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섬서성,하남성을 다녀와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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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원 작성일2019.03.21 조회2,188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이재원
하남성(河南省)과 고도(古都) 낙양(洛陽)
하남성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황하(黃河)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황하이다. 황하는 유역면적이 중국 전체면적의 7.8%를 차지하며 길이는 5,464km로 중국에서 양자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사천, 감숙, 영하회족자치구, 내몽고, 산서, 섬서, 하남, 산동을 거쳐 발해로 유입된다. 황하 유역의 신석기 문화인 앙소(仰韶), 용산(龍山) 문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하를 따라 문명이 시작되었고 이 연장선에 하남성이 있다.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뒤를 이어 하(夏)나라를 창업한 우(禹)가 봉지(封地)로 받은 ‘하(夏)’는 현재 하남성 우현(禹縣)이라고 한다. 이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걸(桀)이며 이 걸을 타도하고 상(商)을 세운 인물이 성탕(成湯)이다. 성탕이 세운 상(商, BC 1600~BC 1046)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나라이다. 전설적인 왕조로 취급되는 하(夏)와는 달리 20세기 초 하남성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에서 이른바 ‘은허(殷墟)’가 발굴되기 시작하므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갑골문(甲骨文)과 정교한 청동기로 대변되는 상(商)은 은(殷)이라고 하는데 상(商)의 20대 왕인 반경(盤庚)이 기원전 14세기 도읍을 은(殷)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은상(殷商)이라고도 한다.
하남성은 중원(中原) 혹은 중주(中州)라 불리는 곳으로 13개 중국 왕조의 도읍이었던 낙양(洛陽)과 송(宋)의 도읍이었던 개봉(開封) 그리고 현재 하남성의 청사가 있는 정주(鄭州)가 주요한 도시이다. 이중에서 낙양(洛陽)은 황하(黃河)의 지류인 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한다. 낙양의 역사는 BC 11세기 주(周)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築城)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낙읍(洛邑)이라 하였다. 그리고 호경(鎬京) 즉 지금의 서안(西安)에 도읍했던 주(周)나라가 BC 770년 이곳으로 천도(遷都)한 후 BC 250년 진(秦)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주의 도읍이었다. 이후 후한(後漢, 25~220),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 220~265), 그 위를 이은 서진(西晉, 265~316) 그리고 남북조(南北朝, 439~589) 시대에 북위(北魏)의 도읍이었고 수(隋, 581~618)나라 이후 동도(東都)로 불려졌다.
수당(隋唐) 시대에 낙양은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산이 모이는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원(元), 명(明), 청(淸) 시대에 일개 지방 도시로 전락하여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 일행이 낙양에서 들러야 할 곳은 맹진현에 있는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의 능과 관운장의 무덤인 관림(關林)이었다. 어딜 가도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고 도로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는 것은 서안과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공사 현장의 타워크레인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서안에 비하면 조용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 분위기였다.
광무제원능(光武帝原陵)과 28수관(宿館)
10월 14일 낙양 역 주변에 버스터미널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후한(後漢)의 창업자 광무제 유수(劉秀)의 능이 있는 맹진현(孟津縣)으로 향했다. 옛 생각을 나게 하는 버스였다. 나이 어린 차장이 “멍진~, 멍진~”을 외치며 표를 받았다. 맹진에서 다시 능이 있는 회맹(會盟)까지는 택시를 탔다. 약 20분.
광무제능은 입구부터 잘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서 쭉 걸어가면 주릉, 장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껴진다. 제왕의 무덤다운 품위가 있다고 할까.
▲ 28수관 내부모습
광무제능에는 28수 신명과 관련하여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입구에서 능으로 가는 길옆에 ‘이십팔수관(二十八宿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동서(東西) 두 칸의 전각에 28분의 인물상이 모셔져 있었다. 반갑고 기뻤다. 그 면면을 보니 너무 생생하게 인물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이 살아 있었을 당시의 한 장면을 포착하여 표현한 듯하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에는 작은 안내판이 딸려 있다. ‘태부고밀후(太傅高密侯) 등우(鄧禹)’, ‘중산태수전초후(中山太守全椒侯) 마성(馬成)’ 이런 식으로 이름이 있고 이름 아래에 해당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다. 그런데 24장과 같은 그림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는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28장의 용모와 의상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을까?
광무제 능에 가기 전에 광무전(光武殿)이 있다. 광무제의 일생을 그림과 글로 설명하고 있으며 광무제의 상과 그를 보필한 또 다른 신하들의 상이 같이 있다. 광무전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에는 송(宋)나라에서 세운 비(碑)가 있다. 이름이 ‘대송신수후한광무황제묘비(大宋新修後漢光武皇帝廟碑)’로 973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광무제의 능이다. 능이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고 능 위까지 길이 나 있는 것은 주릉(周陵)과 같다.
여기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당시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진시황(秦始皇)의 통일제국이 멸망하고 초한(楚漢) 쟁패(爭覇)를 거쳐 한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를 전한(前漢, BC 202~AD 8) 또는 서한(西漢)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한(前漢) 말 황실의 외척으로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은 왕망(王莽, BC 45~AD 23)이 AD 8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양(禪讓)’이라는 미명(美名)의 궁정쿠데타를 통해 한(漢)나라를 타도하고 스스로 등극하여 신(新, 8~23)을 세웠다. 이러한 형식의 왕조 교체는 이후 다른 권력자들에 의해 답습된다. 그런데 새롭게 정권을 수립한 왕망은 유교의 이상주의에 입각하여 정전제(井田制)와 같이 복고적(復古的)이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반발과 추진과정에서의 오류 그리고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대응으로 개혁은 고사하고 이것이 전국적인 혼란의 빌미가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후한이 건국되기까지 무려 21년간 지속되었다. 후한의 창업자 유수(劉秀, BC 6~AD 57)는 한 고조의 9세 손(孫)으로 AD 22년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 하남성 섭현)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게 된다. 이후 전국적인 혼란을 수습하여 AD 25년 다시금 한(漢)을 세우고 낙양에 도읍하니 이를 후한(後漢, 25~220) 또는 동한(東漢)이라 한다. 이때 유수를 도운 28명 뛰어난 신하들을 ‘중흥(中興) 28장(將)’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광무제능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28장에 대한 기록은 범엽(范曄, 398~445)의 『후한서(後漢書)』에 보인다. 이를 보면 유수(劉秀)를 이어 제위(帝位)에 오른 명제(明帝) 유장(劉莊)이 옛일을 생각하고 감회에 젖어 ‘28장(將)’을 남궁(南宮) 운대(雲臺)에 그리도록 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28장은 원래 하늘의 28수(宿)를 관장하였는데 땅에 내려와 광무제를 도왔다고 하니 이 설명을 따르면 이들이 신명이 된 것은 ‘원대복귀(原隊復歸)’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한의 창업자 유수는 숱한 난관을 뚫고 제위(帝位)에 오른 인물로 당 태종 이세민과는 600년의 차이를 두고 비슷한 점이 많다. 유수는 31세인 25년 즉위하고 33년간을 재위했다. 이세민은 29세인 626년 제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28장과 24장으로 일컬어지는 탁월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았다. 또한 두 사람은 실질적인 창업 군주이면서도 한 고조 유방과 당고조 이연의 한발 뒤에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도 닮았다. 6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런 인물들이 일시에 등장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뜻일까?
24장, 28장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문득 해묵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인간 세상에 어느 정도 혼란이 와야 하늘이 움직이시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거 희생되는 아주 처참한 일을 겪고 나면 하늘도 무심하다고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가.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라 하면서, 신(神)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24장과 28장의 경우 하늘은 인간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환란을 평정시킬 임무를 띤 신명을 지상으로 보내셨다.
상제님께서는 “그때도 이때와 같아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이십 사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그들에게 밑가지 않는 대접을 받으리라”(예시66절)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데 하늘이 나서실 정도의 혼란이란 가히 예측불허이다. 기록을 보면 이때 세상은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선 답사기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수(隋)에서 당(唐)으로 왕조 교체의 혼란기 20여년에 중국 전체 인구의 2/3가 비명에 갔다. 그렇다면 후한 창업 과정에선 어떤 희생이 뒤따랐는가? 잠시 <인구변화표>를 보자.
아무리 왕조 교체기의 혼란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피를 봐야 했을까. 엄청난 희생이었다. 모두가 다 죽어서 조사대상이 되지 못한 곳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균 10에 8명은 죽었다. 이 기록을 통해 “묵은 하늘이 사람 죽이는 공사만 보았다.”02고 하신 상제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면 모든 신성, 불, 보살의 청원으로 상제님께서 직접 나서실 수밖에 없는 “지금은 어떠할 것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상제님께서는 “이제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교법 1장 1절)고 탄식하셨지만, 오히려 “대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편하리라. 닥쳐오는 일을 아는 자는 창생의 일을 생각하여 비통을 이기지 못하리라.”(교법 3장 46절)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참으로 상제님의 말씀은 조금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섭고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관운장을 모신 관림(關林)
광무제능 다음의 행선지는 관운장의 무덤인 관림(關林)이다. 『삼국지연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관운장(關雲長, ?~219)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인물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219년 관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조조가 오(吳)의 손권과 손을 잡게 된다. 손권은 형주(荊州)를 공격하여 관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그의 목을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관우의 죽음이 불러올 파장을 염려하여 당시로서는 수도였던 이곳 낙양에 그의 목에 나무로 된 몸을 붙여서 후하게 장사(葬事)지냈다.
▲관림 입구
관운장은 생전에도 상당히 중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관운장처럼 죽을 때는 일개 장수였으나 죽고 난 다음 급격하게 신분 상승을 이뤄 ‘제(帝)’가 된 인물이 또 있을까.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아마 관운장이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한다.
한자를 보면 사람의 죽음에도 등급이 있고 죽은 뒤에도 등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도 묻힌 인물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각각이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중에서 최상급은 ‘성인(聖人)’에 해당하는 ‘림(林)’일 것이다. 중국에서 이 ‘림(林)’을 칭한 곳은 두 군데이다. 곡부(曲阜)에 있는 ‘공림(孔林)’과 이곳 낙양의 ‘관림(關林)’이다. 이미 무덤의 이름만 봐도 관운장은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급(聖人級)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관림(關林)은 특징적인 곳이다. 관림의 안내판을 보면 묘(廟), 총(塚), 림(林)이 같이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A의 숫자로 유적지들의 등급을 매기고 있는 듯한데 관림에서 보는 것 같은 AAAA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관림은 입구부터 잘 정비되어 있다. 작지 않은 규모에 품위 있는 건물 배치와 세련된 장식들이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다른 능과 달리 도시 한가운데 있어 마치 공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이유로 접근성도 용이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임에 분명했다.
관림 입구에서 관운장의 무덤인 ‘관우총(關羽塚)’에 이르기까지 3개의 전각(殿閣)을 지나야 한다. 첫 번째 만나는 대전(大殿)이 제일 큰 것으로 1593년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21년에 건축된 것이다. 다음의 전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건립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전각은 1817년 청(淸)나라 인종(仁宗) 가경(嘉慶) 22년에 건립된 것이다. 이 세 개의 전각을 거쳐서 비로소 관우총에 이르게 된다. 관우총의 주변은 나무와 돌로 된 의자와 탁자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마치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
전각마다 관운장을 모셔 놓고 있지만 조금씩 다른 모습들이다. 그 중에서도 대전에 모셔져 있는 관운장이 가장 크고, 관운장 주변에 관운장을 따르던 가신(家臣)들이 같이 서 있다. 웅장한 크기와 화려한 장식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하나 같이 정성들여 모신 상이었고 그림이나 장식도 깨끗했다. 색깔이 바래진 그림들은 보수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관운장이 역대(歷代) 황제 못지않은 대접을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중국 지도를 살펴보면 중국 전역에 ‘관제묘(關帝廟)’라는 관운장의 사당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에 나타난 것이 이 정도면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셀 수 없이 많은 관운장의 사당이 중국 전역에 있다는 말이 된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사랑을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이는 관운장이 재물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져 장사하는 이들에겐 숭배의 대상인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따라서 관운장에 대한 제사는 관림에서 해마다 성대하게 펼쳐지는 국제적인 행사로 해외에 있는 화교들까지 참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안내판이 있었다.
관운장이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재신(財神)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죽어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관운장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되묻게 한 관림이었다.
다시 서안 그리고 귀국
10월 15일 새벽에 낙양을 출발하여 오전 6시 30분 서안에 도착했다. 이날은 귀국 준비와 함께 서안에서 돌아보지 못한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간 곳은 자은사(慈恩寺)이다. 이곳은 당 고종이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위해 세운 황실 사찰이다. 당 말기의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고 67m 높이의 대안탑(大雁塔)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안탑은 우리에게 서유기(西遊記)로 잘 알려져 있는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그 경전의 보급과 번역을 위해 652년 당 고종 때 세운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말 감탄할 만큼 잘 꾸며 놓았다. 럭셔리하다는 말이 어울릴만한 곳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너무 현대식이라는 느낌이다. 왜 이렇게 밖에 안 될까. 신경 쓰지 않는 곳은 방치에 가깝고, 신경 쓴다고 손을 본 곳은 너무 현대식이다. 중국적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현대식은 정말 아쉬웠다. 이것을 제대로 된 복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대 그 모습으로 복원하기가 힘들다면 최소한 판에 박힌 건물이 아닌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중국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내 중심부에 있는 청진사(淸眞寺)와 주변의 시장을 둘러보았다.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도 다시 볼 수 있었다. 맑은 날에 보는 종루와 고루는 다시 봐도 멋있었다. 청진사에서 이슬람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비이슬람권에 남겨진 이슬람 사원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인 청진사는 742년 당(唐) 현종(玄宗) 천보(天寶) 원년에 건축되고 역대로 수리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무슬림을 청진(淸眞)이라고 칭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12년 시작된 이슬람이 130년 만에 중국에까지 전파된 것을 생각할 때 그 전파력이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사찰의 형식으로 된 이슬람 사원은 색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위귀화(爲貴和)’란 글씨가 눈에 띈다. ‘처세유위귀(處世柔爲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화평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닐까. 이 글이 이슬람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듯하다. 이렇듯이 크게 보면 종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닐까.
▲ 청진사
10월 16일 중국 답사 마지막 날이다. 이날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에 서안의 신화서점(新華書店)에 들러서 자료가 될 만한 서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대장간에 칼이 없다더니 중국의 서점에 중국사에 관계된 서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찌 책이 없겠는가? 아마도 우리의 노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나 보다. 그러나 아쉬웠다. 그리고 중국 당국이 공연히 남의 역사를 끌어서 자신의 것이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자국의 역사 연구와 문화유산을 챙기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 태종 이세민과 24장, 후한 광무제 유수와 28장에 관해서 너무 간략하고 이미 출간 서적이외에는 그리 눈에 띄는 서적이 없는 것을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옆의 사진을 봐 주기 바란다. 서안 시내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를테면 ‘유행의 최전선’쯤 되는 한자말을 한글로 적은 것을 보면서 이른바 이것이 한류(韓流)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란 누가 강제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이 간판을 내 건 사람에게는 한글이 조금 더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글로 된 간판이 매출에 도움에 된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중국 답사는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필자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책과 인터넷으로만 접하던, 그리고 전하는 사람들의 말로만 듣던 역사적인 현장. 그것도 상제님이 말씀하신 인물들에 관련한 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중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번의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연구하고 다시금 가야 할 곳이 중국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
01 백양(柏楊)지음, 김영수 옮김, 『맨얼굴의 중국사2』,도서출판 창해, 2005, p.238 참조.
02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묵은 하늘은 사람을 죽이는 공사만 보고 있었도다. 이후에 일용 백물이 모두 핍절하여 살아 나갈 수 없게 되리니 이제 뜯어고치지 못하면 안되느니라” 하시고 사흘 동안 공사를 보셨도다. 상제께서 공사를 끝내시고 가라사대 “간신히 연명은 되어 나가게 하였으되 장정은 배를 채우지 못하여 배 고프다는 소리가 구천에 달하리라” 하셨도다.(공사 1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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