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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포교 오십년 공부 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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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11 조회4,6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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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9[己酉]년 6월이 되었다. 모든 천지공사를 다 마치신 상제님께서는 ‘布敎五十年工夫終畢(포교 오십년 공부 종필)’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는,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이윤(伊尹)이 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9년간 행하여 온 개벽공사를 천지에 확증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이 참관하고 확증을 마음에 굳게 새겨 두라. 천지는 말이 없으니 뇌성과 지진으로 표명하리라.” 하시며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갑자기 천둥이 치고 땅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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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은 약 3,600년 전에 은나라의 탕임금을 도와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물리친 재상이다. 원래 이윤은 걸왕의 밑에서 궁중의 술과 음식 등을 담당하는 선관(膳官)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걸왕의 폭정이 갈수록 심해지고 충언도 전혀 듣지 않자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의 인물됨을 알아 본 탕임금이 그를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탕임금을 도와 걸왕을 물리치는 것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리고 천하를 위한 길임을 깨닫고 탕임금의 재상이 되어 그를 도와 대업을 이루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 즉 ‘49년의 아님을 50이 되어서야 알았다’함은 이러한 이윤의 고사를 일컫는 것이며, 이 고사에 따른 도수에 따라 도주님께서는 1909년부터 50년간 ‘포교 오십년 공부 종필’의 공사를 받드시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류찬명(柳賛明)에게 “너는 나로 하여금 오래 살기를 바라는도다.” 하시고는 글 한 수를 외워주셨다.

  

稚子哭問母何之  어린아이가 울면서 어머니가 어디에 갔는지를 물으니
爲道靑山採藥遲  푸르른 산[靑山]에 약초를 캐러 가 늦노라고 하더라 
日落西山人不見  해는 서산에 지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更將何說答啼兒  장차 무슨 말로 저 우는 아이를 달랠 수 있으리오 

 

  그리고 다시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輓詞: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인 ‘만양상사(輓楊上舍01: 양진사를 애도하며)’를 외워 주셨다.

  

詩中李白酒中伶  시로 유명한 이태백도, 술로 유명한 유령(劉伶)02
一去靑山盡寂寥  청산에 한번 들어가고 나더니 아무런 소식도 들려주지 않더라
又有江南楊進士  이제 또 강남의 양진사도 (청산에) 들어가 버렸으니
鷓鴣芳草雨蕭蕭  자고새는 푸른 풀 위에서 슬피 울고, 비만 소소하게 내리는구나

  

  남원의 양진사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가난을 즐기면서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던 양석룡(楊錫龍, 1800∼1868)을 말한다. 본관이 남원이었던 그는 말년이 되어서야 제자들의 권유로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서울에 올라와 살았다. 몇 년 뒤 다시 한강 이남에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머물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뜨니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장례를 올렸는데, ‘만양상사’는 그때 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영의정 김병학(金炳學, 1821∼1879)03이 쓴 애도의 시이다.04 상제님께서 류찬명에게 써 주신 두 편의 시는 모두 조만간 상제님께서 화천하실 것을 예시하시는 것이었으나, 그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 무렵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김갑칠에게 청수 한 동이를 길어오게 하신 후, “아래와 웃옷을 벗고 물동이 앞에 합장하고 서 있어라. 서양으로부터 우사(雨師)를 불러와서 만인의 갈망을 풀어주리라.”고 하시니 김갑칠은 그대로 명에 따랐다. 그러자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생겨나 해갈이 되고도 남을 만큼 큰 비가 쏟아졌다. 상제님께서는 김갑칠에게 “청수를 쏟고 옷을 입으라.” 하시더니, 종도들에게 “너희들도 지성을 다하여 수련을 쌓으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고 가르치셨다. 옆에서 상제님을 시종하고 있던 류찬명은 “이런 일은 세상 사람이 다 모르니, 원컨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널리 깨닫게 하여 주소서.”하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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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 그때 청주(淸州)와 나주(羅州)에서 괴질이 발생하여 인심이 흉흉해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당시 괴질이란 호열자 즉 콜레라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의술의 발달로 콜레라가 퇴치되어 드문 병이 되었지만, 그때는 걸리면 뚜렷한 치료법이 없어 설사와 탈수 증세에 시달리다가 2, 3일 만에 죽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한 마을에 한 명이 걸리면 순식간에 퍼져나가 하루에 수백 명 이상이 죽어 마을이 없어질 정도였으니, 그 두려움이란 가히 짐작할 만 한 것이었다. 상제님께서는 “남북으로 마주 터지니 장차 무수한 생명이 잔멸하리로다.” 하시고는 글을 써서 괴질신장에게 ‘胡不犯帝王將相之家 犯此無辜蒼生之家乎(어찌 제왕과 장상의 집은 침범하지 않고, 무고한 창생의 집만 범하느냐)’라는 칙령(勅令)을 내리시고, “내가 이것을 대속하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김형렬에게 새 옷을 다섯 벌 급히 지어오게 하시더니, 설사를 계속 하시며 옷을 다섯 번 연이어 갈아 입으셨다. 방에서 나오시면서 “약한 자는 다 죽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로부터 괴질이 잦아들더니 곧 사라졌다.
  상제님께서는 김자현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물으셨다. 김자현은 자신 있게 “지성으로 믿사오며 고부화액05 때에도 따랐나이다.”고 아뢰었다. 다시 상제님께서 그에게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 하시니, 그는 “제가 모시고 따라가겠나이다.”고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다시 “어느 누구도 능히 따르지 못할지니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지니라.”고 경계하셨다.

<대순회보> 1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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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상사(上舍)란 진사(進士)와 같은 말이다.
02 유령(劉伶, 225?~280?). 자는 백륜(伯倫). 죽림칠현의 한 사람. 평소 술을 좋아한 나머지 ‘유령호주(劉伶好酒)’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아내가 술을 너무 마시면 몸을 보전할 수 없으니 술을 끊으라고 울며 말하자, 그는 내 스스로 끊을 수 없고 귀신에게 빌고 맹세해야 비로소 끊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하여 술과 고기를 준비하게 했다. 술과 고기가 준비되자 무릎 꿇고 빌기를 “한 번에 술 한 섬을 마시고, 해장술로는 닷 말만 마시게 해 주소서. 아녀자의 말은 들을 것이 아닙니다.”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03 김병학은 1864년에 이조판서, 1865년에 공조판서 및 좌찬성, 1866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1867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양석룡은 제자 김병학이 영의정이 된 그 다음 해에 죽었다.
04 김주우,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에 대한 인물 고찰」, 『대순회보』 124 (2011), pp.108-121 참조.
05 「고부 화액」, 『대순회보』 125 (2011), pp.12-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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