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서산대사와 금강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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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4 조회6,475회 댓글0건본문
조선시대 500여 년을 통틀어 최고의 승려로 꼽히는 서산대사(1520~1604)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승병의 총수(總帥)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본명은 현응(玄應)이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이나 별호인 서산(西山)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최세창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중종 14년(1519) 여름, 어머니 김씨는 며칠간 계속 몸이 불편했는데 하루는 창가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이때 어느 틈엔가 한 노파가 나타나 예를 올리고 “놀라지 마십시오. 장부를 잉태하겠기에 제가 와서 축하드리는 것입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김씨 부인이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이듬해 3월 오십에 가까운 나이에 기골이 훤칠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가 세 살 되던 해의 4월 초파일에 최세창이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으니, 한 노인이 나타나 “아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하고는 두 손으로 아기를 받쳐 들고 주문을 몇 번 외웠다. 주문 외우기를 끝내고 나서 노인은 아기를 내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기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고 소중히 기르십시오.”라고 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노부부는 아기를 부를 때 ‘아기 스님’ 혹은 아명(兒名)인 ‘운학’이라 불렀다.
서산대사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었다. 모래를 모아 탑을 쌓거나 기와를 가져다가 절을 세우는 종류의 놀이를 즐겨했다. 그런데 그가 9세 되던 해에 큰 불행이 닥쳐왔다. 이해 어머니가 홀연 돌아가시더니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고만 것이다. 이때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있던 이사증(李思曾)이 슬픔에 잠긴 고아의 소문을 듣고 소년을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때는 마침 겨울이어서 목사가 멀리 눈 덮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며 시(詩)를 지어 보게 했더니 소년은 이내 시를 읊었다. 소년의 재주에 탄복한 목사는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목사가 내직(內職: 기관의 중앙 부서에 있는 직책)으로 옮기면서 그도 한양의 성균관에 취학해 3년 동안 학문에 정진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했으나 낙방의 쓴 잔을 마시고 동문들과 호남지방에 내려가 있던 스승을 찾아갔으나 그때 이미 스승은 서울로 돌아가고 없었다. 이왕 내려온 김에 산천이라도 유람하자는 친구의 제안에 서산대사와 일행들은 지리산의 화엄동, 칠불동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어느 자그마한 암자에서 한 노승의 설법을 듣고 행자생활을 하며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3년간 불법을 공부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삭발한 다음 지리산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있던 영관(靈觀)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이후 그는 몇 해 동안 여러 암자를 떠돌며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30세 되던 해에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승과제도가 부활하여 첫 시험이 실시되었다. 서산대사도 주변의 권유에 따라 시험에 응시, 수석으로 합격하여 대선(大選)01이 되었다. 이후 서른 중반에 선종과 교종을 총괄하는 양종판사(兩宗判事)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여기서 1년 남짓 머물던 그는 판사나 주지 등의 명리(名利)가 출가의 본뜻이 아니라 여겨 눈병을 핑계로 모든 승직을 버렸다. 그리고는 지팡이 하나와 바리대 하나, 단벌의 옷만 챙겨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반년을 보낸 뒤 전국 각지의 명산대천을 두루 편력하며 수행과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전국의 명산을 떠돌던 서산대사는 묘향산의 금강암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 묘향산은 서북의 명산이란 뜻에서 서산(西山)이라 불렸는데 그의 별호인 서산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불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을 통해 당대의 스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는 많은 제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제1 수제자로 알려진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이 서산대사를 처음 만난 곳도 금강암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두 사람의 재주 겨루기에 관한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누가 먼저 산에 오르냐를 두고 겨룬 시합에서 서산대사가 이겼다고 한다.
그들의 도술 겨루기에 관한 이야기는 금강산에도 전해지고 있다. 외금강의 유점사에 있던 사명당은 서산대사가 내금강의 백화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백화암으로 가던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도술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누구도 모르게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한 채 올라가다가 절 어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때 한 동자승이 나타나 그를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이었다.
사명당이 “네가 어찌 나를 알아보는 것이냐?” 하고 물으니, 동자승은 서산대사가 스님이 오는 것을 미리 간파하고 시냇물을 역류시키며 올라오는 분이 사명당이니 정중히 모셔오라고 하신 전말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명당은 속으로 ‘스님은 과연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동자승과 함께 암자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명산대찰을 편력하던 서산대사는 여러 편의 시를 읊었는데 그 중에서도 금강산에 머물 때 지은 삼몽사(三夢詞)와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가 유명하다.
주인은 손에게 꿈을 얘기하고
손은 주인에게 꿈을 말하네.
지금 꿈을 얘기하는 두 사람
그 모두 꿈 속 사람일세.
이렇게 삼몽사를 읊조린 서산대사는 향로봉으로 올라가 세상의 온갖 명리(名利)의 허망함을 절감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향로봉 시는 뒷날 그가 역모(逆謀)의 혐의를 받고 하옥되는 빌미가 된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 같네.
맑고 그윽한 달빛 베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은 한가롭구나.
서산대사는 금강산에 머물며 비단필을 수놓은 것 같은 금수강산에 태어난 크나큰 긍지를 안고 천하명산 금강산에서 수행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한양을 떠난 뒤 일체의 승직을 버리고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으나 그의 문하에는 도(道)를 얻고자 찾아오는 이들이 날로 늘어만 갔다.
<대순회보> 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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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려•조선 시대 승과(僧科)에 합격한 중의 법계(法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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