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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신라 최후의 지사(志士)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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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3.25 조회6,5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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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신라 말기에는 귀족들의 왕위쟁탈전이 격화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고, 하층민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면서 농민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그런 와중에 전국 각지의 지방에서 호족들을 중심으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이 성장하여 지방 분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호족 중에서도 삼국통일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던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신라를 병합하려고 군사행동을 강화하던 후백제왕 견훤(箕)의 세력이 강성하였다. 

  당시 신라는 이들의 세력 다툼에 끼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신라의 남은 영토는 불과 백여 리, 그것도 왕명이 통하는 곳은 경주 인근의 몇 개의 군(郡)과 현(縣)에 불과하였다.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신라의 귀족이나 장수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투항하였고 백성들의 마음도 옛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고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국운(國運)이 다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재위 927~935)은 신라왕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고려에 항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백제 왕위계승을 둘러 싼 내분으로 금산사(金山寺)에 갇혀있던 견훤이 고려에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자, 왕건은 그를 우대하여 식읍(食邑)을 하사하며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사건은 경순왕이 자신의 결심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935년 10월 어느 날 그는 고려에 항복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하고자 문무백관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왕은 용상에 앉아 드넓은 대청 안에 늘어 서 있는 신하들을 굽어보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자기 부른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 문제를 경(卿)들과 논의하기 위함이오. 제공(諸公)도 알다시피 나라의 영토는 대부분 남의 손에 넘어갔고 이제 남은 것은 경주 일대의 몇 개의 군과 현뿐이오. 그나마도 이를 보존할 군사와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니 이러고서야 어찌 사직(社稷)의 유지를 운운할 수 있겠소.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 차라리 사직을 깨끗이 폐하고 고려에 의탁함이 가할 것이오.”

  경순왕이 먼저 솔직하게 자기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고려를 택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오. 수십 년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신라의 민심이 이미 오래 전에 고려로 쏠린 때문이오.” 

  그가 말을 마치고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자 누구 하나 나서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천년 가까이 이어온 사직을 하루아침에 폐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국왕의 결심을 좇지 않을 수 없음을 모두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좌중을 해치고 왕의 앞으로 나와서 엎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다음 왕위에 오를 태자였다. 이윽고 머리를 든 태자는 침통한 목소리로 부왕(父王)에게 고하였다. 

  “고려에 의탁함은 안 될 말씀인 줄 아뢰옵니다. 자고로 나라의 존망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 하거늘 그 명을 받으신 왕께서 어찌 맡은 바의 소임을 소홀히 생각할 수 있겠나이까. 하오니 부왕께서는 그런 생각을 버리시고 지금이라도 널리 천하의 충신(忠臣),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끝까지 사직을 보존하심이 옳을까 하나이다. 어찌 힘이 다할 때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천년사직(千年社稷)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나이까!”

  태자는 부왕의 의견에 결연히 반대하였다. 그는 아직 통일을 향해 흐르는 천하의 흐름과 민심의 동향을 깨닫지 못하고 ‘충의’ 하나만 들고 일어선다면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추켜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태자가 반대의 뜻을 표하자 조용하던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태자를 지지하며 나서는 신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왕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부복한 채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태자를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태자의 눈에는 사직의 내력만 있고 한 나라 한 강토에서 살기 바라는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가? 민심이 이러하거늘 끝까지 사직을 지킨다는 헛된 명분으로 대세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만 물러가라.”

  부왕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궁궐을 나섰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고려와 싸우든지 아니면 스님이 되어 금강산 골짜기 안에서 일생을 깨끗이 마치든지 두 가지 중 한 길을 택하리라 마음먹었다. 

  그해 경순왕은 마침내 고려에 귀부할 것을 청하는 국서를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통해 왕건에게 보냈다. 신라의 왕궁이 온통 통곡소리에 잠긴 그날, 태자는 자신을 따라 나선 신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금강산으로 가는 동해안 길을 놔두고 군사적 요충지인 충주, 원주를 거처 양평 용문사(龍門寺)01에도 들렀다. 

  용문사를 떠난 태자는 홍천을 지나 인제로 접어들었다. 그는 우선 금강산 남쪽에 위치한 천혜의 요충지인 인재지역에 전략적 거점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다시 며칠간의 행군 끝에 금강산 어귀에 이르자 군사들을 내금강(內金剛) 입구인 내강리에 머물게 한 다음 몇몇 신하와 군사들만 거느리고 장안사(長安寺)를 찾았다. 절 앞에 이르니 대륜법사가 미리 알고 나와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태자와 법사는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법사는 나라를 지키려는 태자의 충심을 갸륵하게 생각하면서도 간곡한 말로 그를 타일렀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일편단심 사직을 지키려는 그 마음 거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태자님, 옛날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절개를 지키긴 했지만 이렇게 군사를 거느리고 기울어진 나라를 건지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고려는 이미 호족들의 신망과 한 나라에서 살려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인 줄로 아나이다.”

  “법사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음….”

  태자는 법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그의 눈앞에는 며칠 전 왕궁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문득 그의 귓전에 “오늘같이 고립되고 위태로운 형세에서는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또 약하지도 못한 처지에 무죄한 백성들만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시던 부왕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크게 믿고 찾아온 대륜법사마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무모한 짓이라고 간하니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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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자는 드디어 항쟁을 단념하고 자신을 따라 온 신하와 군사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는 큰 소문을 내고 금강산에 들어온 이상 고려 왕조를 섬길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태자가 그때부터 금강산의 동굴을 집으로 삼아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세상을 마치니, 후세 사람들이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렀다.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 아래에는 둘레 약 10m, 높이 1.5m인 마의태자릉이 있다. 무덤 옆에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고 맞은편에 마의태자가 타고 다녔던 말이 변했다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이 외에도 금강산에는 마구간(馬廐間) 터와 태자성(太子城)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01 이 절에는 수령(樹齡)이 1100년이 넘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가 있는데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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