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남여꾼 중들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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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7.08 조회6,102회 댓글0건본문
내금강 만천(萬川)구역에서 백화암(白華庵) 터를 지나 개울을 따라가면 표훈사교가 나온다. 이 다리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개울물에 주변의 준봉들이 아름답게 비치므로, 그림자를 물에 잠근 다리라는 뜻에서 함영교(涵影橋)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을 지나면 곧바로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표훈사(表訓寺)를 마주하게 된다.
금강산의 주요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선 가운데에 위치한 표훈사는 비교적 깊은 산골짜기의 평탄한 지대에 위치한 사찰이다. 청학대(靑鶴臺)를 등에 지고 동쪽으로 오선봉(五仙峰)과 돈도봉(頓道峰)이 우뚝 서 있으며, 서쪽으로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일대(天逸臺)가 높이 솟았지만 지세는 대단히 평탄하다. 청학대를 비롯한 봉우리들은 그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전설 속의 신선이나 학이 노니는 곳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곳의 봉우리들과 숲, 개울은 잘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표훈사는 높은 언덕 위에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을 이고 있어 몇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다. 입구의 2층 누각건물인 능파루(凌波樓)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중심 법당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이 화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전체적인 건물배치는 7층 석탑을 중심으로 반야보전과 능파루가 남북 축을 이룬 가운데 좌우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표훈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표훈대사가 창건한 이래 여러 차례의 재건과 중창을 겪었다. 현재의 건물은 1778년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원래 20여 동의 전각들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는 경내에 반야보전과 영산전(靈山殿), 명부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능파루, 판도방 등의 전각과 7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표훈사의 중심 법당인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이곳의 불단에는 금강산 1만 2천 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인 법기보살(法起菩薩)01의 장륙상(丈六像)02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여느 불상처럼 정면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표훈사 동쪽의 법기봉(法起峰)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법당의 화려함은 공포(栱包)03 장식에서 두드러지고 법당 안은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한 반자로 꾸며놓았다. 법당의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도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般若)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야보전과 함께 능파루도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주심포 양식의 팔작지붕 누각건물이다. 이러한 건물의 조성기법은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백미(白眉)를 이루는 것으로서 18세기 말의 건축양식과 건축예술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옛날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신(使臣)들은 물론 양반 관료들도 모두 가마를 이용했는데, 그들이 타던 덮개 없는 가마를 ‘남여’라 불렀다. 보통 네 사람이 남여를 메지만 산길에서는 앞뒤로 두 사람이 메는 작은 가마를 이용하였다. 금강산 사찰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는 이들을 위한 짐꾼과 가마꾼이 배치되어 있었다. 각 사찰의 가마꾼들은 사찰 별로 정해진 경계까지 그들의 역할을 해야 했다. 대체로 신출내기 중들이 가마꾼의 역할을 맡았으며, 흔히 이들을 ‘남여꾼’이라 불렀다. 표훈사에도 남여꾼 중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관한 슬픈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 거만하고 독살스럽고 매정하기로 소문난 여씨 성을 가진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해서 자신의 배만 불리던 자로서 몸집이 큰 절구통만 하였다. 어느 해 여름 그 벼슬아치는 금강산유람을 떠났다. 그는 남여꾼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욕심대로 빨리 금강산유람을 하려고 철이현(鐵伊峴)을 넘자마자 길을 재촉하며 남여꾼들을 핍박했다. 보통사람이면 장안사(長安寺) 승방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천천히 만폭동 골짜기 안으로 구경 가는 것이 관례였지만 욕심 많은 이 벼슬아치는 금강산에 도착한 그날부터 만폭동 구경을 하겠다고 서둘렀던 것이다.
장안사의 남여꾼들은 그래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가서 좀 나았지만 정말 고생하게 된 것은 표훈사의 남여꾼 중들이었다. 그날 남여를 메게 된 두 중은 이른 새벽부터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고 방금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들이 곧바로 남여를 준비해서 삼불암에 이르니 이미 그 벼슬아치를 태운 장안사의 남여가 기다리고 있었다. 벼슬아치는 표훈사의 남여꾼들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늦었냐고 역정을 내더니 빨리 가자고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그를 가마에 앉히고 길을 나서는데 얼마나 무거웠던지 몇 십 걸음을 못가서 벌써 땀이 비 오듯 하였다. 얼마 후 남여는 표훈사 앞뜰에 당도하였으나 그 벼슬아치는 절간구경은 안 해도 된다면서 속히 만폭동에 오를 것을 요구했다. 하는 수 없이 중들은 만폭동으로 들어가는 금강문을 지나 험한 산길을 오르는데 한여름인지라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게다가 무거운 남여를 멘 그들은 숨이 턱에 닿고 목안이 달아올랐다. 청룡담, 백룡담, 흑룡담을 지나 보덕굴이 바라보이는 분설담까지 이르렀는데도 벼슬아치는 그 좋은 경치를 구경하면서도 천천히 가자고 하기는커녕 해가 저무니 쉬지 말고 계속 올라서 오늘 안으로 만폭동 팔담(八潭)을 모두 보자며 다그쳤다.
남여꾼 중들은 이제 더 이상 걸음을 옮길 기력조차 없었다. 그냥 이대로 남여를 메고 가다가는 죽을 게 뻔했다. 그러나 인정사정없는 악독한 관리의 명령을 어겨도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죽을힘을 다해 한 걸음씩 올라가던 그들은 진주담 옆 벼랑길에 들어섰다. 이때 한 중이 그만 미끄러지면서 넘어지고 말았는데 까딱하면 남여와 함께 곤두박일 뻔하였다. 겨우 일어선 그는 다른 중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죽기는 매일반일세. 그럴 바에야 저 망할 놈의 벼슬아치와 함께 물속에 떨어져 죽는 게 어떻겠는가.”
다른 스님이 한참 생각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세.” 모진 마음을 먹은 그들은 진주담 위로 폭포가 떨어지는 높은 벼랑에 이르자 실수하는 척하다가 “앗!”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만 낭떠러지로 굴러 담수 속에 빠지고 말았다. 이로써 곡절 많은 두 스님의 삶과 사납고 포악했던 벼슬아치의 삶도 끝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금강산의 승려들은 그들의 행위에 깊은 동정심을 표했으며, 이후 금강산유람을 온 양반 관료들은 가마를 탈 때마다 그 일을 되새기며 포악한 벼슬아치처럼 남여꾼을 핍박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01 금강산에 거주하고 있다는 보살. 『화엄경』에 따르면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마다 머무르고 있는 보살들의 우두머리이다. 반야계 경전에는 담무갈(曇無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는 법기보살의 산스크리트 이름 다르모가타(Dharmogat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소품반야바라밀다경』에는 금강산의 중향성(衆香城)에 머문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금강산에는 실제로 법기보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또한 예로부터 금강산의 사찰이나 암자에서는 대부분 이 보살상을 모셨다. 특히 의상의 제자 표훈은 법기봉 아래에 표훈사를 세우고 본당 반야보전에 법기보살 장육상을 모셔 두었다. 법기보살 신앙이 금강산 일대에서 널리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강산 이외의 곳으로는 전파되지 못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02 1장 6척(약 4.8 m) 이상의 거대한 불보살을 지칭하는 용어.
03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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