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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최익현의 금강산 유람과 시(詩)[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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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12 조회5,0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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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菴)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그는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서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성리학의 거두인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의 정사(政事)가 극도로 어지러워지고 서구열강을 비롯해 일제의 간섭과 침략이 그칠 새가 없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최익현은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항일의병운동을 벌인 구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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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1873년부터 대원군의 실정을 비롯한 대내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이 사건은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 친정(親政)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올린 상소문에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의 문구가 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01되었다가 1875년 초에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조약이 추진되자 최익현은 도끼를 지닌 채 궁궐 앞으로 나아가 화의(和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해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02의 영향을 받아 부패한 관료들의 매국적 행위와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던 그의 신념과 지조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16년간 학문에 정진하고 명승을 유람하며 재야인사로 지냈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유생들을 모아 이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에 나섰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유학자들 속에서 명망이 높던 최익현에게 벼슬까지 주면서 회유하고자 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10년 뒤인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던 최익현은 이듬해에 74살 고령의 몸을 이끌고 결연히 반일의병을 일으켰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전라도 순창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고을을 점령하고 그 세력을 확대해 조정과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들을 진압하고자 조정에서는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으로 결성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순창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최익현은 동포간의 유혈충돌을 우려해 의병을 해산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일본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여 고문과 위협으로써 굴복시키려다가 뜻을 이룰 수 없자 3년형을 씌워 대마도로 유배를 보냈다.

  낯선 이국땅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던 최익현은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투쟁으로 저항하다가 74세의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일제에게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이 무참히 유린당하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 통분함을 금치 못하며 나라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이 몸을 일으켜 북두성 빛나는 조국을 바라보니

백수로 잡힌 몸의 통분함을 억제할 수 없노라.

만 번 죽어도 적들의 부귀를 탐할쏘냐

오로지 일생에 내 나라 잊지 못하노라.

   

  이처럼 최익현은 일신(一身)의 안위보다 나라의 일을 걱정하고 조국을 사랑하였다. 이런 그가 50고개를 넘어서야 금강산을 유람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산 좋고 물 맑은 조국의 산천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늘 자부하면서도 천하명승으로 이름난 금강산을 늘그막에 찾게 된 자신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금강산의 명소를 돌아보면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태어난 자부심을 더욱 깊이 간직할 수 있었고, 수려한 풍경의 이 땅이 일제의 발길에 더럽혀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하는 계기도 되었다.

  어느 날, 외금강에서도 제일장관으로 알려진 구룡연을 찾은 그는 황홀경의 극치를 이룬 아름다운 경치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구룡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폭포와 마주쳤던 최익현은 아득한 천길 벼랑에서 지축을 울리며 떨어지는 폭포수를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맞은편 너럭바위가 있는 쪽에 눈길이 닿았다.

  그런데 거기서는 이곳의 경치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옥색 도포자락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벼슬아치들이 기생들을 끼고 앉아 한창 술타령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벼슬아치들의 몰골과 간간이 들려오는 기생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 ….

  최익현은 못 볼 것을 본 듯 이내 뒤돌아섰다. 생각할수록 방탕하게 노는 그들의 모습이 금강산을 모독하는 것만 같아 가슴 속에서는 울컥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했다가 이내 마음이 언짢아진 최익현은 분연히 그 자리를 떠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명승지는 예로부터

귀신도 아끼는듯

예로부터 이 폭포에

올라본 사람 드무네

   

백 길 비단 드리우니

쌍봉폭이요

일만 우레 소리치듯

구룡연 울부짖네

   

절로 생긴 천연의 미

보기는 쉽지마는

변화무쌍한 풍음은

그리기도 어려워라

   

이 세상 속된 사람

부질없이 찾을까봐

십리밖 바닷가에서

뭇 산 겹겹이 늘어섰네   

 

  이 시에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아끼는 그의 애틋한 심정과 함께, 금강산이 때 묻은 속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비경으로 남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대순회보>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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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02 정의를 지키고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가톨릭과 서양의 문물을 반대한 19세기 중엽 구한말의 사상 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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