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금강산에 온 넋을 빼앗긴 화가, 최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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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5 조회6,498회 댓글0건본문
최북이 통천을 거쳐 고성 땅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가 접한 금강산의 절경은 그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천태만상의 절묘한 경치는 글로 담고 붓으로 그리기에는 너무나도 황홀하고 기이하였다. 앞을 보고 뒤를 봐도, 동쪽을 보고 서쪽을 봐도 제 나름의 미를 간직하며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별천지였다.
최북은 비로소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山水)를 말하지 말라!”고 한 옛사람들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금강산을 자기의 화폭에 옮겨보지 못하고 최산수란 별칭으로 불려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최북은 서둘러 등에 진 봇짐을 내려 화통을 꺼내들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부지런히 다니며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으리라 굳게 마음먹고 붓을 쥐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펴놓은 화폭 앞에서 붓을 든 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천변만화하는 기암괴석과 운무(雲霧)에 휩싸인 수려한 봉우리들, 그리고 손을 담그면 금세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소(沼)를 비롯해 옥계수 흘러내리는 계곡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처럼 붓을 쥔 채 몇 시간이고 정신없이 금강산의 절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배고픔도 잊고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잠자리에 누워 제정신으로 돌아와서야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내일은 꼭 그리리라 마음 다지곤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도 여전하였다. 탐승길은 계속되었으나 그는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북은 금강산의 명소들 가운데서도 으뜸의 하나인 구룡폭포의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렀다. 가파르게 깎여진 절벽 아래의 연못에 전설의 아홉 마리 용이 지금도 도사리고 있는 듯, 뽀얗게 물보라를 일구며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앞에서 한동안 정신을 잃고 바라보던 최북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기어이 구룡폭포의 장관을 화폭에 옮기리라 생각한 그는 구룡연의 너럭바위 위에 화구를 펼쳐놓았다. 그러나 붓을 든 최북은 이번에도 역시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화폭에 옮기질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금강산을 유람하고도 시(詩) 한 수 짓지 못한 친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하에 어떤 명화가라도 쉽게 묘사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다시금 흠뻑 취한 최북은 그림을 그리려던 생각을 까맣게 잊고 하염없이 폭포수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의 가슴속에서는 천하명승을 보게 된 환희와 격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이런 심정을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된 최북은 환희에 웃다가도 서러움에 울었다. 더러운 양반세상에서 수모를 당하며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 사람들이 평생 동안 한번이라도 보길 원하는 금강산을 둘러본 기쁨을 안고 깨끗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최북은 앞뒤를 잴 겨를도 없이 소용돌이치는 구룡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침 그곳을 지나던 길손들이 미친 것 같은 그의 행동을 미리 주시하다가 재빨리 달려들어 구하는 바람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 후 최북은 화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재현하는 것을 일생의 중대한 목표로 삼고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금강산 산수화 가운데서 대표적인 작품에는 ‘금강산도(金剛山圖)’와 ‘표훈사도(表訓寺圖)’가 있다. 금강산도는 부채형으로 된 화면에 굽어볼 수 있도록 금강산의 경치를 집약적으로 묘사한 걸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림에는 우뚝 솟은 바위들로 절벽을 이룬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안개와 구름 속에 휘감긴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표훈사도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표훈사와 주변의 함영교, 능파루까지 정확하고 뚜렷하면서도 넓은 폭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도 최북이 창작한 금강산산수화들은 기성의 개념이나 필법에 구애되지 않고 아름다운 산천(山川)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체험을 진실하고 유연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북은 반항적인 성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화가로 유명하지만 그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보면, 그 어떤 그림보다 더 깊고 중후한 기품이 느껴져 그가 지닌 진정한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대순회보> 87호
[참고문헌]
안재청, 리용준 저, 『금강산일화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이준구, 강호성 저, 『조선의 화가』, 스타북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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