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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방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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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영배 작성일2020.06.20 조회1,4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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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5 방면 교령 손영배

 

 

  지난가을 교무부에서는 박물관에 필요한 영상과 사진 촬영을 위한 답사가 계획되었다. 운 좋게도 교무부 요청으로 드론 촬영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답사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답사 일정에 최풍헌(崔風憲)과 관련 있는 두방산(斗傍山)도 있었다.

  『전경』에서 최풍헌의 일화를 읽고, 그 역사적 사건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고흥에 있는 두방산을 개인적으로 가기엔 너무 멀었다. 시간과 거리의 제약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던 터라 정말 꼭 한번은 가고 싶었던 곳이다.

  촬영팀은 먼저 다른 지역에서 촬영하고 고흥군 동강면 대강리에 있는 두방산으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두방산은 고도 486m로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었다. 두방산 북동쪽으로 산 정상에 병풍처럼 펼쳐진 암벽이 보이는 병풍산(屛風山, 482m)이 이어져 있고, 그 산 동쪽으로 삿갓을 연상케 하는 첨산(尖山, 314m)이 있다.

  두방산의 유래를 보면 『1872년 지방지도』에 처음으로 ‘두방산’이라고 표기하였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지리산(智異山)으로, 『호남지』에는 지래산(智萊山)으로 언급하였다고 한다.01

  『전경』의 최풍헌 일화에도 ‘지리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류훈장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고 최풍헌에게 난을 피난할 방법을 물었다. ‘가산을 팔아서 맡길 수 있겠나이까?’라는 최풍헌의 제의에 류훈장은 기꺼이 승낙하였다. 그 후 최풍헌이 죽었다는 부고(訃告)를 받고 류훈장이 풍헌의 집에 갔더니 최풍헌의 아들이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족들에게 상복을 입혀 상여를 따라서 나를 지리산 아무 곳에 장사하게 하라”는 말을 전하였다. 류훈장은 가족에게 최풍헌의 상여를 따라가자고 의논했으나, 큰아들만 그 뜻을 따랐다.

  사흘이 지나 상여를 메고 최풍헌의 장지가 있는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빨리 오르라”는 최풍헌의 소리가 들렸고 그를 따라 도달한 곳에는 집 한 채와 창고 가득 식량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시 지리산 꼭대기에 올라 보니 왜병이 침입하여 마을마다 지른 불로 사방이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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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풍헌의 수도처 추정지.

 

 

  이 일화에는 금성마을에서 상여를 메고 지리산(현 두방산)으로 가는 장면이 있다. 위성 지도를 통해 금성마을에서 두방산 등산 입구까지 거리를 측정해 보니, 약 20km이며 도보로 약 5시간이 소요된다.03 아침에 출발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해가 저물기 전에 두방산 골짜기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밀물 때 배로 이동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최풍헌의 일가족과 류훈장 그리고 그의 아들의 행보가 틀린 내용은 아닌 것 같다. 

  두방산은 최풍헌의 일화에 등장하며 최풍헌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오기도 한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을 때, 두방산 정상까지 ‘1.8km’라고 적혀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양쪽으로 시누대가 빽빽이 자라 마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이어진 터널 같은 길이 펼쳐졌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자연이 인간에 선사해 주는 포토존(photo zone)이기도 했다. 공원에 꽃으로 꾸며 만든 인공터널을 떠올리며, 두방산 산신령이 주는 현시대 맞춤식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방산 산신령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전하였다.

  시누대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두 갈래 길이 보였다. 앞 사람을 따라 좌측으로 걸어갔다. 두 개의 암벽동굴과 그 앞으로 두 사람이 겨우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좁고 경사진 돌길이 보였다. 먼저 보이는 동굴은 최풍헌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한사람이 생활하기에 딱 맞는 공간이었다. 또 하나는 최풍헌이 수도하면서 식수로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는 동굴이었다. 자연이 제공한 주거 공간으로 수도하기에 좋은 맞춤식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고흥군이 한눈에 보였다. 바다와 육지 그리고 섬이 한자리에 어우러진 풍경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비롭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육지에 둘러싸인 바다, 바다 위에 배가 정박한 듯 군데군데 솟아오른 크고 작은 섬들, 갤러리에 전시해 놓은 한 폭의 풍경 그림을 보는 듯했다.

  그 섬 중에 ‘우도’라는 제일 큰 섬이 있다.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 눈앞에 보이는 섬을 따라 일직선으로 이동하면 류훈장이 살았던 금성마을이 있다고 한다. 위성 지도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접속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최풍헌이 수도하면서 매일 같이 봐왔던 풍경이다. ‘류훈장에게 운상 행렬을 따라 두방산으로 오라’고 한 그 까닭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최풍헌의 일화에서 ‘사방이 불바다를 이루었다’는 광경을 본 장소는 따로 있다고 한다. 역사의 한 장면을 느끼기 위해 그 장소로 이동했다. 몇 미터를 갔을까? 좌우로 갈림길이 나왔다. 이정표는 ‘좌측으로 50m 가면 전망대가 나온다.’라고 전해주고 있었다. 왼쪽 길을 따라 얼마 가지 않아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은 ‘최풍헌이 수도했다’라는 곳에서 본 경치와 다른 규모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고흥군뿐만 아니라 바다를 끼고 고흥군 왼쪽으로 위치한 여수시까지 보였다. 이 자리에서 최풍헌과 류훈장 그리고 그 외에 사람들이 보고 ‘사방이 불바다’라고 표현했던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마치 그 사람들이 눈으로 보았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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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방산에서 금성마을을 바라본 풍경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며 ‘두방산은 어떤 산일까?’하고 생각해보았다. 두방산은 고도 486m인 시골에 있는 작은 산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겉모습에 비해 큰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산이라고 생각 든다. 『전경』에 ‘지나간 임진란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04라는 구절이 최풍헌의 법술이 대단함을 말해준다. 두방산은 그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알아보고 품어 주고, 길러 주었다. 

  이번 두방산 답사는 최풍헌의 일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역사적 탐방이었다. 그리고 ‘인걸은 지령(地靈)이라’고 하는 말처럼 최풍헌이라는 인걸을 품었던 두방산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던 감상적 탐방이기도 했다.

 

 

 

 

 

01 국토지리정보원,『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편』 (서울: 진한엠엔비. 2015), p.499. 

02 교법 3장 17절 참조.

03 앱에서 지원하는 위성 지도에서 검색.

04 예시 1장 7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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