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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中華)의 본고장, 섬서성을 둘러보고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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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9.03.05 조회1,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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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부 차장 차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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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남한의 98배에 달하는 땅01과 13억이 넘는 인구02을 가진 거대한 나라이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를 지나면서 낙후된 나라라는 이미지를 주었던 중국은, 최근 들어서 전국에 걸쳐 각종 인프라03을 탄탄하게 구축하며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은 1949년 공산화 이후 많은 ‘중국적인 모습’을 잃었다.04 그 상태에서 급속한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펴다보니 요즘 중국에는 중국 본래의 특유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북경(北京)이나 상해(上海)만 예를 들더라도 이 도시들은 선진국의 그것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지만 오히려 이런 곳에서는 중국의 고전미를 맛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중국의 옛 숨결을 비교적 잘 느껴볼 수 있다고 평가받는 곳이 있으니, 바로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섬서성(陝西省)이다.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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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답사의 시발지인 함양 국제공항. 넓은 평야에 공항 건물만 덩그렇게 서 있어서 꽤나 적막한 느낌을 준다.


   섬서성은 중화(中華)의 본고장으로 평가받을 뿐 아니라,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주나라 문왕과 강태공, 노자, 진시황제, 유방, 장량, 광무제와 28장, 제갈량, 당태종과 24장 등등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인물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2007년 6월 30일부터 7월 6일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종교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필자 외 1명이 섬서성 지역을 답사하였고, 그 답사기록을 상하(上下) 2회분으로 나누어 연재해 보고자 한다. 잠시 지면을 빌려 초청을 하여주신 ‘문화와종교연구소’ 소장 강돈구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섬서성은 중화문명의 발상지

  서에서 동으로 중국 대륙을 관통하여 5,464km를 유유히 흐르는 황하(黃河)는 중국 한족(漢族)들의 얼을 담고 있는 강이다. 이 강을 따라 중화문명(中華文明)이 잉태되었는데, 그 발상지는 바로 황하 중류에 위치한 섬서성이다.
  황하의 중류지역은 중국에서 황토(黃土)의 분포가 가장 집중된 곳으로 이 지역을 황토고원이라 부른다. 원래 맑았던 황하의 물줄기는 이곳을 통과하면서 황토가 유입되어 누런색으로 변해 하류로 내려간다.
  대략 기원전 6,000년~5,000년경이 되면 이곳 황토고원에 중국문화의 서막을 여는 신석기 시대 앙소(仰韶)문화가 나타나는데06, 그 대표적인 유적이 섬서성 서안(西安 : 옛날에는 장안성으로 불렸음) 교외의 반파촌(半坡村)에서 발견된 반파(半坡) 유적이다.07 여기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모계 씨족부락을 형성하여 조와 벼를 재배하고, 돌로 도끼와 삽을 만들었으며, 뼈로 칼이나 바늘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황토로 토기를 구웠으며, 물레를 만들어 실을 뽑아 옷도 만들었다고 한다.08
  또한 섬서성의 위수(渭水) 지역은 주(周)나라의 시조인 기[棄, 나중에 후직(后稷)이라고 불림]가 살았던 곳이며, 섬서성 기산현(岐山縣) 동북쪽의 기산(岐山) 일대는 은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지배자로 우뚝 선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주 활동무대였다. 섬서성 반계[磻溪: 이곳에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조어대(釣魚臺)가 있다]는 문왕이 저 유명한 강태공을 만난 곳이며, 섬서성 주지현(周至縣)의 종남산(終南山) 누관대(樓觀臺)는 노자가 『도덕경』을 저술하고 강론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주나라의 뒤를 이어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룬 진(秦)나라, 8년 초한전쟁 끝에 세워진 한(漢)나라, 광무제와 28장이 새로 건국한 후한(後漢), 그리고 수(隋)나라뿐만 아니라 이세민과 24장이 일으킨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 중화문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던 곳도 바로 이곳 섬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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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서성 답사의 시발지는 함양(咸陽) 국제공항이다. 섬서성의 성도(省都)는 서안이지만, 공항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70㎞ 떨어진 함양에 있다. 과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진(秦)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은 항우와 유방이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 서로 먼저 점령하려는 경쟁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함양 국제공항 주변에는 광활한 평야에 작은 촌락들만 군데군데 있을 뿐이어서 무척 외롭게 보인다. 게다가 공항은 비교적 크고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있기는 해도 중국적인 느낌을 전혀 전해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염제신농씨가 농사와 의약을 널리 펼친 곳,  섬서성 보계

  서안(西安)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약 180㎞를 가면 보계시(寶鷄市)가 나온다. 섬서성 제2의 공업도시인 보계는 염제신농씨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널리 펼친 곳이다.
  대략 5,000년 전, 천수(天水: 지금의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난 신농씨는 유목을 하던 부족과 함께 강수(姜水: 지금의 섬서성 보계)로 옮겨와 살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수렵과 과일 채취만으로는 식량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이에 신농씨는 먹을 수 있는 곡물을 골라 심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특히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발명함으로써 농경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그는 시장도 만들어 백성들이 교역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각종 풀들의 약성(藥性)을 밝혀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농업과 의약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신농씨는 만년에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찾던 중 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맛보다가 중독되어 손도 쓰지 못한 채 장이 끊어져 죽었다고 한다.
  사료에 따르면 신농씨의 자손들은 530년 동안 모두 8대가 전해졌다고 하니 염제(炎帝)는 모두 8명이 있는 셈이다.(도표 참고) 이 기간 동안 보계에는 신농씨 부족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고, 인구가 증가하자 그 부족은 중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이로 인해 중국 각지에는 신농씨에 대한 유적과 전설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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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대 염제신농씨의 능인 염제릉[炎陵]은 호남성(湖南省) 주주시(株洲市) 염릉현성(炎陵縣城) 서쪽 17km 염릉산(炎陵山) 위에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신농씨 사후 3,000년이 지난 서한(西漢)때 만들어진 것이고 현존하는 건축물은 967년 송나라 때에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1대 염제신농씨가 실제로 활동했던 지역은 보계이기 때문에 이 염제릉에는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에 신농씨의 유적이 남아있는 보계의 상양산(常羊山)에 염제릉이 또 하나 세워졌으니, 이 능은 호남성의 그것보다 더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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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서성 보계 상양산에 있는 염제릉 입구

2 염제대전 안에 있는 신농씨의 동상

3 염제대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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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염제능원(炎帝陵園) 비석과 상양산(常羊山) 비석

5 염제능원의 전개도

6 염제릉에 들어가는 정문

7 현재 염제대전 뒤로 염제릉의 증축 공사가 한창인데 산 정상에 95m 높이의 동상을 건립할 것이라고 한다.


   황제헌원씨가 신농씨의 서거 소식을 듣고 보계 천태산(天台山)의 분향대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농씨의 49제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422년 진(晉)나라 영공 3년에 보계 오산(吳山) 남쪽에 제단을 만들어 신농씨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그때 이후로 보계에는 2,000년이 넘도록 신농씨에 대한 제사가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이곳 보계 염제릉에는 매년 음력 7월 7일이 신농씨의 기일(忌日)이라 하여 성대한 제사의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보계의 염제릉은 안내판이 없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으나, 보계시에서 상양산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시 외곽에서 소박한 형태의 염제릉 입구를 찾을 수 있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오르면 상양산 비석과 염제릉원(炎帝陵園), 그리고 ‘화하시조(華夏始祖)’라는 편액이 걸린 염제릉 정문이 보인다. ‘화하(華夏)’는 중국의 또 다른 이름이니, 중국인들은 신농씨를 그들의 시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농씨는 중국인들의 조상이라는 측면에서만 받들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농씨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賣藥)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요.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의 은혜를 보답하리라.”(예시 22절)는 상제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농씨는 전 인류에게 큰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정문을 지나면 신농씨를 모신 염제대전(炎帝大殿)이 있다. 그 안에는 양손에 곡물과 약초를 든 신농씨의 동상이 크게 조성되어 있다. 근육이 울퉁불퉁하며 우람한 이 동상은 육체미만 뽐내고 있을 뿐, 백성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인자한 모습이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진한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염제대전 뒤로는 염제릉 증축 공사가 한창인데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는 높이 95m의 신농씨 동상도 건립될 예정이라 한다. 아직은 염제릉 조성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그 규모 또한 생각보다는 작은 감이 있으나, 이곳 상양산에 서면 산 아래 멀리 위수(渭水)가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유역에서 신농씨가 백성들을 위해 농사와 의약을 가르치던 모습을 눈에 그려볼 수 있다. 

 

 

황제헌원씨의 능이 있는 작은 시골마을, 섬서성 황릉현

  중국 한족(漢族)들은 스스로를 ‘염황(炎黃)’의 자손이라 하는데, ‘염(炎)’은 염제신농씨를 ‘황(黃)’은 황제헌원씨를 말한다. 약 4,800년 전에 태어난 헌원씨는 천문과 지리, 인사(人事)에 관한 제법(諸法)을 편 문명의 개조(開祖)로서 4,617년의 주기를 갖는 선천 원(元)의 첫 장을 열었으며, 인류 역사의 기록도 이로부터 시작하였다.09
  헌원씨는 성이 공손(公孫)이고 이름이 헌원(軒轅)이며, 하남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서북(일명 헌원의 언덕이라고 불림)에서 태어났다. 그는 웅부족(熊部族)의 수령이 되자 ‘웅씨’라고 불렸고, 각 부족 연맹의 공동 수령이 되었을 때부터는 ‘황제(黃帝)’라고 칭해졌다. 그 시절에는 대규모의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전쟁이 끝나자 황제는 천하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하였다. 또한 배와 수레를 발명하고, 집 짓고 옷 짜는 법을 널리 알렸으며, 창힐과 영륜에게 각각 문자와 악기를 만들게 하는 등, 모든 문물과 제도를 확립했다고 전한다. 헌원씨는 100년간 재위하다가 111세에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남쪽 형산(荊山)에서 죽었으며, 섬서성 황릉현(黃陵縣) 서북의 교산(橋山)에 묻혔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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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제릉 입구

2 황제릉 정면의 모습

3 황제릉 뒷면의 모습

4 황제릉에 모셔져 있는 헌원씨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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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명지조(文明之祖)’라고 쓰인 황제릉 앞의 비석

6 황제대전 앞뜰에 있는 삼밭 솥

7 황제대전 전경 

8 염제릉 앞에 있는 한무선대

 

  전설에 따르면, 헌원씨는 수양산(首陽山)으로 가서 구리를 캐어 보정(寶鼎)을 주조하였는데, 보정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고 헌원씨는 그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그때 헌원씨의 많은 신하들이 그와 함께 승천하려고 필사적으로 용의 수염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헌원씨의 능은 섬서성, 감숙성, 하남성, 하북성에 각각 하나씩 조성되어 있고, 그중 섬서성의 황제릉(黃帝陵)이 천하제일릉(天下第一陵)이라고 하여 가장 유명하다.
  섬서성 서안에서 북쪽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약 200㎞ 정도를 달리면 작은 시골마을인 황릉현이 나오고, 그곳 교산(橋山) 정상 부근에 황제릉이 있다. 중국 유적지의 입장료가 대부분 20~40위안(약 2,400원~4,800원)인데 비해, 이곳의 입장료는 91위안(약 11,100원)으로 매우 비싸다. 그럼에도 대만까지 포함한 국내외 수많은 중국인들의 참배가 끊이질 않는다. 황제릉을 처음 보면, 높이 3.6m, 둘레 48m로 후대에 만들어진 다른 황제들의 능에 비해 초라한 규모인데다, 능위가 수풀이 무성하고 잡목도 몇 그루 자라고 있는 등 제대로 단장되어 있지 않아 능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황제릉 앞에는 높이 13.3m의 한무선대(漢武仙臺)가 있다.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140)~87(86)]가 군사 18만 명을 이끌고 북방을 순시하다가 이곳에 들러 헌원씨에게 제사를 지내고, 자신도 헌원씨처럼 신선이 되어 승천하고자 병사들에게 명하여 각 병사 한 사람이 한 움큼의 흙으로 대(臺)를 쌓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한무선대라고 한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여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년씩 수명이 늘어난다고 한다.
  공산화 이후 중국을 하나로 묶을 이데올로기의 부재로 고민하던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의 시조 헌원씨를 내세워 민족의 동질감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중국 정부는 1961년 황제릉을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뒤, 199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거금을 들여 대대적인 정비 사업에 들어갔는데, 이때 중국 한족들이 능의 보수 작업을 위해 약 2억 위안(약 26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을 모금했고, 12년 동안 보수 공사에 쓰인 돈만도 3억4천만 위안(약 42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 결과 2004년 황제릉 아래에는 전체 면적이 567,000㎡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황제릉 제사대전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 제사대전은 현대적 건축물이라는 느낌만 들뿐 중국 고유의 색채를 별로 찾아볼 수 없어서, 전통과 현대를 적절히 조화하여 지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준다.
  최근 중국 당국은 헌원씨의 제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데, 동북공정의 예와 같이 이런 의도가 새로운 중화민족주의를 만들려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01 중국은 남북 5,500㎞, 동서 5,200㎞으로 면적이 960만㎢에 달한다.

02 중국의 인구는 2005년 6월 기준으로 13억 631만 3,812명이라고 한다. 한족(漢族)이 92%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나머지 8%는 조선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장족 등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03 생산이나 생활의 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구조물. 도로, 항만, 철도, 발전소, 통신 시설 따위의 산업 기반과 학교, 병원, 상수·하수 처리 따위의 생활 기반이 있다.

04 특히 중국은 문화대혁명(1966∼1976) 때 홍위병(紅衛兵)들에 의해 전통 문화가 많이 파괴되었다. 홍위병들은 1960년대 중국공산당의 청년운동에 가담한 학생들로 모택동(毛澤東)을 지지하면서 중국의 옛 문화를 구시대적 문화유산이라 규정,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의 과도한 활동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당황한 중국정부는 정규군을 투입하여 해산시켰으나, 이미 중국의 많은 문화재들은 파괴된 뒤였다.

05 중국에는 31개의 행정구역이 있다. 성(省)이 22개, 소수민족 자치구가 5개[내몽고(內蒙古)·광서장족(廣西壯族)·영하회족(寧夏回族)·신강유오이(新疆維吾爾)·서장(西藏=티베트)], 직할시가 3개[북경·상해·천진(天津)], 특별행정구가 1개(홍콩)이다.

06 1964년에 황토고원인 섬서성 남전현(藍田縣)의 공왕령(公王嶺)에서 약 100만 년(혹은 70만 년)전에 살았던 남전원인(藍田原人)의 두개골이 발굴됨으로써, 황토고원에는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07 앙소문화는 하남성(河南省) 서부, 산서성(山西省) 남부, 섬서성 중부에 널리 분포하는데, 그것들은 섬서성 서안(西安)의 반파(半坡)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파 유형의 문화와, 하남성 섬현(陝縣)의 묘저구(廟底溝)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묘저구 유형의 문화가 있다.

08 서영빈, 『중국의 불가사의』, 대산출판사, 2001, pp.80~83

09 교운 2장 26절, <전교(傳敎)> 참고.

10 「<傳敎> 統會의 연대와 그 관련 역사」, 『상생의 길』 제3호, 대순진리회출판부, 2005, pp.141∼14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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