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금강산(金剛山)을 사랑한 봉래 양사언[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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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7.21 조회6,741회 댓글0건본문
1564년, 양봉래(楊蓬萊)는 조정 관료들의 당파싸움으로 인해 어지러워진 세상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껏 시를 읊고 글씨도 남기려는 생각에서 금강산으로 갔다. 그는 아홉 명의 신선(神仙)이 경치 좋은 산천을 유람하며 수양했다는 구선봉(九仙峰) 아래의 감호(鑑湖) 부근에 집 한 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집 뒤편에 정자(亭子)를 짓고,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란 뜻의 비래정(飛來亭)이란 이름을 지었다. 여기에는 세속을 벗어나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곳에서 양사언은 맑게 출렁이는 감호와 하늘 높이 솟은 구선봉,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시상(詩想)들을 모아 시를 읊고 글씨도 쓰면서 지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감호’는 거울 속에 있는 연꽃 같고, ‘구선봉’은 소라고둥이나 틀어 올린 상투 같다고 하였다. 또한 감호와 구선봉은 자기 집 주위에 둘러 친 병풍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도 남겼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이 한적한 곳에 사는가.
온 천하 명소를 다 보았어도, 이만한 곳 없다네.
모래는 희고 바다는 푸른데 소나무 또한 울창하여,
연꽃 같은 봉우리 아래 지은 내 집은 그림과 같다네.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양사언은 이날따라 새로 지은 정자에 ‘飛來亭’이라는 편액(扁額)01을 써서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연마해 온 실력을 모두 쏟아 부어 편액을 잘 써보리라 마음먹고 정성껏 붓을 준비하였다. 그런 다음 혼신의 힘을 다해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 비(飛) 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글자의 한 획 한 획에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꿈틀거리는 용의 기상이 완연하였다. 양사언은 스스로도 대견하고 만족스러워 ‘비’ 자에 이어 ‘래(來)’ 자와 ‘정(亭)’ 자를 내리썼는데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두 글자를 써보았으나 여전히 ‘날 비’ 자만 못하였다. 안타까운 심정을 억제하며 몇 번이고 고쳐 썼으나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양사언은 그만 화가 치밀어 붓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먼저 써놓은 ‘날 비’ 자를 새겨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 글자만은 살아 움직이는 듯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날 비’ 자만으로 족자를 만들어서 자기가 공부하는 서재에 걸어 놓았다.
세월이 흘러 양사언은 안변(安邊)군수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게 되었고 떠나면서 사람을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다. 안변군수로 있으면서 그는 효제(孝悌)로 교화하고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또 큰 못을 파고 마초를 많이 쌓아놓아 뒷날 군마의 주둔에 대비했는데, 과연 다음해에 난리가 일어나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지릉[智陵: 조선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翼祖)의 능]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낯선 땅에서 2년 넘게 귀양살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그가 한때 신선처럼 살리라 꿈꾸며 지어 놓았던 비래정에 고성지방 특유의 드센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쳤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고 나가 공중으로 흩날려 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 모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잃은 것이 없었으나 ‘날 비’ 자를 쓴 족자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양사언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족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부리나케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바닷가까지 뛰어가며 샅샅이 찾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양사언과 가깝게 지내던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돌아오던 길에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이에 그 벗은 사언의 죽음을 더욱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비래정에 「비자기(飛字記)」를 기록한 유근(柳根, 1549~1627)은 양사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봉래 선생은 비록 속세에 살았지만 인간 세상 밖으로 벗어나 수려하기는 왕희지(王羲之)02의 풍류와 하계진(賀季眞)03의 필법과 같았다. 사장(詞章: 시가와 문장)이 세상의 추앙을 받았지만 마침내 귀양지에서 돌아가시니 안타깝도다. 선생의 비범한 능력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
이 일이 있기 전에 비래정을 찾았던 한 진사(進士)는 ‘날 비’ 자가 하도 마음에 들어 모사해 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난리 통에도 그 글자만은 불에 태우지 않고 잘 보관해 두었다. 사언의 맏아들인 양만고가 이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가 모사한 ‘날 비’ 자를 보면서 파란만장했던 부친의 삶을 되새겨보았다고 한다.
그의 사승(師承)관계를 알 수 있는 『인물고(人物考)』에 따르면 “(양사언은) 점치는 일에 정통하였는데 남사고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 데서 그의 이인(異人)적인 풍모를 엿볼 수 있다. 그와 교유한 사람으로 『봉래시집』에도 언급된 허엽(許曄), 이달(李達)과는 금강산 일대를 함께 유람하기도 하였다. 양사언은 스스로 ‘봉래산인(蓬萊山人)’이라 하면서 이달을 가리켜 이적선(李謫仙)04이라 부르곤 하였다. 또 어느 시에서 양사언은 “지금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 적은데 누가 종자기(鍾子期)를 보내 백아(伯牙)의 짝이 되게 하였나!”라고 하면서 이달과의 교분을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05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런 양사언의 부음(訃音)을 접한 이달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인 줄 본래 알았으니
슬퍼하며 부질없이 수건을 적실 필요가 없네.
그대 동녘 바다의 봉래로 돌아가는 길에는
벽도화 수천 그루가 활짝 핀 봄이리라.
- 『蓀谷詩集』 「哭楊蓬萊」
01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02 왕희지(307~365)는 동진(東晉)시대의 서예가로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03 하지장(賀知章, 659~744)의 자는 계진(季眞)이며 중국 당나라의 현종(玄宗)을 섬겼던 시인이다. 하지장이 이백(李白)을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한 뒤 이백의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詩壇)에 퍼졌다. 그 자신도 풍류인으로서 이름이 높아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04 적선(謫仙)은 벌을 받아 인간 세계로 쫓겨 내려온 선인(仙人)을 뜻한다.
05 춘추전국시대 때 진(晉)나라에 거문고의 달인 백아가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해주는 절친한 친구 종자기가 있었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고사가 말해주듯,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자기를 알아주는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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