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야기만덕의 가장 큰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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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29 조회7,121회 댓글0건본문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인 정조 19년(1795), 제주 목사는 벌써 며칠째 영암에서 출발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에는 제주 최악의 해로 기록된 흉년을 맞아, 조정에서 마련한 구휼미가 실려 있었다. 당시 제주는 3년 전부터 계속된 가뭄과 자연재해로 인해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에 제주 목사가 조정에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어렵게 1만 섬의 구휼미를 마련하여 12척의 배에 실어 보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중 5척의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면서 제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조정의 구휼에 차질이 생기자, 당시 제주 최고의 부자였던 김만덕(1739~1812)은 지난 수년간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흉년으로 목숨을 잃은 심각한 상황을 그저 좌시할 수만 없었다. 만덕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객주(客主)01 및 상거래를 통해 모은 전 재산을 내놓아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수천 석의 쌀을 들여와 모두 관아로 보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부황(浮黃)02난 자들이 관가 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그들은 “우리를 살려준 이는 만덕”이라며 그녀의 은혜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제주 목사는 즉시 장계를 올려 이런 만덕의 선행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만덕을 기특하게 여긴 정조(正祖, 1752~1800)는 목사를 시켜 그녀의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게 하였다. 목사는 즉시 관원을 보내 만덕을 관아로 불러들여 임금의 분부를 전했다. 이에 대답을 주저하던 만덕은 목사의 재촉을 듣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다만 어릴 적부터 저의 가장 큰 소원은 단 한번이라도 이곳 제주를 벗어나 임금이 계신 한양과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유람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벼슬도 금은보화도 원하지 않았던 만덕의 소원은 결코 이루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상거래 외의 육지출입이 국법(國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여성의 경우 육지 사람과 혼인을 금할 정도로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조는 그런 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도록 지시했다.
이제 만덕이 한양으로 올라간다는 소식은 한 입 건너 두 입 지나 제주 땅에 파다하게 퍼졌다. 마을이나 시장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그녀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의 명을 받고 여인의 몸으로 한양에 가게 된 것은 섬이 생긴 이래 만덕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한양에 가면 나라에서 큰 상을 내릴 것이라며 다들 부러워 야단이었다. 그녀가 떠나던 날엔 친척들과 마을사람들이 포구에 나와 자신들로서는 꿈에도 생각 못할 한양 구경을 가는 만덕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배웅해주었다.
보름정도의 긴 여행 끝에 만덕이 한양에 도착하자, 정조는 평민인 그녀가 궁궐에 들 수 있도록 내의원 행수라는 직위를 주었다. 만덕이 관원의 안내를 받아 넓은 대청에 들어서니 여러 명의 고관들이 늘어선 단상 위에 정조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급히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린 후 임금의 하교를 기다렸다. 그녀를 넌지시 내려다보던 정조는 온화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의 소원을 듣고 보니 네가 스스로 구휼미를 나라에 바쳐 굶주린 수많은 백성을 구한 것은 큰 상을 받거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 이제 너의 소원을 들어주고 너의 행실을 귀감으로 삼으려 하니 육지에 머무는 동안 마음껏 둘러보도록 하여라.”
“네, 고맙습니다.” 만덕은 임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정조는 곧 만덕의 선행을 다른 도에서도 본받게 널리 알리도록 명하고, 그녀가 육지에 머무는 동안 양식과 노자를 지급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국토의 남쪽 끝에 살던 만덕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임금의 배려로 그곳에 머무는 동안 궁궐과 도성의 경치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797년 3월에 만덕은 그토록 고대하던 금강산 구경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관에서 특별히 마련해준 역말을 타고 금강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만덕은 한 달간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과 유명한 곳을 두루 돌아보았다. 금강산은 삼라만상을 축소해 놓은 세계여서 그곳을 유람하는 것은 풍류객들에게 대단한 명예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금강산 유람을 위한 계를 결성할 정도로 금강산에 대한 열풍이 대단했다. 이렇다보니 그녀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만덕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변방의 제주에 살던 여인이 주린 백성을 살릴 만큼 상업으로 크게 성공한데다, 사대부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고 왔다는 소식은 장안에도 큰 화제가 된 것이다. 이름난 문인과 학자들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육지 여행을 마치고 귀향하는 만덕을 위해 환송시를 지어주었고, 특히 정승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만덕의 일대기를 글로 써서 선물해 주기도 하였다.
6개월간의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육지 여행을 마친 만덕은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을 이루고 제주에서 여생을 마쳤다. 김만덕, 그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 기생 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들의 목숨들을 구했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 양가집 딸이었던 만덕은 조실부모하고, 홀로 사는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거둬졌다. 기예에 재능이 있었던 만덕은 관기로 활약할 때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용모 또한 빼어나 그녀의 명성이 육지까지 퍼졌다. 타고난 재능 덕에 가난에서 벗어나 재물을 모을 수 있었지만 노비의 신분이었던 기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사정을 관아에 울면서 호소하니, 이를 불쌍히 여긴 목사가 그녀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관기를 그만둔 만덕은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제주목 관아와 인접한 곳에 터를 잡은 만덕의 객주는 그녀가 쌓은 인맥과 명성으로 인해 많은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번창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배를 이용해 육지 상인과 직거래를 시도했다. 이를 통해 제주에서 가장 귀한 품목인 쌀과 소금을 육지로부터 싼 값에 들여오고, 제주 특산품인 미역과 말총, 양태(갓의 테두리) 등을 더 많은 이문을 남기고 팔면서 큰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일개 기생에 불과했던 만덕이 제주 최고의 거상(巨商)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런 그녀가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을 위해 기꺼이 내놓음으로써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고, 당대의 실학자들로부터 시대를 앞서간 여인으로 평가받았다.
<대순회보>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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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당시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판매하는 일종의 중개상인이었다.
02 오래 굶주려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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