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최익현의 금강산 유람과 시(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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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26 조회6,682회 댓글0건본문
금강산 유람을 이어가던 어느 날 최익현은 별천지로 소문난 옥류동(玉流洞) 골짜기 안에 들어섰다. 수정을 녹여서 쏟아 부은 듯한 옥류담과 파란 구슬을 연달아 꿰어놓은 듯 두 개의 소(沼)가 잇닿아 있는 연주담이며, 봉황새가 창공을 향해 은빛 날개를 펴고 긴 꼬리를 휘저으며 하늘로 나는 모습의 비봉폭포에, 병풍처럼 둘러선 옥녀봉까지…. 봉우리와 골짜기, 너럭바위와 시냇물, 그리고 벼랑과 울창한 숲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옥류동은 과연 소문처럼 빼어난 절경(絶景)을 자랑하고 있었다.
최익현은 옥류동 계곡이 하도 맑고 깨끗하여 자신의 마음도 정화되는 듯싶었다. 그가 옥류동의 화려한 경치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맑게 개었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더니 큰 줄기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 밑으로 뛰어가 비를 피했다. 내리던 비는 오래지 않아 멎었고 구름 사이로 이내 해가 비쳤다. 옥 같은 물이 흐르던 골짜기의 못은 방금 내린 소나기로 인해 수면이 높아져 더 넓고 깊어졌으나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비에 씻겨 한결 더 정갈한 자태를 드러낸 옥류동 골짜기 안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최익현은 문득 이곳과는 너무 다른 세계인 장안(長安: 서울)이 떠올랐다. 당시 위정자들의 사대정책은 조선을 놓고 군침을 흘리던 일본과 서구열강들이 들어와 장안이 좁다 하고 마음껏 활보케 하였다. 무슨 ‘공사’니 ‘고문’이니 하는 감투를 쓴 침략의 척후병들이 궁중에 수시로 드나들며 우리나라의 내정에 함부로 간섭하고 무능한 조정 대신들을 협박해 우리의 자주권을 유린하는 불평등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부귀공명에 눈이 먼 대신들은 저마다 외세를 등에 업고 온갖 부정과 매국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사랑방에서는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나라의 이권(利權)을 외국의 장사치들에게 팔아넘기는 모략이 난무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던 지사(志士)들마저 철창이나 유배지로 끌려가니, 장안은 그야말로 사대매국노와 침략자들이 판치는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이를 두고 나랏일을 근심하던 최익현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시(詩) 한 수가 흘러나왔다.
새로 온 비에 못은 드넓고
바람 없어도 스스로 차다
참으로 신선세계에 앉은 듯
그림 속을 날며 보고 있는 듯
비탈진 바위에는 뉘 먼저 오를까
까마득한 다리는 바라보기도 어려워라
여기 맑고 깨끗한 한 지역에서
장안을 돌아보며 탄식하노라
시 읊기를 마치고 옥류동을 내려가는 그의 가슴속에는 내 나라 금수강산을 절대로 외적들에게 짓밟히게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심정이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금강산을 찾은 지 열흘째 되던 날 최익현은 유람의 마지막 일정으로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海金剛)을 찾았다. 망망한 바다 위에 보석을 뿌려놓은 듯, 떠오던 보석이 엉겨 붙은 듯 천만가지 모양을 한 해만물상(海萬物相)의 바위와 섬들은 바라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아름다웠다. 어디선가 어부들이 부르는 구성진 뱃노래는 해금강의 수려한 풍치와 어울려 그의 가슴속에 들끓고 있는 조국 강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더해주었다.
이윽고 배를 타고 확 트인 바다로 나간 그는 해안을 따라 펼쳐진 해만물상의 바위와 섬들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해금강을 보지 않고서는 금강의 미(美)를 알지 못한다.”고 한 사람들의 말이 참으로 옳음을 절감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흰 수염을 날리며 끝없이 펼쳐진 절경을 바라보니 나랏일로 답답하던 가슴이 잠시나마 확 트이고, 열흘 동안 금강산구경에 지쳤던 다리에도 다시 힘이 솟았다.
어느덧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수정 같은 바닷물 위에 비쳐 해금강 일대는 신비경을 이루고 있었다. 해만물상의 어느 바위에 배를 댄 그는 준비해 온 낚싯대를 바닷물 위에 드리우고 몇 마리의 생선을 낚았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솥에 끓인 생선국을 안주 삼아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얼마간 취기가 오르자 최익현은 고향의 늙으신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금강산으로 떠나올 때 멀리까지 바래다주며 나라가 어수선하니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초야에 묻힌 몸이지만 하루 한시도 나랏일로 근심을 놓지 못하시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이 강토를 넘보는 외적들을 물리치지 못함이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최익현은 가슴속에 서리는 이런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어둠이 짙어가는 바다를 향해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다함없는 금강산 또 여기서 찾아보리
뱃노래 두어 곡에 번뇌가 흩어지네
열흘 동안 산을 타니 다리 고단해도
바다를 보는 마음 만리에 밝게 통하누나
하늘가엔 이제껏 날 아는 이 없었는데
우연히 만난 경치 볼수록 정겹구나
햇살 비낀 길가에서 고기 잡고 술을 마시니
천리 밖 부모생각에 애달파서 시 읊노라
그는 조선에서 태어난 남아답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이 한 목숨 바칠 비장한 결심을 다진 채 금강산을 떠났다.
최익현의 금강산 유람은 흑산도와 제주도 유배 당시 흑산과 한라산의 빼어난 경관을 찾아갔던 것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특히 삼신산(三神山)01의 하나로 일컬어지던 한라산(漢拏山: 1950m)의 경치는 그에게 대단한 피안의 선경(仙境)으로 인식되었다. 한라산 유람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고 다만 유배지가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였기 때문에 우연한 기회에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한라산의 기이한 장관을 보고 아무 여한 없이 찬송하고 싶었으나 그만한 문장력이 부족하다 여겼다. 그래서 그처럼 아름다운 경치들을 아무 자취도 없는 허공 속에 묻어버리고 만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한라산 유람에서 못 다한 아쉬움과 나랏일에 대한 근심에서 금강산 유람을 추진하였다. 한라산의 장관을 시(詩)로 남기지 못한 아쉬움도 있어서 이번에는 그 정취를 글로 남기고자 하였다. 그래서 최익현은 다른 시기에 비해 두드러지게 많은 시를 지었다.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면서 그 여정에 따라 39편의 시를 남겼으니, ‘금강산 유람시’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금강산 유람은 최익현이 속세를 벗어나 일정한 거리에서 현실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산의 절경 속에서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가적 세계관을 지닌 그는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그의 삶에서 일차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당면한 조국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금강산의 아름다운 정취도 그의 번뇌를 근본적으로 씻어 주진 못하였다. 금강산을 떠날 때,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던 최익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조국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서 있었다.
<대순회보> 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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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 하여 이 세 산을 삼신산으로 일컬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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