 분명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터인데, 가해자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논의에 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여전히 머뭇거릴 뿐이었다. 참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가 일본’이라는 이야기가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오키나와에 쌓여있는 수많은 고통과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종교뿐이라는 결론에는 모두들 공감하였으며, 우리나라의 한 학자는 “한국에서 큰 무당을 데려와 오키나와의 원한을 풀기 위해 굿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공사 1장 3절)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 이를 없애려면 해원으로써 만고의 신명을 조화하고 천지의 도수를 조정하여야 하고 이것이 이룩되면 천지는 개벽되고 선경이 세워지리라.”(공사 3장 5절) 

  

 

  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칙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예시 73절) 

 

 

  『전경』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작금(昨今)의 세상을 원한이 가득 차 참혹해진 선천으로 규정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원한을 풀어내시는 공사를 보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흐트러진 천지의 도수(度數)08를 정리하여 굳건히 하고 비겁에 빠진 신명을 조화하여 신도(神道)로부터 원한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이룩되면 인간계에 사무친 각종 원한은 저절로 풀리면서 천지는 개벽되고 지상 선경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실로 이 세상은 원한이 가득 찬 세계이다. 원한은 사람에게 고통과 슬픔을 준다. 그리고 아직 원한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은 선천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고통과 슬픔에 젖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공사보신 대로 그러한 원한과 고통은 점차 치유되고 풀려 나갈 것이다.


  이제 수도인의 입장에서 오키나와를 둘러보고 난 뒤, 상제님의 법방이 펼쳐지는 데 있어 미력하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분골쇄신의 정성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고, 또한 원을 풀고 상생을 이루는 해원상생(解相生)의 대진리(大眞理)를 실천해 나감에 있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음을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대순회보 69호>

 

 


01 원(冤)은 원한(怨恨) 즉 주로 남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나타내는 원(怨)과 스스로에 대한 한탄과 후회를 말하는 한(恨)의 의미뿐만 아니라 척(㥻)의 개념까지 모두 아우른다. 원(冤)이 원한(怨恨)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의 단어라 하더라도 이 글에서는 이야기의 전개상 두 단어의 구분이 없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혼용하여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02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중심은 훗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주도한 사츠마번 소속의 군대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자 대한해협을 바로 건너오기 어려웠던 사츠마번의 수군이 멀리 뱃길을 돌아오면서 오키나와를 복속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03 오키나와에는 류쿠왕국 유적과 구수쿠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두 유적군은 우리나라의 홍길동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특히 구수쿠 유적은 오키나와 남쪽지역의 섬들에 남아 있는 10여 개의 옛 성(城)으로 ‘구수쿠’라는 말은 ‘홍씨 집단이 거주하던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곳의 기록과 유물에는 ‘오야케 아카하지[洪家王]’란 말이 있는데 이는 ‘홍씨왕’이라는 뜻으로 율도국을 세운 홍길동을 말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04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2월, 미국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오가사와라 제도의 작은 화산섬인 이오지마에 진격했다. 태평양 전쟁의 최대 격전으로 꼽히는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6,000명 포함 모두 24,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일본군 수비대 23,000명은 모두 전멸했다.

05 히로시마에 투하된 ‘꼬마(little boy)’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은 66,000명을 죽이고 69,000명을 부상시켰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뚱보(fat man)’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은 39,000명을 죽이고 25,000명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방사선으로 인한 추가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다. 

06 제주대학교 조성윤 교수에 따르면 오키나와에는 한국인들을 위령하는 4개의 탑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청구지탑(靑丘之塔)은 일본군의 병사로 일본을 위해 죽어간 한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일본 보수 우익인사들이 세운 것이고,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내의 한국인 위령탑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나 북한을 의식하여 대북공작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어서 정치적인 색채가 짙고, 역시 이 공원 안의 ‘평화의 초(礎)’에도 한국인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으나 이 역시 제대로 된 역사 평가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행히 최근 건립된 ‘한의 비’는 역사를 참회하는 뜻있는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진정한 사죄와 평화에의 갈망이 담겨있다고 한다.

07 오키나와 전투 3개월 동안 하에바루 주민의 43%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08 우주 운행의 원리(우주의 질서와 운동의 법칙)로서,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법방(法方)이 적절한 시기에 이르면 일정한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절차이자 프로그램. 또한 여기에 어떠한 일을 완성하거나 이루는데 필요한 기간(시기, 때), 그리고 그 일의 시작과 끝이 되는 시점이라는 뜻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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