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굳은 절개를 ‘금강산 낙락장송’에 비긴 충신(忠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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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12 조회6,691회 댓글0건본문
병자년(1456년) 어느 날이었다. 세조(世祖)가 명나라 사신 일행을 위해 연회를 연다는 소문이 도성의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을 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집에는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해 전에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을 폐하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처사에 극도로 분격했던 조정의 한다 하는 문무관료들이었다.
이들 중 성삼문은 예방승지(禮房承旨)01로서, 세조가 보위를 빼앗아 등극하던 날 직책상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올리게 되었다. 그는 하도 기가 막혀 그만 옥새를 움켜쥔 채 통곡하니 세조가 빼앗듯 가져가 버렸다. 박팽년도 마침 그날 당직을 서다가 그 광경을 목도하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앞 연못에서 빠져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 그를 성삼문이 붙들고 만류하며, “영감! 공연히 죽기만 하면 어떡하오. 아직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가, 틈을 보아 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박팽년은 눈물을 거두고 삼문과 함께 뜻을 함께 할 동지를 찾아다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은 각자 맡은 업무를 보면서 이따금씩 모여 거사에 대해 논의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명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푼다는 소식을 접한 삼문은 그의 아버지 성승과 무관인 유응부가 연회 때 국왕의 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이란 것을 하게끔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용해 세조와 그 측근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을 복귀시키고자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짰다.
드디어 그 시각이 되었는데 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세조가 연회 때 운검을 파하고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는 성삼문 등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긴 세조의 측근들이 세조에게 아뢰어 그런 분부를 내리게 한 것이었다. 이 돌발적인 소식을 접한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거사를 일단 뒤로 미루었다.
이때 거사에 가담했던 김질이란 자는 그날 일이 여의치 못함을 보고 자기 신상에 누가 미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바꾸고 세조의 측근을 찾아가 그 동안의 경과를 낱낱이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단종복위운동의 전모가 사전에 탄로되어 성삼문 이하 6명의 주모자들은 모두 의금부로 끌려갔다.
노발대발한 세조는 먼저 성삼문을 끌어내어 친히 심문하였다.
“네가 너의 도당(徒黨: 불순한 사람의 무리) 다섯 사람과 공모하여 어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게 사실이냐?” 하고 다그쳐 물었다. 순간, 이것이 김질의 고발에 의한 일임을 직감한 삼문은 태연스럽게 그렇다고 시인했다. 세조가 다시 “너는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고 역적모의를 했느냐?” 하고 따져 묻자 삼문은 큰 소리로 항변하였다.
“진짜왕을 왕위에 복위시키고자 하는 것이 어찌 배반이란 말이오. 상왕(단종)께서 아직 젊은데 나으리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니 상왕을 다시 복위시키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소?”
성삼문의 태연함에 세조는 격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네가 지금 나를 왕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르다니…, 게다가 나의 녹(祿)을 먹고 있으면서 배반하는 것이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섬길 왕은 오직 상왕이시오. 내 상왕이 폐위되었을 때 진실로 죽을 것을 각오하였지만 그저 죽기는 무익하므로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이외다. 그리고 나으리가 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았으니, 미덥지 않다면 내 집을 뒤져보면 알 것이오.”
자기를 왕이 아니라 찬탈자로 경멸하는 삼문의 힐책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세조는 그에게 쇠를 달구어 살에 놓고 지지는 혹독한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삼문은 살이 타고 뼈가 녹는 고통 속에서도 낯빛 하나 변치 않고 여전히 세조와 그 측근들을 꾸짖고 있었다.
그러자 세조는 그 어떤 형벌로도 그의 절개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해 잘못을 뉘우치면 그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종전과 다름없이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그를 회유했다. 하지만 고문도, 위협도, 회유도 “충의(忠義)”를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삼고 있는 삼문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세조의 행위를 도의에 어긋난 처사로 규정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삼문은 살가죽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단근질을 당하다가 큰 칼을 쓰고 하옥되었다.
삼문을 심문한 뒤 잠깐 하옥시켰던 세조는, 끝내 그를 달래어 보고자 신하를 시켜 태종이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건넸던 노래를 적어 보이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금강산)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 천지에 가득참)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세조는 이 노래를 듣고 길게 탄식하면서, “지금은 난신(亂臣)이라도 후세에는 충신(忠臣)으로 받들어지리라.” 했다고 한다.
그날 혹독한 국문이 끝난 뒤, 삼문은 후세에 ‘사육신(死六臣)’으로 전해진 박팽년·이개·유응부·하위지·유성원과 함께 수레에 실려 한강가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사지(四肢)가 찢기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니, 때마침 노을이 비낀 형장은 그들의 피로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가 죽은 뒤 부친 성승을 비롯하여 다섯 아들과 동생, 사촌들까지 모두 연좌되어 죽고, 부인은 관비가 되었다.
성삼문이 처형당한 날 관원들이 그의 재산을 몰수하러 갔을 때였다. 그의 집을 뒤져보니 쌀 한 톨 없고, 방은 오래 불기운이 없었던 듯 냉랭한데 대자리 한 잎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곳간에는 을미년(1455년) 세조가 등극한 뒤부터 받은 녹미가 날짜별로 기록되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고 한다.
성삼문! 그는 본시 홍주군 적동리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출생할 때 공중에서 귀신이 세 번 소리치면서 순산했느냐고 물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성품이 침착, 정중하고 재주가 뛰어난데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그의 사람됨이 훨씬 깊이가 있었다. 세종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 무려 열세 번이나 그를 요동에 있는 황찬이란 중국의 어학자에게 내왕케 하여 음운에 관한 것을 문의하게 했다. 또한 각 도에 흉년이 들면 그를 어사로 임명하여 백성들을 구제케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한번은 그가 어사가 되어 영남지방으로 내려갔다가 태백산에서 한 기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기인과 세상사를 의논해 본즉, 미래사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 후 을미년 거사를 앞두고 사람을 보내어 일의 성사 여부를 알아오게 했더니, 사람은 없고 방의 벽면에 다음의 글 한 구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천추를 피로 물들여 이름이 만고에 전할 것이니, 내게 물어 무엇 하리오.”
삼문이 이를 보고 찬탄하기를, “명수가 이미 정해 있도다.” 하면서 기꺼이 거사함으로써 사지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기인의 예언대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었고 만고의 충신으로 존숭되어 오고 있다.
<대순회보> 88호
[참고문헌]
안재청, 리용준 저,『금강산일화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교양국사연구회 편저,『이야기조선왕조사』, 청아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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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승정원에 소속되어 있던 정3품의 당상관직으로, 주요 업무는 예조(禮曹)와 그 부속아문에 관련된 왕명의 출납과 보고를 맡아 처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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