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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하남성을 다녀와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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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원 작성일2019.03.20 조회1,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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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이재원

 


 

주문왕(周文王)과 강태공이 만난 조어대(釣魚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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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어대

 

  

  10월 11일. 첫 번째 행선지인 반계(磻溪) 조어대(釣魚臺)는 강태공(姜太公)이 낚시를 하면서 세월을 보낸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주 문왕(周文王)에게 발탁되었다. 문왕에게 발탁될 때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강태공에게는 72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온 것이다. 강태공의 일은 꿈이 있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태공이 ‘세월을 낚은 것’ 혹은 ‘문왕을 낚은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강태공이 어찌 허송세월 했으랴. 그는 앞날을 대비하여 끊임없이 공부하고 단련하였기에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이 강태공과 일반 낚시꾼들이 다른 결정적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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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들은 그를 병법(兵法)의 시조(始祖)라 하여 ‘무조(武祖)’라 칭한다. 그리고 당(唐)왕조는 그를 ‘무성왕(武成王)’으로 봉(封)했는데 이는 강태공이 문선왕(文宣王) 공자와 더불어 문(文)과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 실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 강태공을 접하는 사람들은 그를 지칭하는 이름이 다양하다 보니 진짜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서 잠깐 그의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태공(姜太公)은 성(姓)은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다. 자(字)는 자아(子牙)이고 호(號)는 비웅(飛雄)이다. 


  그는 성(姓)이 강(姜)과 여(呂)로 둘이다. 그의 선조는 염제(炎帝)의 후손으로 이들은 대대로 위수(渭水)01의 지류(支流)인 강수(姜水) 유역에 살았으므로 강(姜)이 성이 되었다. 그리고 강태공의 선조는 우(禹)임금의 치수(治水)에 공을 세워서 여(呂) 땅을 분봉(分封) 받았기 때문에 ‘여(呂)’ 또한 성이 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상(尙)’인데 본명보다는 ‘태공(太公)’으로 더 잘 알려진 것은 주 문왕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를 보면, 문왕은 사냥을 나왔다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로 소일(消日)하던 강상(姜尙)과 문답을 나누던 중 그가 뛰어난 인물임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대의 태공(太公)때부터 이르길 “장차 성인(聖人)이 주(周)나라에 올 것이니 주나라는 그로 인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진정 그분이 아니십니까? 우리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고 그를 ‘태공망(太公望, 태공께서 기다린 인물)’이라 부르며 수레에 함께 타고 돌아왔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때 태공(太公)이란 아버지나 조부(祖父)를 의미한다. 따라서 문왕의 부친인 계력(季歷)이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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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낚시꾼의 대명사(代名詞)가 된 ‘강태공’, 그리고 그 유래를 만든 역사적 현장인 조어대를 직접 보러 간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데 보계(寶鷄)에서 반계(磻溪) 조어대로 가는 길도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포장이 부실한 이곳의 도로는 진흙탕으로 변했고 조금 심한 곳은 웅덩이가 생겼다. 도로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도(人道)와 차도(車道)를 구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정표(里程標)나 안내 표지판도 부실했다. 꼭 1970년대 우리나라 도로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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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어대 가는 길목에 있는 조형물, 주문왕방현(周文王訪賢)

 

 

  이런 도로 사정으로 혹시 길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조어대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멋진 조형물 즉 ‘주문왕방현(周文王訪賢)’이 우리 일행이 길을 제대로 찾았음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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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어대에 도착하니 일단 외관은 잘 꾸며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조어대 입구까지는 잘 정비되어 있고 바닥은 장기판으로 꾸며 놓았다. 거기에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六韜)』를 대형 죽간(竹簡)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아이디어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태공조어대(姜太公釣魚臺)」란 현판에 들어서니 본관에 해당하는 봉신궁(封神宮)에 이르는 길이 있고 그 길 끝에 강태공의 상이 있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중국 역사에서 전략(戰略)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입상이 세워져 있다. 전국(戰國)시대 연(燕)의 무장(武將)인 악의(樂毅)를 비롯하여 오기(吳起), 손무(孫武), 사마양저(司馬穰), 백기(白起), 한(漢)나라의 장량(張良), 한신(韓信), 제갈량(諸葛亮), 끝으로 당(唐)의 이정(李靖), 이세적(李世勣)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명의 인물들이다. 이 모습을 보니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02


  봉신궁(封神宮) 내부는 강태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인형으로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인형은 조잡했고 더군다나 먼지까지 쌓여 전체적인 인상을 흐리게 만들었다. 꼭 이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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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신궁을 나와서 강태공과 주문왕이 만난 진짜 조어대로 가는 길은 오히려 상쾌했다. 계속해서 온 비에 물의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 정도쯤에서 낚시를 한 것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비석 밖에 없었지만 조악(粗惡)한 인형뿐인 봉신궁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런데 조어대 가는 길에 보니 ‘촉한(蜀漢) 건흥(建興) 6년(228년) 제갈무후(諸葛武侯) 일출기산(一出祁山) 조운(趙雲), 등지(鄧芝) 둔병처(屯兵處)’라는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여기에도 제갈량의 군대가 왔었던가? 가슴이 뭉클했다. 제갈량은 이렇게까지 열심히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갔었던가? 이는 달리 생각하면 제갈량이 얼마나 대중(大衆)의 사랑을 받았는지 실감나게 해 준다. 이런 작은 흔적까지도 사람들은 놓치지 않고 제갈량의 이름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다음 방문지가 바로 제갈량이 최후를 맞이한 오장원이었다. 

 


제갈량이 최후를 맞이한 오장원(五丈原)

 

  제갈량(181~234)은 삼국시대 촉(蜀)을 이끈 명재상이자 전략가로 상제님께서도 그의 공명정대를 본받으라고 하실 정도의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명성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장원’은 제갈량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익히 알려진 지명이다. 필자로서는 오장원을 방문한다는 것이 감격적인 일이었다. 『삼국지연의』 독자(讀者)의 한 사람으로 이런 역사적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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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량은 27세에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응해 출사(出仕)했다. 이후 그의 삶은 ‘한실부흥(漢室復興)’이라는 대업 완수를 위한 것이었다. 222년 유비가 관우의 복수전에 나섰다가, 이릉(夷陵)에서 참패하고 백제성(白帝城)에서 죽는다. 


  유비 사후(死後) 국정(國政)의 전반을 책임지게 된 제갈량은 패전의 수습과 오(吳)와의 동맹 재건, 그리고 남만(南蠻) 경영(經營)을 통해 정권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정비를 바탕으로 위(魏)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227년부터 그가 죽는 234년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위(魏)를 공격하였고 그 마지막이었던 5차의 원정에서 과로사(過勞死)했는데 그 최후의 장소가 오장원이었다. 


  그런데 왜 오장원이었을까? 이는 독자(讀者)의 한사람으로서 궁금한 사안 중 하나였다. 장(丈)을 자전(字典)에서 찾아보면 길이의 단위로 10척(尺)으로 나와 있다. 1척(尺)은 0.235m이다. 오장(五丈)이면 11.75m이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오장원이 군대가 주둔하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와 기타 관련 서적을 통해서는 더 이상의 확인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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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장원 가는 길은 조금은 고지(高地)로 올라간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했다. 오장원에서 명칭(名稱)의 유래를 물으니 ‘오장원’은 ‘오십장원(五十丈原)’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평지에서 이곳까지의 높이가 오십장(五十丈)이라는 것이다. 오십장이면 117.5m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높이에 펼쳐진 평원이면 군대의 주둔지로는 적당하다. 적이 나타나도 바로 알 수 있고 대응할 시간도 확보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여기서 제갈량이 오장원에 펼친 마지막 포진(布陣)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변을 보면 삼면에 강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막이 형성되어 있고 어느 정도의 고지에 위치해 있어 적의 동태를 관망할 수 있다. 그리고 진령(秦嶺)이 있어서 사마의(司馬懿) 군이 제갈량의 배후를 공격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포진만 봐도 제갈량의 명성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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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비가 내리는 오장원은 그 입구부터 운치가 있었다. 「오장원제갈량묘(五丈原諸葛亮廟)」라는 현판이 있는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에 위연(魏延)03과 마대(馬岱)04가 마치 사찰(寺刹)의 사천왕처럼 서 있다. 정말 의외였다. 마대는 그렇다고 해도 위연은 제갈량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든 장수이다. 그리고 마대는 그 위연을 처단한 장수이다. 왜 이렇게 배치하였을까? 참으로 궁금하였다.


  조금 더 들어가면 「장상사표(將相師表)」라는 현판 밑에 제갈량의 상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죽은 뒤에 의관(衣冠)을 묻었다는 의관총(衣冠塚)과 별이 떨어지고 제갈량이 죽었음을 알려주는 낙성석(落星石)이 있다. 그리고 제갈량의 휘하 장수들과 문관들을 따로 상을 모셔 놓아 인상적이었다.


  오장원을 둘러보니 이미 1,80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 살아서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 제갈량이 나에게 묻고 있다. “너는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느냐?” 

 

 
기산(岐山) 주공묘(周公廟) 


  다음으로 간 곳은 기산(岐山) 주공묘(周公廟)였다. 기산은 주나라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은(殷)나라 말기 주(周) 문왕(文王)의 조부(祖父)인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일족을 이끌고 현재 순읍(旬邑) 빈현(彬縣) 일대에서 이곳 기산(岐山)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우니 국호를 ‘주(周)’라 했다. 이후 3대(代)를 거쳐 주 왕조가 개창하였으며 이로부터 평왕(平王)때 동천(東遷)하기까지 400년간 이곳 기산은 서주(西周)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다.


  주공묘는 주공(周公) 희단(姬旦)을 모신 사당이다. 희단은 주(周)나라 창업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완성한 인물로 문왕(文王)의 아들이요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주공묘는 상당히 오래된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고색창연(古色蒼然)이라는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당(唐) 초기인 618년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명(命)으로 건립되어 역대(歷代)로 수리되고 오늘에 이른 것으로 명(明)나라 때 완성된 것이다. 꽤 낡았지만 전체적으로 품위 있는 건물과 배치였다. 입구에서 쭉 걸어가면 주공의 상(像)을 만나게 된다. 공자(孔子)가 그렇게 숭앙했던 인물, 주공 희단의 상(像)을 대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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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나라는 은(殷)을 멸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주무왕은 나라의 기틀이 채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만다. 이때 어린 성왕(成王)을 보필하게 된 희단은 성실하게 그 임무를 완수하여 유가(儒家)에서는 그를 ‘원성(元聖)’으로 칭송하고 있다. 


  희단이 국정을 맡았을 때 그는 하루에 보통 70명 이상의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국정에 임한 그의 성실함은 ‘일목삼착(一沐三捉)’과 ‘일반삼토(一飯三吐)’라는 말로 남아있다. 희단이 자신에게 면담을 요청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머리를 감다가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붙들고 나왔으며 또한 식사를 하는데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 내고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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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자의 입장에서 먹던 밥을 내 뱉고 나오는 사람을 대한다면 어떨까? 방문자로서는 첫 대면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상호간의 이해가 대립되는 일이 있어도 자기주장만 펴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이런 성의를 갖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대사(大事)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단의 처신은 대사를 맡은 사람의 일처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렇듯이 최선을 다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잡았지만 성왕(成王)이 장성하자 정권을 넘겨주고 자신은 국정에서 물러났다. 공자가 희단이란 인물에 반한 이유를 알만 했다. 희단은 ‘공수신퇴(功遂身退)’05를 장량보다 먼저 실천한 인물이 아닌가. 


  주공묘는 희단만 모신 곳은 아니다. 주(周)나라의 시조(始祖)인 후직(后稷) 희기(姬棄)와 희기의 모친 강원(姜嫄), 소공(召公) 희석(姬奭)과 강태공(姜太公), 그리고 문왕의 조부(祖父)인 고공단보의 세 아들 태백(泰伯), 중옹(仲雍), 계력(季歷)까지 모신 곳이다.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도 중요 인물이다. 그런데 그리 신경 써서 관리하는 곳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낡기도 했지만 한쪽에 방치된 비석더미를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단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저 그런 대접을 받을 인물들과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아쉽고 안타까웠다. 단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선진국은 아니다. 그리고 문화란 단지 금전이 있다고 갖추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때 중화(中華)라 하면 얼마나 대단했었던가. 참으로 빛바랜 ‘중화(中華)’였다.

 

 
노자가 『도덕경』을 강론한 누관대에서 김가기 기념비를 보다


  다음의 여정은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한 주지현(周至縣) 누관대(樓觀臺)였다. 누관대로 가는 길은 보계(寶鷄)와 서안(西安)을 잇는 고속도로였다. 길이 좋았지만 차량으로 3시간 30분을 달려야 했다. 중국은 땅이 넓다 보니 어딜 가나 이 정도의 이동 시간은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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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서 어느 정도 들어가니 ‘김가기 선인 기념비’라는 한글로 된 비를 만날 수 있었다. 일행은 모두 놀랐다. 그리고 반가웠다. 타향에 가면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고 하지 않던가. 중국에 와서 한글로 된 비를 보다니 그리고 그 주인공이 신라 사람 김가기(金可記)라니. 


  비석을 보면 김가기전(傳)과 두보(杜甫)의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가기는 신라(新羅) 사람으로 당으로 건너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좋아하여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기 1년 전에 당시 황제인 선종(宣宗)에게 “신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英文臺) 시랑(侍郞)이 되어 내년(859년) 2월 25일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고 상주(上奏) 하였다. 그리고 그 날짜가 되자 종남산 금선봉(金仙峰)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했는데 이때 조정신료와 많은 사람이 이를 봤다. 

 

  김가기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화등선한 것은 중국 도교 역사상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유구무언(有口無言)일 것이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김가기. 


  누관대는 노자(老子)가 도덕경을 설한 장소이다. 특정한 장소를 지칭할 수 없고 이곳 저곳 옮겨다니면서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까닭으로 이곳의 도관[道觀, 도교(道敎)의 사원(寺院)]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기』 「노자열전(老子列傳)」을 보면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이 살던 전한(前漢) 시대에 노자는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노자열전」에 의하면 노자는 주나라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이(李耳)로 주나라가 쇠미해져 가자 주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그때 윤희(尹喜)의 청을 받아 도덕(道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서술했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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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남산(終南山) 고누관(古樓觀)

 

 

  입구부터 전체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설경대(說經臺)의 계현전(啓玄殿)은 노자가 『도덕경』을 강론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전각으로 당(唐)나라 초기인 619년에 건축된 것이다. 당(唐) 왕실은 노자와 자신들의 성(姓)이 같다는 점에서 도교(道敎)를 왕실에서 보호하였다. 그리고 당의 역대 황제들 또한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도 연단(煉丹)06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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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남산(終南山)은 산 자체가 도교의 성지이고 누관대(樓觀臺)와 설경대(說經臺) 또한 꾸준하게 정비되고 관리되어 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계속해서 사람의 손길이 간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확연히 구별이 된다. 어느 곳이라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 누관대였다. 누관대를 마지막으로 이 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안으로 돌아왔다.

 

 
주 문왕과 무왕의 주릉(周陵)과 한 고조(漢高祖)의 장릉(長陵)


  10월 12일 중국 답사의 4일째가 되는 날이다. 이 날의 일정은 주 문왕과 무왕의 능인 주릉(周陵)과 한 고조 유방(劉邦)의 장릉(長陵) 그리고 당 태종(太宗)의 소릉(昭陵)이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렀다. 그러다 보니 중국 사람들이 아침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을 주로 바깥에서 해결한다. 길거리에는 이 시간만 운영하는 간이식당이 꽤나 많았다. 


  빵이나 만두 몇 개에 멀건 죽 한 그릇이 일반적인 식단이었다. 그리고 대략 5분~10분 정도면 요기를 하는 데 충분한 것 같았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중국의 여성들은 참으로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은 이렇게 끝내고 점심도 바깥에서 먹고 저녁마저 외식이면 여성이 집에서 음식으로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지 않은가. 외국에 나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차려주기 위해 아침잠의 달콤함을 뿌리친 한국의 여성들 특히 주부들의 헌신적인 가족 사랑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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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방문지는 주릉이다. 주 문왕과 무왕의 능으로 동산이 두 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이곳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인 모양이다. 대신 문왕과 무왕의 일을 그림으로 표현한 전시실이 있었는데 그 그림들이 아주 멋졌다. 


  그리고 이 주변은 대개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줄줄이 능이었다. 지도상에는 분명히 누구의 능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다가가 보니 표지석(標識石)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큰 비석이 있는 경우에도 훼손이 심해 어떤 글이 쓰여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에 조성된 능과 분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수풀이 무성하고 어떤 곳은 훼손의 흔적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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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릉 다음으로 우리가 가고자 한 곳은 한 고조 유방의 능인 장릉(長陵)이었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장릉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의 기사가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한 짱릉?”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한 짱릉?”


  단지 한마디뿐이었지만 중국말을 모르는 필자도 그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 뭐 볼 것이 있다고 가느냐는 짜증 섞인 대답이었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곳곳에 동산처럼 있어서 사람의 통행에 장애나 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저 무덤에 누가 누워 있는지 알게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사는 그 할아버지에게 중요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겨우 찾아갔지만 장릉으로 가는 길은 끊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옥수수 밭에 가로 막혀 멀찍이 있는 두 개의 능을 보고 왔을 뿐이다. 봉분이 두 개인 것은 장릉이 한고조 유방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여태후(呂太后) 여치(呂雉)의 합장릉(合葬陵)으로 각각 봉분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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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를 통틀어 600여 명의 제왕(帝王)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600여 개의 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방(劉邦)은 한(漢)이라는 나라를 만든 인물이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하는 근거가 되는 나라를 만든 사람이 한 고조 유방이 아닌가? 뭔지 모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가 높다. 또한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필자가 중국에서 느낀 이런 감정을 어떤 외국인이 우리의 문물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아닐까?


  여기도 능이요 저기도 능인 이곳에서 노래 한 자락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도하게끔 이끌어 주신 선각들과 천지신명께 감사했다.

 

 

낙양성 십리 허~예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며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모양이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성주풀이’ 중에서)

 

 


01 지금의 위하(渭河)로 섬서성(陝西省) 중부에 있다.

02 또 말씀하시기를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 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강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요.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 고 하셨도다.(예시 22)

03 위연(魏延, ?~234). 촉한(蜀漢)의 대장. 원래 형주(荊州) 유표(劉表)의 부장이었으나 유비에게 귀순했다. 제갈량이 위(魏)를 공격할 때 선도(先導)를 맡은 맹장이었다. 일찍이 포중(褒中)으로부터 기병(奇兵)을 내어 장안(長安)을 취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갈량이 죽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양의(楊儀)를 공격했는데 마대(馬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04 마대(馬岱). 촉한(蜀漢)의 장군. 마등(馬藤)의 조카이자 마초(馬超)의 사촌이다. 마씨 일족이 조조에게 몰살당하고 사촌형인 마초와 함께 유랑하던 중 유비의 장수가 되었다. 제갈량을 따라 많은 공을 세웠고 위연을 죽이기도 했다. 지위가 평북장군(平北將軍) 진창후(陳倉侯)에 이르렀다.

05 공수신퇴(功遂身退) 천지도(天之道),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는 말로 출전(出典)은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9장(章)이다.

06 연단(煉丹,鍊丹) 1 중국에서 도사(道士)가 진사(辰砂)로 황금이나 불로장생의 묘약을 만들었다고 하는 일종의 연금술. 2 몸의 기(氣)를 단전(丹田)에 모아 심신을 단련하는 수련법(修鍊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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