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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그리고 바다와 산이 있어 아름다운 그곳, 제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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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목 작성일2019.04.23 조회1,6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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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오름을 만나다 -

 

 

연구위원 이승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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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  

 

 

 

 

 

  고요와 적막 속 짙은 해무(海霧)에 휩싸인 제주의 이른 새벽녘. 제주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연다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峰)을 만나기 위해 해안일주도로를 내달렸다. 텅 빈 해안일주도로는 오직 양 옆 가로등과 신호등의 노랗고 파란 불빛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 불빛은 안개와 어우러지면서 마치 치성 드는 날 밤안개에 잠겨 은은하게 비춰주는 청사초롱 같았다.

 

  그 분위기에 심취될 쯤, 문득 학창시절에 너무나 좋아했던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가 떠올랐다. “…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 몇 차례나 이 시 한 대목을 반복했을까? 내 눈앞에 수직으로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윗덩이인 성산일출봉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성산일출봉 

 

  수만 년에 걸쳐 파도에 밀려온 모래와 자갈이 조금씩 쌓여 만들어졌다는 터진목을 관통하자, 이내 성산일출봉의 입구에 다다랐다. 해발 182m인 성산일출봉은 10만 년 전,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에서 폭발한 수중화산섬이다. 예부터 이곳 성산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 광경은 영주십경(瀛州十景)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았다. 특히 굼부리(분화구를 일컫는 제주 방언)를 감싸고 있는 99개의 바위가 왕관 모양의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마치 성(城)처럼 보인다고 해서 지명도 성산(城山)이다. 

 

  등산 채비가 끝날 무렵, 여명(黎明)으로 흐릿하게나마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길을 따라 제주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연다는 일출봉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새벽녘 코끝에 느껴지는 짠 바다내음을 맡으며, 완만한 능선에 펼쳐진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등산의 시작을 알리는 돌계단에 이르자, 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뛰어가면 99개의 바위들이 내 손에 닿을 듯했건만, 정상까지 이어져 있는 가파른 수백 개의 돌계단이 의기양양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떠랴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상쾌한 바람과 함께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려주는 일출을 볼 수 있다면, 한순간 육신의 고달픔 쯤이야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아닐런지.

 

  땀을 한 줄기 흘린 뒤 마지막 계단을 지나자, 바다 속에서 태양의 장엄함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대지를 서서히 달구며 떠오르려 준비하고 있었다. 정상 아래로 보이는 성산포는 한반도를 축소해 놓은 듯, 터진목으로 38선을 그리고 위아래로 남과 북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마치 누워 있는 소 모습과 흡사한 우도(牛島)를 바라보니, 소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섬의 독특한 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더구나 뿌연 안개에 휩싸인 한라산 정상과 오름들이 파노라마처럼 시원스럽게 눈앞에 펼쳐져 더욱 장관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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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 16분. 드디어 바다 속에서 둥근 불덩이가 꿈틀거리자 천지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동쪽 수평선 위로 불같은 해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어떠한 수식어를 붙여도 형용할 수 없는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성산의 일출을 영주십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았던 것일까. 형상도 영락없이 솥에다 물을 담아 놓은 듯했다. 더욱이 옛 성산의 이름을 솥산[鼎山]이라고 한 데서, 옛 사람들의 탁월한 표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도주(道主)님의 존호(尊號)가 정산(鼎山)이신데, 성산에 서려 있는 전설 또한 옥황상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설은 이러했다. 예로부터 제주는 옥황상제를 중심으로 선계(仙界)의 신(神)들이 군집해 있었다. 옥황상제를 호위하기 위하여 서쪽은 오백장군에게 동쪽은 천하에서 가장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군 셋에게 맡기어 경계(警戒)를 살피도록 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장군 셋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다, 훗날 모두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성산일출봉이며, 별장바위(등경바위), 금마석(초관바위), 대장군바위(코끼리바위)가 그 바위이다. 특히 장군 바위 중, 두 번째로 지위가 높은 초관바위의 성품에 대해 우리 모두가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부분이 있다. 비록 장군이지만 부하들에게 겸양의 미덕을 보였고, 형벌로 다스리지 않고 덕망(德望)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작은 바위(마치 바위들이 졸병처럼 보였다)들이 그 바위를 우러러보고 있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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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일출봉은 100마리의 서로 다른 지상의 동물들이 모이면, 천상으로 승천(昇天)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점점 그 소문이 방방곡곡에 퍼지면서, 그 개체수도 늘어만 갔다. 그런데 100마리 중 하나가 부족한 99마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남은 동물들은 이제나 저제나 1마리만 더 오기를 학수고대하다, 모두 성산의 굼부리를 감싼 채 바위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동물은 어떤 것일까 하는 고민을 내 머리 속에서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몸은 성산을 내려오고 있었지만, 동물의 존재 여부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어느덧 해는 나의 키 높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도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다시 한번 성산을 관망하다, 깎아지른 절벽 한 측면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교운을 보리라 하시며 “나의 형체는 사두용미(蛇頭龍尾)니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뱀 머리의 형상에 오메가(Ω) 형태로 성산 전체를 감싼 몸통, 그리고 머리 바로 옆의 용꼬리 모양 …. 이 모든 것이 자연의 형상을 통해 도(道)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알려주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기억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다음 목적지인 산굼부리로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산 위의 웅덩이 산굼부리

 

  지금껏 해안일주도로를 이용해 목적지에 다다랐지만, 이번은 삼나무 숲길을 벗 삼아 다닐 수 있는 산록도로를 경유하였다. 더구나 4∼5월에는 도로 주변에 온통 이름 모를 야생화가 한데 어울려 매력적인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늦은 봄의 햇볕 치고는 차 안으로 따갑게 내려쬐고 있어서 그런지, 잠시나마 삼나무 그늘 사이에 앉아 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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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을 조금 더 지나자, 성문(城門)처럼 생긴 작은 출입문이 이내 시야에 들어왔다. 산굼부리였다. 오늘까지 둘러본 장소에서 유일하게 출입문이라는 것이 있는 곳이었다. 더 특이한 것은 문 천정에 우리 도장의 벽화처럼 용 그림이 수놓아져 있고, 양 벽면에는 봉황 조각이 붙여져 있었다. 도장에서 항상 접하는 그림이라서 낯설지 않았지만, 이곳 출입문의 벽화는 왠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인공적인 출입문보다는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된 모습을 안겨 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해 보았다.

 

  푸념을 뒤로 한 채, 정상으로 나아갔다. 산굼부리 정상을 알리는 돌비석에 다다르자, 주변에는 은빛 물결처럼 일렁이는 억새밭과 푸른 초원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 사열이라도 하듯 불쑥 불쑥 올라와 있는 수많은 크고 작은 오름과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아스라이 구름 속에 서 있는 한라산의 신비한 모습이 이곳에서 특유의 멋과 풍광을 자아냈다. 하지만 산굼부리의 백미는 역시 분화구였다.

 

  제주의 360개 오름은 용암분출에 의해 생성되었으나, 산굼부리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마르(maar)형태의 화산이었다. 몸체는 거의 없고 분화구만 남은 형태로, 용암분출이 아닌 매우 강력한 가스폭발로 형성됐다는 것이다. 분화구의 규모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로마의 원형대경기장인 콜로세움을 떠올릴 법했다. 그런데 백록담에 물이 고여 있는 것과 달리 산굼부리는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전혀 물이 고이지 않고 지하로 흘러버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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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분화구 위에는 온대(溫帶)성 식물이, 아래에는 난대(暖帶)성 식물이 공존하는 거대한 자연식물원을 이루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눈이 쌓이지 않고 따뜻해, 주변의 동물들이 이곳으로 몰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분화구 아래의 뜨거운 가스가 지표면을 데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달구어진 솥 안의 물에서 증기가 발생하여, 그 증기가 시루 바닥에 있는 구멍을 통하여 올라와 시루 안의 음식이 쪄지게끔 하는 원리와 유사한 것 같았다. 더구나 앞서 본 성산일출봉이 솥산[鼎山]의 의미가 담겨 있듯이, 산굼부리는 그 위에 얹히는 시루[甑山]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양산(兩山)의 이치를 자연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닌지 싶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황금빛 억새꽃에 내려앉는 고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산방산으로 출발했다.

 

 

분화구가 없는 종모양의 오름 산방산

 

   삼나무 숲길을 지나 다시 해안일주도로를 타고 남서쪽을 향해 내달렸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넓은 평지에 우뚝 솟은 돌산 하나가 보였다. 꼭 종 모양처럼 웅크려 있는 모습에 위엄을 더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산방산(山房山)이었다. 근접할수록 산은 거대해지고 사방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모습이 남성적이며 거친 모습이었다. 해발 395m의 산방산은 산속에 있는 방(房: ‘동굴’로도 표현한다)이란 뜻인데, 해발 150m지점의 절벽에 영주십경의 하나인 산방굴이 있었다. 예부터 많은 수도승들이 수양하던 곳으로, 추사 김정희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곳에 자주 올라와 수양을 했다고 한다. 산방산에도 재미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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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오백장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제주 섬을 만든 설문대할망의 아들들로 주로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며 살았다. 하루는 맏형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맏형은 한 마리의 사냥물도 잡지 못했다. 사냥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나머지 허공을 향해 몇 번의 활시위를 당겨 분을 풀었다. 그런데 그만 화살 하나가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한적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던 옥황상제는 느닷없이 날아온 화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두리번거리다 옆에 있는 한라산 정상의 암봉(岩峰)을 뽑아 던져 버렸다. 던진 암봉은 날아가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마을 뒤편에 떨어졌는데 이게 바로 산방산이다.

 

  한라산이 뽑힌 자리에는 백록담이라는 샘이 생겼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 백록담의 둘레와 산방산 밑 둘레가 같을 뿐더러 분화구가 없이 수려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구나 기암괴석은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기암들 안에서도 한 바위에다 조아리며 예(禮)를 갖추는 듯했다. 바로 산 정상에 자리한 신선바위(꼭 신선이 관을 착용한 형상이다)를 향해서 말이다.

 

  산방산 전체를 조망하고 싶어서, 이젠 용머리해안으로 내려가 보았다. 용머리해안은 바닷가를 향한 바위 언덕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떻게 보면 산방산과 아우러져 거북이가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 같기도 했다. 해안 진입로에 들어서자, 서양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처음 알린 공로로 세워진 하멜표류 기념비와 하멜상선전시관이 있었다.

 

  용머리해안의 돌과 파도와 바람이 합심해 만들어 놓은 풍경이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웠다. 특히나 하나하나의 퇴적암이 오랜 세월 동안 주름 잡히듯 겹겹이 쌓여 용머리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세월 동안 깎이고 쌓여 인간이 흉내 내지 못할 자연의 조각예술이 완성된 것이다. 각각의 퇴적암이 쌓여 용이 되었듯, 만수도인 하나하나의 지극한 정성이 쌓여 용화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가 머릿속까지 상쾌하게 해주었다. 아무리 쾌청한 날이라도 이곳 파도는 그 위세가 대단해, 출입이 통제되는 날이 허다하다고 한다. 때마침 우리 일행들에게 그 절경을 오래도록 간직하란 듯 파도는 잠잠해졌다. 20여 분 동안 영상촬영을 끝낼 무렵, 다시 파도는 결코 우연은 아닌 듯 노도(怒濤)처럼 밀려 왔다. 파도에 떠밀려 나오다시피 바깥으로 나와서 봉화대가 있는 곳에서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면서, 잠시 용머리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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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중국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으나 늘 자신이 이룩한 왕국이 위협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다가 만리장성을 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탐라에 천하를 호령할 제왕이 태어날 기운, 즉 왕후지지(王后之地)가 있다는 보고를 접한다. 이내 진시황은 풍수사 호종단(胡宗旦: 제주에서는 흔히 고종달이라 부른다)을 보내어 탐라의 이런 맥을 끊어놓고 오라고 보낸다. 호종단이 용머리해안으로 들어와 지형지세를 보니 과연 왕이 날 지세라 여겨 그 지맥 혈을 찾아 끊기 시작했다. 호종단이 용머리에 닿았는데 막 바다로 뻗어 나가려는 용의 머리를 보고 그는 칼로 용의 꼬리를 먼저 자르고, 얼른 용의 등으로 올라타 잔등을 칼로 쳤다. 그리고 더 앞으로 달려 용의 머리를 끊으려는 순간 시뻘건 피가 솟으며 산방산이 울음을 토했고 몇날 며칠 동안 천둥번개가 쳤다고 한다. 임무를 완수한 호종단은 차귀도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분노한 한라산 산신은 커다란 독수리를 보내어 호종단이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바다에 빠져 죽게 하였다.

 

 

 

  하늘과 바다를 치고 뻗어 나가려던 시퍼런 기세가 꺾여 돌이 되어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해안가의 파도는 더 거칠게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고, 계절의 작은 변화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제주의 둘째 날을 마무리하였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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