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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비단 치마에 금강산을 그린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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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3 조회6,7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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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鄭敾, 1676~1759)의 자는 원백(元伯)이고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이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가난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정선은 어려운 집안을 돕고자 이웃에 살던 어느 대신에게 청하여 도화서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01를 비롯해 한성부주부, 하양현감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까지 제수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30세를 전후하여 화가로서 활동했던 정선은, 당시 중국에서 들어와 유행하던 남종화(南宗畵)02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36세에 금강산의 모습을 접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창안하였다. 이 화법은 현실감 넘치는 화풍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기법이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중국 산수화의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 오던 한국 회화사에 일대 변혁을 불러일으켰고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이 화법을 토대로 정선은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지인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기회 닿는 대로 찾아다니며 화폭에 담았다. 특히 그는 여러 차례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백여 폭에 이르는 작품을 만들 정도로 금강산 그림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선의 명성이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그림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 중에서도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될 정도로 소장가치가 큰 작품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어느 날 정선의 아내가 아는 사람에게서 비단 치마 한 벌을 빌려 입었다가 그만 잘못하여 고기 국물을 쏟아 더럽히고 말았다. 비단 옷이 너무 더럽혀진 것을 본 그녀는 걱정이 되어서 어쩔 줄 몰랐다. 정선이 가만히 그 치마를 살펴보니 더럽혀진 부위가 너무 넓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는 아내에게 치마허리를 뜯고 주름을 펴서 얼룩진 부분을 씻은 후 바깥채에 널어두게 하였다.

  하루는 정선이 집에 앉아 있자니 날씨가 청명하고 상쾌하여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부쩍 일었다. 그는 즉시 화구를 벌려놓고 아내에게 빨아 널어 둔 비단 치마를 가져오게 하여 앞에 펼쳐 놓았다. 붓을 든 정선은 단풍이 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절경을 단숨에 그려 나갔다. 붓 끝에 바람이 일 정도로 가로세로 휘두르자 금강산이 살아 움직이듯 얼룩진 비단 폭에 담겼다. 내친 김에 옆에 남은 두 폭에도 금강산의 기암절벽을 각각 하나씩 그렸는데 그 모습이 기묘하기 그지없어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명화였다.

  며칠 뒤 치마를 빌려준 사람의 남편이 그것을 찾으러 오자 정선은 금강산이 그려진 비단 치마를 내 놓으며 사과하였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부쩍 일었는데 마땅한 천이 없어 고민하다가 마침 그대의 집에서 빌려온 비단 치마가 눈에 띄기에 그만 그 치마에 붓을 대고 말았소.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그 속에 담겼으니, 부인이 보면 틀림없이 깜짝 놀랄 것이외다. 이것 참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그 치마의 임자도 그림을 웬만큼 볼 줄 아는 사람인지라 정선이 비단 치마에 그려 놓은 금강산 그림을 보고서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그는 진수성찬을 한 상 잘 차려놓고 정선을 초대해 대접하며 거듭 사례하였다.

  얼마 후, 치마 주인의 남편은 큰 폭의 그림을 집안의 보물로 간수하고 나머지 두 폭은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갈 때 가지고 갔다. 북경에 도착하여 그림을 가지고 화방에 가니 마침 촉 지방의 청성산에서 온 스님 한 분이 있었다. 그는 비단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는 천하의 보배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지금 새로 절을 지어 놓았으니 이것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싶소. 내가 은자 백 냥을 드릴 터이니 이 그림을 나에게 파시오.”

  그 사람이 허락하고 스님과 흥정을 마쳤는데 남경에서 온 선비가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스무 냥을 더 낼 테니 이 그림을 내게 파시오.”

  그러자 스님이 크게 노하여 선비를 꾸짖었다.

  “내가 이미 값을 흥정하여 사기로 하였는데 명색이 선비라는 사람이 이익을 탐내어 도리를 잊고 사이에 끼어들어 이렇게 한단 말이오? 내가 거기에 삼십 냥을 더 얹어 백오십 냥을 내겠으니 그 그림을 내게 주시오.”

  스님은 돈을 더 내어 그림을 사더니 이내 그것을 불 속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세상인심이 도무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가 이것을 탐낸다면 이 사람과 무엇이 다르리오.”

  스님이 곧 옷을 털고 일어나자, 그림 주인도 받은 돈 중에서 오십 냥만 가지고 나머지는 스님에게 돌려준 뒤 화방을 나섰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귀한 그림이 소실된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대순회보> 93호
 

[참고문헌]
ㆍ최완수 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여행』, 대원사, 1999, pp.7~10.
ㆍ임매 저ㆍ김세민 역, 『내시의 안해』, 보리, 2006, pp.272~275.
ㆍ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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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시대 병조(兵曹) 관청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종6품 관직으로 정원은 좌ㆍ우 각 1명이었다. 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담당하였으며, 세자의 거동 때는 앞에서 인도하고, 회강(會講: 사부 및 여러 관원을 모아놓고 학습을 점검하는 일) 때는 섬돌 아래서 시립하였다.

02 중국 2대 화풍(畵風) 중의 하나로 남화(南畵)라고도 한다. 중국 명(明)나라 후기에 막시룡(莫是龍)과 동기창(董其昌) 등이 중국회화를 출신신분과 화풍에 따라 남북 2종(南北二宗)으로 구분지은 데서 생긴 명칭이다. 남종화가 자연의 감흥을 중시하는 문인화적(文人畵的) 색채가 강한 회화인데 비해 기교적인 직업화가의 회화를 북종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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