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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萬東廟)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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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미경 작성일2020.06.17 조회2,0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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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6 방면 교감 송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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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華陽九曲)을 향하여 

  청명한 가을바람이 부는 일요일 아침, 우리 가족과 방면 도인들은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만동묘 답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나는 청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직장생활을 할 때 화양리에 가곤 했지만, 그곳에 만동묘가 있는지도 몰랐고 내 주변에도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화양계곡은 나에게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바람 쐬며 나들이하기에 좋은 장소였을 뿐이었다. 처음 답사갔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다만 같은 뜻을 품고 사는 도우들과 함께였던 길이라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수도하면서 만동묘 답사는 세 번째이고 이번에는 가족 몇 명도 동행했다. 우리 가족은 5명이 상급임원이고, 4명이 중간임원, 2명이 선무인 도인 가족이다. 이렇게 가족들이 화목하게 수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에서 선감인 맏언니가 가족일에 앞장서고 뒤에는 그 오랜 기간 한결같은 믿음으로 수도해 오신 울타리 같은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우리 도의 가정에는 조금도 불신의 틈은 없다.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교법1장 5절)는 상제님 말씀에 따라 서로 바라기보다는 도에 믿음을 먼저 주었고, 상제님에 대한 금강석처럼 단단하면서도 순결한 믿음이 있었기에 자식과 형제자매, 배우자를 포덕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청주에서 50여 분 정도 이동하여 화양리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흠모하여 이름한 명승지 화양구곡이 있어 평소 나들이객이 많다. 더구나 주말이라 단풍 구경을 나선 이들로 가득했다.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서로 마음에 품고 느끼는 바는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도하기 전 단풍 구경하며 힐링을 구했던 것처럼 사회 사람들과 수도인이 화양구곡을 바라보는 시야의 차이는 매우 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물가에 우뚝 치솟은 바위벽이 하늘을 떠받친듯한 화양일곡(華陽一曲) 경천벽(擎天壁)과 구름의 그림자가 맑은 물에 비쳐 보인다는 화양이곡(華陽二曲) 운영담(雲影潭)을 지나 만동묘로 향했다.

 


만동묘의 오묘함 속으로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은 그의 부친이 한밤중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나오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전경』 행록 1장 36절을 살며보면, 송시열은 천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고 그의 주택 지붕에는 백설이 쌓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명나라를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자 중원(中原)의 문화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라고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암벽에 새기고 예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우암 선생의 숭례(崇禮)와 보은(報恩)의 정신이 깃든 곳이 바로 만동묘이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에 건립된 사당이다. 나는 그분의 엄격한 수양 태도에 존경을 보내고 싶었다.

  만동묘를 향해 오르자 우측으로 보이는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와 여러 계단이 눈을 사로잡았다. 이 묘정비는 사원의 뜰에 세우는 비석인데 일본강점기에 정으로 쪼아 훼손하여 글자 판독이 어려운 상태였다. 계단은 폭이 좁아서 옆으로 조심스레 옷을 잡고 올라가야만 했는데 이는 참배자들에게 공손함과 예를 다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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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 5곡 첨성대 아래 암벽에 송시열이 새긴 명나라 황제 의종의 친필 비례부동( 非禮不動). 

 

 

  꽤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올라서 바라본 맞은편 산자락은 마치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눈에 들어왔다. 만동묘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답사하기 전 충분한 예습 덕인지 관련된 『전경』 구절이 뚜렷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전경』에 “상제님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공사 3장 22절)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지난번 만동묘를 답사할 때보다 이번에 더 많이 공부하고 왔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전경』을 보면 황극신은 상제님의 공사에 의해 만동묘로 옮겨오기 전까지 천자국이었던 청나라의 황제에게 응기되어 있었다. 이 문맥으로 보아 황극신은 만민(萬民)을 다스리는 제왕의 일을 하며,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신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신명의 존재는 입도해서 『전경』을 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고 이러한 고귀하고 막중한 신명이 동서양의 어느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순간 상제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차올랐다. 한편으론 만동묘가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철폐되어 있었고, 2000년대 초에 이르러 겨우 복원된 이곳에 황극신이 계시겠느냐는 의문도 들었다.

  이 땅에 온 황극신의 응기를 음미해보며 다시 우리는 화양 3곡과 4곡인 읍궁암(泣弓巖)과 금사담(金沙潭)으로 나아갔다. 우암 선생께서 머물렀던 작은 방 하나가 바위 위에 세워져 있어 고상하고 우아한 멋을 느끼게 해주는 금사담을 지나 화양 5곡인 첨성대(瞻星臺)로 향해 갔다. 첨성대는 큰 바위가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명명된 곳이라지만, 대낮에 별을 본다고 억척스럽게 몇몇 사람과 실제로 올라가 보니 꼭대기가 편히 별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당연히 별은 보지 못했고 다리만 아팠지만, 그곳에서의 마음속 기도와 첩첩 바위 높은 곳에 도달했다는 성취감 때문인지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한편 첨성대 아래 석벽에는 무언가 신비감이 감도는 듯했다.

 

 

첨성대 아래 석벽에 나타난 ‘옥조빙호(玉藻氷壺)’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교운 2장 50절) 

 

 

  ‘옥조빙호’의 어원을 보면 옥(玉)은 면류관에 늘어뜨린 빛 고운 옥이며, ‘빙호’는 본래 얼음을 담는 옥 항아리이다. 그래서 ‘옥조빙호’에는 임금의 마음이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하여 순결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과거 일본은 이 전설을 없애려고 석공을 시켜 그 석문을 정으로 쪼개려고 했다가 청천벽력에 놀라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한편 청국 광서제에 응기하여 인사(人事)를 펴던 황극신이 우리나라에 오게 된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를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도주님께서 이곳을 다녀가신 후 첨성대 아래 닫혀 있던 석문이 갈라져 내려 그 안에 있던 글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황극신과 도주님의 깊은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부분이었다. 만동묘가 우리나라의 대중화(大中華)의 핵심이며 그 시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때 『전경』에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가 되리라”(공사 3장 18절)라는 구절이 떠올랐고, 그 후 우리나라의 대중화가 이루어져 온 과정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라는 글귀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엄청난 변화가 근본적으로 상제님의 공사에 의한 것임을 가슴 저리게 느끼며, 그리고 이러한 천지공사의 현장에, 도주님과 도전님 두 분 모두 다녀가셨던 이곳에 내가 와있다는 생각에 마구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었다. 그런데 모두가 첨성대 아래에서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교화를 듣던 그때 소리 없이 찾아온 손님처럼 뜻밖에 오색 무지개가 아름답고, 영롱하고, 신비스럽게 우리 뒤편에 드리워 있었다. 그것도 비도 오지 않았는데.

  화양구곡의 마지막인 9곡 파천(巴串)은 다음 기회로 남겨둔 채, 연이어 화양 6곡에서 8곡까지인 능운대(凌雲臺), 와룡암(臥龍巖), 학소대(鶴巢臺)를 차례로 들러 보았다. 그리고 어느 식당에서 저녁으로 자연 향이 물씬 풍기는 버섯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그 후 각자 소감발표가 이어졌다. 답사 후 늘 하는 소감발표이지만 이번만큼은 더 뜻깊었다고 모두 말했다. 한편으로 도를 일러준 선각자에 대한 진솔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매번 느끼지만 진실로 답사는 선각과 나, 그리고 후각을 단단하게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답사의 마지막으로 방면 선각자들이 늘 강조하시는 ‘포덕이 곧 수도다’라는 구호를 다 함께 세 번 외치고 난 후, 화양구곡이라는 선경(仙境)에서 빠져나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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