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성, 하남성을 다녀와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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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원 작성일2019.03.21 조회1,724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이재원
당 태종의 소릉(昭陵)과 소릉박물관
주릉(周陵)과 장릉(長陵) 다음으로 간 곳은 서안에서 서쪽으로 90km 정도 떨어진 예천(禮泉)의 소릉(昭陵)이다. 소릉은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이세민과 문덕황후(文德皇后)의 합장(合葬) 능으로 주릉, 장릉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소릉 이전의 중국의 능들은 이능위산(以陵爲山)이라 하여 능이 하나의 산을 이룬 것이었다면 소릉은 이산위릉(以山爲陵) 즉 산에 능을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소릉이 있는 구종산(九山)은 가보지 못했다. 소릉박물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맑은 날에도 올라가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계속해서 오는 비로 인해 4륜 구동이 아니면 가기 힘들다고 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소릉박물관에 당태종과 24장에 관련된 자료실이 따로 조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반갑고 기뻤다. 24장을 검은 석판(石板)에 음각으로 새겼는데 사실적이면서 세밀한 인물묘사가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 첫 번째 석판에는 24절후 신명의 첫 번째인 장손무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능연각이십사공신도(凌煙閣二十四功臣圖)’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강희(康熙) 7년(1668)에 유원(劉源)이 그림을 그리고 주규원(朱圭原)이 새겼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된 ‘능연각’에 대해서는 『구당서(舊唐書)』에 정관 17년(643) 이세민이 “공신들의 모습을 능연각에 그리도록 했다.”고 한다. 너무나 간략한 이 구절에는 공신들의 이름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신들의 이름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이 어떻게 24절후를 맡게 되었는지에 추측해 볼 만한 자료는 찾지 못하였다. 단지 정관 17년 위징(魏徵)이 죽었을 때 이세민이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애통해 하였다는 구절에서 공신도를 그리게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典經』을 보면 상제님께서 “천지가 혼란하여 당 태종과 24장을 냈다.”01고 하셨는데 이제 당 태종 이세민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그의 어린 시절이다.
태종(이세민)의 나이 4세(601년) 때에 스스로 상을 잘 본다고 하는 서생이 고조(이연)를 알현하고 말하기를 “공은 귀인(貴人)이십니다. 또한 귀한 자식을 두셨습니다.” 하고 태종을 보며 말하기를 “용봉지자(龍鳳之姿)에 천일지표(天日之表)니 나이 20이면 능히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조는 이 말이 누설될 것이 두려워 그 서생을 죽이려 했으나 홀연히 사라져 소재를 알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제세안민’의 뜻으로 이름을 삼았다. 태종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밝았다. 그의 생각은 멀고 깊었을 뿐 아니라 임기응변과 결단성이 있었다. 따라서 나이가 어렸음에도 당시 사람들이 그의 생각과 행동을 능히 예측하지 못했다. (『구당서(舊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
그리고 당(唐)이 성립하는 시기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후한(後漢) 멸망 이후 약 400여 년의 난세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가 무리한 고구려 원정 끝에 몰락한다. 이 시기 중국 전역은 다시금 야심가들과 도둑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 혼란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잠시 아래의 표를 보자.
수에서 당으로의 왕조 교체기 18년간 당시 중국 전체 인구의 2/3인 3천만 명이 비명에 갔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1년 평균 166만 6천 명이 죽는 상황에서 혼란이 극심한 곳은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이 기록을 보니 상제님께서 천지가 혼란하여 당 태종을 냈다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617년 중국 전역에서 수(隋)나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미 수나라는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때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은 태원(太原) 유수(留守)였다. 이연은 수나라 황실의 인척이었으므로 봉기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주저하고 있던 이연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당시 이세민의 나이는 서생의 예언처럼 20세였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로 봐야 할까? 이후 이세민은 유력한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워 당(唐)의 성립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공로로 보자면 그는 당의 실질적인 창업 군주였다.
그러나 이세민이 황제가 되는 과정은 평탄하지 못했다. 당 창업의 혁혁한 공로가 있었음에도 두 번째 아들이라는 한계로 626년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황태자였던 첫째 건성(建成)을 제거하고서야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은 집권 초기 그에겐 큰 부담이었다. 이세민은 627년 황제가 되고 나서 과감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그 인재들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리고 항상 수(隋)가 망(亡)한 이유를 생각하면서 신중하였고 극단적인 간언(諫言)도 용납하였다. 정관 초기 신하들의 간언을 유도하는 이세민의 합리적인 자세가 관료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로써 치세(治世)의 모범이 되는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룩할 수 있었고 집권 과정의 허물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세민의 인재등용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위징(魏徵)이다. 위징은 태자 건성의 측근으로 일찍이 이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건성에게 권유한 인물이다. 이세민은 정변(政變) 후 위징을 소환하여 “어째서 형제를 이간시켰느냐.”고 추궁했다. 위징이 “태자가 일찍이 나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과 같은 화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오.”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세민은 위징을 등용하고 그의 충언에 귀를 기울인다.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댄 인물을 중용(重用)하고 그의 극언(極言)을 새겨들을 줄 알았던 대목에서 이세민의 기국(器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세민에게는 문덕황후(文德皇后)라는 양처(良妻)가 있었다. 정관 6년(632) 이세민이 위징에게 심한 소리를 듣고 와서 분을 참지 못할 때 “이제 위징이 곧은 것은 폐하가 영명(英明)하신 까닭입니다.”는 말로 이세민을 위로한 이가 문덕황후 장손씨(長孫氏)였다. 소릉은 문덕황후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정관(貞觀) 10년(636)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649년 이세민이 묻히면서 조성이 완료되었다. 이처럼 산에 능을 조성한 것은 황후의 다음과 같은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제가 죽으면 장례비용을 많이 쓰지 마십시오. 장례란 단지 땅에 묻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했습니다. 오직 무도한 시대에 능묘를 조성한다면서 천하의 비용을 쓰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여 식자(識者)들의 비웃음을 산 일이 있었습니다. 첩에게 청(請)이 있다면 산에 묻어 봉분도 쌓지 마시고 관(棺)과 곽(槨)도 쓰지 마시고 기물과 의복은 모두 나무와 토기로 대신하여 주소서. 검소하고 소박하게 저를 보내 주시는 것이 첩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구당서』 「문덕황후전」)
소릉을 시작으로 당의 18능은 모두 산에 조성된다. 소릉에는 장락(長樂)공주를 비롯한 황실의 가족들과 위징, 고사렴(高士廉), 방현령(房玄齡), 정지절(程知節), 이정(李靖), 울지경덕(蔚遲敬德), 당검(唐儉), 단지현(段志玄) 등 문무 중신들의 묘가 조성되어 주변에 합계 155인의 무덤이 있으며 부부 합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소릉 일대가 하나의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이렇듯이 소릉 주변은 당 태종과 그의 공신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내린 비로 어느 곳이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단지 소릉박물관 안에 있는 이세적의 묘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도인들이라면 누구라도 귀에 익었을 이름들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서안으로 돌아와서 서안의 성곽을 밟아보기로 했다. 성곽은 참으로 넓었다. 명(明)나라때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 성곽은 참으로 고도(古都) 서안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지장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동문인 장락문(長樂門)에서 남문까지 걸었다. 이 정도만 해도 꽤나 긴 거리였다. 성곽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도 있었고 이 구간을 오고가는 작은 차량이 있을 정도로 넓었다. 이렇게 서안의 성곽을 걷고 있으려니 서울의 옛 성곽이 생각났다. 우리도 제대로만 지켜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관람객의 90%가 외국인인 서안의 성곽을 밟으면서 우리의 도성(都城)도 이와 같았다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초패왕이 천추의 한을 남긴 역사의 현장, 홍문(鴻門)
10월 13일 이날은 홍문(鴻門)을 들르고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홍문(鴻門)은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가까운 곳에 있다. 병마용에서 서안 방향으로 나오다 보면 진시황의 여산능이 있고 여산능을 조금 지나면 홍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강변에 위치해 있고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으로 군대 주둔지로는 적당한 장소이다.
홍문은 초한(楚漢) 쟁패(爭覇)의 역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장소이다. 유방으로선 실로 위급했던 순간을 넘긴 곳이고 초패왕의 입장에선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긴 곳이다. 이때 어떤 방식으로든지 초패왕이 유방을 처단하였다면 천하는 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이란 의미가 없는 일이므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진(秦)나라에 대항하여 일어선 봉기군의 명목상 실권자는 초회왕(楚懷王)이었다. 회왕은 먼저 관중(關中)에 입성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봉하겠다고 제후들에게 천명한 바 있다. 이때 관중이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 진나라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중에 입성한다는 것은 정확하게는 수도인 함양(咸陽)에 입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패공(沛公) 유방의 군대가 항우(項羽)의 군대보다 먼저 함양에 입성한다. 초회왕의 약속대로라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함곡관(函谷關)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함곡관을 막고 제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나라의 넓은 영토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유방으로선 아주 솔깃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유방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함곡관에 군사를 배치하면서 뒤늦게 도착한 항우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방의 군대가 함곡관을 지키고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유방이 함양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함곡관을 공격하도록 한다. 이때 함곡관을 지키던 병사들은 어차피 같은 편인 항우군과의 싸움에 적극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유방의 생각과는 다르게 함곡관은 어이없이 함락된다. 아니 함락되었다기 보다는 항우군이 함곡관을 통과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항우군은 함곡관을 넘어 진시황의 여산능이 보이는 홍문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항우는 다음날 유방의 군대를 공격할 것을 천명한다.
유방의 군대는 10만에 불과했고 항우의 군대는 40만에 달했다. 게다가 항우군은 함양에 이르는 동안 진나라 군대와 대적(對敵)하면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강군(强軍)이었다. 만약 양군(兩軍)이 싸우게 된다면 양(量)과 질(質), 모든 면에서 불리한 유방의 군이 항우의 군에 패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유방으로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할 만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유방에게는 항우 진영의 이러한 움직임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항우의 계부(季父) 항백(項伯)이다. 항백은 장량과 친한 사이였다. 항백은 장량에게 항우 진영의 동향을 전해주며 유방과 같이 죽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장량은 유방에게 항백의 말을 전하면서 항우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 초패왕의 책사 범증(范增)은 유방이 사과하러 왔을 때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유방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초패왕의 동의를 얻어 냈다. 그러나 초패왕은 유방을 만난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범증은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 항장(項莊)을 따로 불러내어 검무(劍舞)를 추다가 유방을 처단하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지금 유방을 처단하지 않는다면 그대들 모두는 패공 유방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 언급과 함께. 하지만 항장이 검무를 추는데 항백이 가로 막아 유방을 살해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유방은 술에 취했음을 핑계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유방으로선 실로 사지(死地)를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의 성공과 실패는 오로지 결단에 있다. 결단을 해야 할 시점에 결단하지 못한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초패왕은 유방을 처단해야 하는 순간에 왜 주저하였을까. 범증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초패왕이 주저한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초패왕이 주저한 댓가는 컸다. 또한 초패왕의 최후는 장렬(壯烈)하여 아직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초패왕은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포위되고 자신의 군대가 흩어진 시점에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 같다.
力拔山兮 氣蓋世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時不利兮 不逝
시운(時運)이 불리하니 오추마(烏馬)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不逝兮 可奈何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虞兮虞兮 奈若何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을까.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
그리고 오강(烏江) 정장(亭長)이 배를 대고 강동(江東)으로 가길 권할 때 초패왕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유언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 건너서 무얼 하겠는가? 내가 강동의 젊은이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넜는데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그 부형(父兄)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사기』 「항우본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 한다.” 승패를 떠나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강동의 부형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에서 체면(體面)을 중시하는 초패왕의 귀족의식이 그가 망하게 된 근본 이유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 아마도 유방이었다면 참패(慘敗)했다고 자결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강을 건너가서 다시금 후일을 도모했을 것이라고 한다. 단지 그렇게만 설명하면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것일까? 『채지가』의 구절이 떠오른다.
허무하고 허무하다 세상일이 허무하다
강동자제 팔천인은 도강이서 하올적에
침선파부 결심하고 삼일량을 가지고서
백의산하 충동할제 팔년충진 겪어가며
역 발 산 기개세는 초패왕의 위풍이라
대사성공 하잤더니 천지망아 할일없네
계 명 산 추야월에 옥소성이 요란터니
팔천제자 흩어지니 우혜우혜 내약하오
오강정장 배를대고 급도강동 하렸으나
전쟁사를 생각하면 억울하고 원통하다
(『채지가』, 「뱃노래」 중에서)
홍문에 들어서면 홍문연(鴻門宴)에 참석한 인물들의 조상(彫像)이 서 있다. 초패왕과 유방을 양쪽으로 하고 가운데는 비석(碑石)이 서 있다. 비석에는 “BC 206년 12월 이곳 연회에서 초패왕 항우가 유방을 만났다.”고 씌어져 있다. 그리고 양쪽의 참석자들을 세워 놓았다. 초패왕 쪽에는 초패왕, 범증, 항장, 항백, 진평(陳平)이 유방 쪽은 유방, 장량(張良), 번쾌(樊), 하후영(夏侯), 조무상(曹無傷)이 홍문연의 참석자들이다. 그리고 홍문연에서 항장과 항백이 검무를 추는 모습을 인형으로 전시해 놓고 있다. 곳곳에 옛 고사(古事)를 떠올릴 만한 전시물이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초패왕이 솥[鼎]을 들었다는 고사에 입각한 동상(銅像)이다. 이는 초패왕의 괴력(怪力)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초패왕은 스스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다. 누구도 들지 못한 솥을 초패왕은 단숨에 들었고 이로 인해 강동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초패왕 항우(BC232~BC202)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면 그는 신비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BC145?~BC86?)의 『사기(史記)』 「항우본기」에 상세하다. 사마천이 초패왕의 이름과 행적을 「본기(本紀)」에 넣었다는 것은 그를 진시황 다음으로 천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이었으므로 최후의 순간 그가 남긴 말과 행동까지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사마천이 충실하게 조사한 인물인데 어떻게 그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항우의 부모들에 대해서는 이름이 뭔지 언제 죽었는지 그 어떤 정보도 없이 오직 삼촌들 이야기만 있다. 항우가 일반적인 인물이라면 어떻게 이해가 될 만도 하다. 그런데 항(項)씨는 초(楚)의 명문 귀족이다. 하물며 항우가 생존했던 시기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불과 5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역사에서 패자(敗者)는 모든 허물을 다 뒤집어쓰게 되어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는 승자가 쓰기 때문이다. 항우도 마찬가지다. 사마천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해도 그 역시 한(漢)의 사람이다. 항우의 행위가 아주 타당했다면 한 고조의 한(漢) 건국(建國)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초패왕은 싸움에 져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패배는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더 이상의 희생은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 자결하였다. 이를테면 기권패한 것이다. 초패왕은 왜 오강 정장의 배를 타고 강동으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일까. 필자로서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대답 없는 물음만이 맴도는 홍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기차를 이용하여 낙양으로 이동했다. 서안역은 기차표가 없는 사람은 아예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출입구에서 표 검사를 한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역 입구에 3시간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 플래카드까지 걸려있다. 낙양으로 가는 열차는 2층으로 된 관광열차이다. 낙양까지는 5시간이 걸렸는데 주변의 풍경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드디어 또 다른 고도(古都) 낙양(洛陽)이다.
(다음 편에 계속)
01 상제께서 빗물로 벽에 인형을 그리고 그 앞에 청수를 떠놓고 꿇어앉아서 상여 운상의 소리를 내시고“이마두를 초혼하여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상제봉조(上帝奉詔)에 장사하고 최 수운을 초혼하여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 오선위기(五仙圍碁)에 장사하노라”하시고 종도들에게 이십 사절을 읽히고 또 말씀하시니라.
“그때도 이때와 같아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이십 사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그들에게 밑가지 않는 대접을 받으리라.”(예시 66절)
02 백양(柏楊)지음, 김영수옮김,『 맨얼굴의중국사3』, 도서출판창해, 2005, p.1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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