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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그리고 바다와 산이 있어 아름다운 그곳, 제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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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목 작성일2019.04.29 조회1,5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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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이 제주도요,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라! -

 

 

연구위원 이승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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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땅을 밟은 지 사흘째. 오늘은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인 한라산(漢拏山) 등반을 남겨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평상시에는 눈꺼풀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새벽 5시인데, 등반을 한다고 이 시각에 눈을 뜨는 것은 초초함 때문일까 아니면 기대감 때문일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행들은 산행 준비에 분주했다. 물, 약품, 김밥, 지도 등 재차 물품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해발 1950m라는 높이가 말해주듯, 얕보고 덤비다가는 육신의 고통을 만끽하기 십상이기에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더구나 한 번도 밟아 본 일이 없는 높이의 산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한라산 산신이 백록담 비경(秘境)을 느껴보란 듯 화창하고 쾌청한 날씨를 우리들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을 볼 수 있는 날은 연중 30일 뿐이다. 일단 등반을 위해 4가지 등반코스 중, 성판악이라는 곳으로 서둘러 이동하였다. 현재 한라산 등반은 ‘한라산 휴식년제’01를 적용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곳을 선택하였다.

  얼마를 내달렸을까, 차량은 해안과 도심을 벗어나 울창한 산림지대에 들어서 있었다. 이름 모를 숱한 상록수들이 마치 한라산 주변을 호위하는 신장(神將)처럼 근엄한 자태로 우뚝 솟아 있는 것 같았다. 빽빽한 나무숲 사이로, 넓은 공터가 들어선 성판악 주차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등산객들이 군집해 주차장을 인산인해로 만들었다. 차에서 내려 잠시 주변 경관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능선, 날카로운 봉우리, 그리고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흰구름과 파란하늘이 환상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역시 자연의 위대함에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었다. 우리들은 성판악매표소[해발 750m]를 시작으로 정상인 백록담을 걸쳐 관음사로 내려오는 장장 20km의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자, 이제 출발이다!

 

 

성판악에서 백록담, 그리고 관음사까지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었다. 성판악 코스는 한라산을 동쪽에서 오르는 곳으로, 경사가 완만한 반면 9.6km로 거리가 가장 길다. 그래서인지 예상 밖의 편안함을 느끼며 산행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성판악 입구에서 7.6km 떨어진 진달래밭 대피소에 늦어도 오후 1시까지는 도착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후의 도착은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철저하게 통제하는데, 여기서 정상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해가 지기 전에 하산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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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정상을 향해 일행들보다 걸음걸이를 재촉하였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또한 한라산 정상과의 만남을 가장 먼저 만끽하고 싶은 과욕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서 입안에 침이 마르면서 단내가 나기 시작하였다. 벌써 사라악약수터를 지나 진달래밭 대피소에 다다랐을 정도로 먼 거리를 올라온 터였다. 대피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준비한 김밥으로 요기를 하며, 산 아래를 훑어볼 여유를 가져 보았다. 다양한 식물들이 앞 다투어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산속은 온통 향기로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위로는 정상까지 서로 다른 크기의 돌무더기들이 꽃을 대신하고 있었다. 또한 ‘바위벽이 성벽과 같다(石壁如城板)’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성판악의 내력도 이해가 갔다.

  이제 막바지 산행 길을 올랐다. 이곳에서부터 백록담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기에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더구나 산 아래와 달리 산림은 온데간데없고 돌무더기와 나무계단이 등산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탁 트인 시야 확보로 저 멀리 여러 오름들이 한눈에 펼쳐졌고, 위 정상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쉬워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한 층 높이의 계단을 지나면 곧 정상이 품에 안겨 줄 것 같았지만, 그 위는 또 다른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지만, 기다리는 것은 또 한 층의 나무계단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가쁜 숨을 내쉬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보일 듯 말 듯한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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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계단을 오르는 것이 수도과정과 유사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수천 년 동안 덕을 쌓으면서 한결같이 수도에 전념한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되어 승천 하는데, 기껏 몇 시간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典經』에 “운수는 길어가고 조같은 잠시로다”라는 말씀도 있지 않은가. 더구나 백록담은 3대(代)의 덕(德)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인데, 더 이상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재차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최종 목적지인 백록담 정상에 도착하였다. 역시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옛말이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고통을 겪어내고 묵묵히 노력하는 삶을 소유한 이를 초인이라 불렀던 니체의 말도 떠올랐다.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던 백록담. 실로 산굼부리처럼 큰 솥에 물을 담아 놓고 뚜껑을 열어 놓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부악(釜岳)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산 아래는 한라 주봉(主峰)에 따른 갖가지 모양을 드러내며 서 있는 많은 오름들이 보였다. 마치 옥황상제님을 중심으로 많은 신선들이 시립(侍立)하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더욱이 고대 천문학자들은 은하수를 지구에서 증발한 물이 우주로 흘러들어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 백록담이 은하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천혜(天惠)의 절경에 넋을 잃고 있을 무렵, 동쪽에서 자욱한 운무(雲霧)가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오늘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번잡스러운 발길에 쉴 틈이 없어서 그런지, 운무를 동원해 그 모습을 숨겨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산의 높음과 운무가 어우러져, 마치 선경(仙境)세상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한라산 정상의 비경을 가슴속에 담아둔 채, 우리는 관음사 코스를 통해 내려와 다음 행선지인 영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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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이 살고 있는 곳 영실(靈室)

 

  제주 사람에게 한라산은 산신이 살고 있는 영성(靈性)스러운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제주 사람들에게 마음속의 신(神)으로도 존재한다고 한다. 특히 한라산은 18,000명의 신들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모든 오름들은 음산(陰山)이라고 하는데 한라산신도 여신(女神)이었다. 또한 역(易)에서는 이를 음(陰)의 시대인 곤도(坤度)로 보는데, 즉 여성이 다스리는 시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만큼 한라산은 신령스럽고도 어머니의 따뜻함을 간직한 곳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래서 옛 이름은 영주산(瀛州山)이라 했으며, 그 중에 영실(靈室)은 그 신령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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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우리의 무거운 몸을 실은 차량이 영실 코스 진입로에 다다랐다. 이곳은 한라산의 서남쪽을 오르는 코스로 영실휴게소에서 웃세오름대피소에 이르는 3.7km의 짧은 등산로였다. 차량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산허리를 휘감으며 위압적으로 둘러쳐져 있는 영실기암의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형상도 ‘새 을(乙)’을 그리며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옛 선인들이 이곳을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꼽았던 것일까. 우리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려 좀 더 가까이 다가서려 했지만, 한라산휴식년제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영실기암에 서려 있는 전설을 듣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제주를 만들었다는 거대 설문대할망에게는 오백 아들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들들이 나무를 하러 나가고, 저녁때가 되어 설문대할망은 오백 아들이 먹을 죽을 아주 큰 가마솥에 쑤고 있는데 그만 죽을 젓다가 그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하루의 고된 삶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오백 아들들은 배가 고파 그 죽을 아주 맛있게 먹게 되었다. 어머니가 빠져 죽은 죽이란 걸 까마득히 모른 채 말이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먹을 때쯤, 죽의 밑바닥에 있는 뼈를 발견하고는 분명 어머니가 그 솥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막내는 슬픔을 참지 못하여 멀리 차귀섬으로 달려가 한없이 울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것을 본 형들도 그제야 사실을 알고 한없이 통곡하다가 영실계곡 여기저기 흩어져 모두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

 

  또 하나 영실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식물이었다. 하나는 등산로 주변을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는 초록빛 산죽(山竹)이었고, 다음은 신령스러운 곳에서만 서식하기에 불로초에 버금가는 영약으로 알려진 시로미였다. 특히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와 그 아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한 키 작은 산죽이 한라의 기백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이제 이것으로 제주도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해안일주도로를 내달리는 것뿐이었다. 도로는 바다내음과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해안과 가까웠다. 덤으로 수평선 너머 붉은 노을이 제주를 물들이는 모습까지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를 붉게 태우지도 못한 채, 짙은 구름 속에 잠겨버리는 제주의 저녁노을이었다. 이렇게 제주의 마지막 밤은 깊어만 갔다.

 

 

한라산 답사를 마무리하며

 

  오전 8시 20분, 우리는 제주여객터미널에서 완도행 여객선을 탑승했다. 곧이어 힘찬 뱃고동을 울린 여객선은 이내 바다를 미끄러지듯 질주하였다. 시원한 바람과 눈부신 파도, 부서지는 물보라를 따라 갈매기 떼의 날갯짓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해안까지 길게 내려뜨려 제주를 품에 안고 있는 한라산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역시 제주는 한라산을 빼놓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주가 한라산이요, 한라산이 곧 제주였다.

  또한 제주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설화와 전설이 서려 있었다. 더구나 그 전설과 신화 그리고 자연의 형상은 일상 수도에 매진하는 우리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말로써 도(道)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셨듯이, 제주를 통해 도(道)의 알음 귀를 열어주시려는 것 같았다. 곧 갓난아이가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하며 말을 배워 세상을 알아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아직 꺼풀을 풀지 못한 애누에가 주는 뽕잎에 덮여 그것을 먹으며 살아가는 모습과 유사하다. 한라산은 도(道)의 걸음마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며 이번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01 심하게 훼손된 한라산 등산로의 자연복원력 효과를 높이고 비등산로를 이용한 무단출입으로 인한 자연훼손 및 산불피해, 조난사고 등을 근원적으로 예방하기 위하여 등산로 중 훼손이 심한 구간 및 보호가 요구되는 공원구역 출입을 제한함으로써 자연환경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하고자 1999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어리목[편도 4.7km]ㆍ영실[편도 3.7km]ㆍ관음사[편도 8.7km]ㆍ성판악[편도 9.6km] 코스 중, 현재는 관음사와 성판악만이 출입이 허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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